김방경 묘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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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1-06-25 18:11 조회3,657회 댓글0건본문
인터넷 상에서 광산김씨 예안파를 설명하는 내용중에 충렬공 김방경 할아버지 묘와 관련된 내용이 있어 내용이 좀 길지만 그대로 퍼서 올려 봅니다.
1.[종가]-광산김씨 예안파의 오백년 세월
광산김씨와 안동김씨(상락김씨)
광산김씨 예안파를 취재하기로 하였을 때 가장 먼저 나의 머리 속에 떠오른 것은 전에 안동김씨(상락김씨)를 취재하는 과정에서 김방경 장군의 묘소에 들렀을 때 보았던 광산김씨 예안파 입향조의 묘소였다.
김방경 장군의 묘소를 향해 오르는 좁직한 돌계단의 입구에는 김방경 장군의 묘소라는 것을 알리는 표석 대신에 광산김씨 예안파 입향조묘소라는 표석이 버티고 서 있었다. 그리고 김방경 장군의 묘소에 잇대어서 바로 위 쪽에 광산 김씨 입향조의 묘소는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한 쉽지 않은 배치는 나의 마음 속에 풀리지 않는 의구심을 불러 일으켰었음을 아직도 나는 기억하고 있다. 조상의 묘소를 어떤 무엇보다도 중시하는 한국적 구조 속에서는, 그리고 묘자리를 명당 개념으로 이해하는 한국적 의식 속에서는, 남의 조상의 묘지 바로 위를 점령한다는 것은 어쩌면 피 튀기는 싸움까지 불러 일으킬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한 나의 의문은 소산리의 안동김씨(상락김씨) 종가를 찾았을 때 풀릴 수 있었다. 실전되었던 김방경 장군의 묘소를 광산김씨 측이 찾아 주었으며, 당시 안동김씨는 광산김씨와는 인척관계였고, 광산김씨 측에서는 입향조에게 제물을 바칠 때 먼저 김방경 장군에게 간단한 예를 올리는 순서를 갖는다는 이야기를 소산리에서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안동김씨(상락김씨)와 광산김씨 사이의 간단치 않은 인연을 알려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안동김씨(상락김씨)와 광산김씨 사이의 범상치 않은 관계는 광산김씨 예안파의 현 종손인 김준식씨를 면담하는 과정에서도 드러났다. "광산김씨가 안동으로 들어온 것은 무(務)자를 쓰시던 밀직부사공(密直副史公; 天利)의 둘째 아드님때 부터이지요. 저의 21대조 이신데요, 고려말선초에 안동으로 내려오셨지요. 처가가 영가김씨(안동김씨)여서 안동으로 낙향하시게 된 것이지요." 그러니까 광산김씨가 안동에 정착함에 있어서는 안동김씨(상락김씨)와의 인연이 절대적 의미를 갖는다고 하겠다.
그리고 그러한 인연은 김무로부터 3대 후에 김효로(金孝盧)가 안동김씨(상락김씨) 중시조인 김방경 장군과 묘지를 위 아래로 같이 씀으로써 이어져 나가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처음 김효로의 묘지가 그 자리에 정해졌을 때, 김방경 장군의 묘지가 그 아래 있다는 사실을 미리 인지하고 있었는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 점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다만 광산김씨가 안동 인근에서 그 한 갈래의 흐름을 열어나감에 있어서는, 안동김씨(상락김씨)와의 인연이 결정적인 기능을 하였음을 알아보는 것으로 그치고자 한다.
광산김씨를 생각할 때 안동김씨(상락김씨)를 먼저 떠올리는 것은 일반적인 연상법이 아닐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연상법의 사례가 오래 전부터 있어왔음을 우리는 기록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이를테면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이 쓰고 있는 근시재(近始齋) 김해(金垓)의 [묘지명]에서도 우리는 이러한 연상법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이 해 11월 경오(庚午)일에 현(縣)의 서쪽 지례촌(知禮村)의 북쪽 들에 (김해를) 장례지냈으니, 상락공 김방경의 묘와 같은 산자락이다. 대저 선생(김해)은 상락공의 외손인 까닭이다."
이렇게 우리는 이현일의 의식 속에서도 광산김씨와 안동김씨(상락김씨)를 묶어서 이해하는 연상법이 작용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이 기록은 김해의 묘지를 선택한 조건이 김방경과의 관계를 중요한 인자로 삼은 것이었다는 사실까지를 확인시켜 주지는 않는다. 그 점은 위의 구절을 통해서는 확정적인 답변을 마련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렇지만 이현일이 김해의 묘지를 바라보는 의식 속에서는 그 양자는 굳건한 연계를 맺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이현일이 김해를 김방경의 외손으로 연결시켜 이해하는 것은, 앞에서 거론하였던 사실, 즉 광산김씨의 안동 낙향조인 김무의 아내가 안동김씨(영가김씨)였다는 것 외의 다른 전거를 바탕으로 하는 것은 아니다. 김무 이후 김해에 이르기까지, 안동김씨를 배위로 하는 이 계열의 광산김씨 사람들은 없기 때문이다.
광산김씨와 안동김씨(상락김씨)를 상호 연계시켜서 바라보는 것이 일반적인 연상법이든 아니든, 나에게 있어서는 이런 의식의 상호관계는 너무나도 분명하다. 나의 경험을 전제로 할 때에는, 이러한 연상법이 충분한 의미를 지닐 수 있다는 것이다. 나에게는 안동김씨(상락김씨)에 대한 취재경험이 있고, 김방경 장군의 묘소를 돌아볼 때 광산김씨 입향조의 묘소도 눈여겨 보았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1.[종가]-광산김씨 예안파의 오백년 세월
광산김씨와 안동김씨(상락김씨)
광산김씨 예안파를 취재하기로 하였을 때 가장 먼저 나의 머리 속에 떠오른 것은 전에 안동김씨(상락김씨)를 취재하는 과정에서 김방경 장군의 묘소에 들렀을 때 보았던 광산김씨 예안파 입향조의 묘소였다.
김방경 장군의 묘소를 향해 오르는 좁직한 돌계단의 입구에는 김방경 장군의 묘소라는 것을 알리는 표석 대신에 광산김씨 예안파 입향조묘소라는 표석이 버티고 서 있었다. 그리고 김방경 장군의 묘소에 잇대어서 바로 위 쪽에 광산 김씨 입향조의 묘소는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한 쉽지 않은 배치는 나의 마음 속에 풀리지 않는 의구심을 불러 일으켰었음을 아직도 나는 기억하고 있다. 조상의 묘소를 어떤 무엇보다도 중시하는 한국적 구조 속에서는, 그리고 묘자리를 명당 개념으로 이해하는 한국적 의식 속에서는, 남의 조상의 묘지 바로 위를 점령한다는 것은 어쩌면 피 튀기는 싸움까지 불러 일으킬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한 나의 의문은 소산리의 안동김씨(상락김씨) 종가를 찾았을 때 풀릴 수 있었다. 실전되었던 김방경 장군의 묘소를 광산김씨 측이 찾아 주었으며, 당시 안동김씨는 광산김씨와는 인척관계였고, 광산김씨 측에서는 입향조에게 제물을 바칠 때 먼저 김방경 장군에게 간단한 예를 올리는 순서를 갖는다는 이야기를 소산리에서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안동김씨(상락김씨)와 광산김씨 사이의 간단치 않은 인연을 알려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안동김씨(상락김씨)와 광산김씨 사이의 범상치 않은 관계는 광산김씨 예안파의 현 종손인 김준식씨를 면담하는 과정에서도 드러났다. "광산김씨가 안동으로 들어온 것은 무(務)자를 쓰시던 밀직부사공(密直副史公; 天利)의 둘째 아드님때 부터이지요. 저의 21대조 이신데요, 고려말선초에 안동으로 내려오셨지요. 처가가 영가김씨(안동김씨)여서 안동으로 낙향하시게 된 것이지요." 그러니까 광산김씨가 안동에 정착함에 있어서는 안동김씨(상락김씨)와의 인연이 절대적 의미를 갖는다고 하겠다.
그리고 그러한 인연은 김무로부터 3대 후에 김효로(金孝盧)가 안동김씨(상락김씨) 중시조인 김방경 장군과 묘지를 위 아래로 같이 씀으로써 이어져 나가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처음 김효로의 묘지가 그 자리에 정해졌을 때, 김방경 장군의 묘지가 그 아래 있다는 사실을 미리 인지하고 있었는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 점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다만 광산김씨가 안동 인근에서 그 한 갈래의 흐름을 열어나감에 있어서는, 안동김씨(상락김씨)와의 인연이 결정적인 기능을 하였음을 알아보는 것으로 그치고자 한다.
광산김씨를 생각할 때 안동김씨(상락김씨)를 먼저 떠올리는 것은 일반적인 연상법이 아닐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연상법의 사례가 오래 전부터 있어왔음을 우리는 기록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이를테면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이 쓰고 있는 근시재(近始齋) 김해(金垓)의 [묘지명]에서도 우리는 이러한 연상법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이 해 11월 경오(庚午)일에 현(縣)의 서쪽 지례촌(知禮村)의 북쪽 들에 (김해를) 장례지냈으니, 상락공 김방경의 묘와 같은 산자락이다. 대저 선생(김해)은 상락공의 외손인 까닭이다."
이렇게 우리는 이현일의 의식 속에서도 광산김씨와 안동김씨(상락김씨)를 묶어서 이해하는 연상법이 작용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이 기록은 김해의 묘지를 선택한 조건이 김방경과의 관계를 중요한 인자로 삼은 것이었다는 사실까지를 확인시켜 주지는 않는다. 그 점은 위의 구절을 통해서는 확정적인 답변을 마련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렇지만 이현일이 김해의 묘지를 바라보는 의식 속에서는 그 양자는 굳건한 연계를 맺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이현일이 김해를 김방경의 외손으로 연결시켜 이해하는 것은, 앞에서 거론하였던 사실, 즉 광산김씨의 안동 낙향조인 김무의 아내가 안동김씨(영가김씨)였다는 것 외의 다른 전거를 바탕으로 하는 것은 아니다. 김무 이후 김해에 이르기까지, 안동김씨를 배위로 하는 이 계열의 광산김씨 사람들은 없기 때문이다.
광산김씨와 안동김씨(상락김씨)를 상호 연계시켜서 바라보는 것이 일반적인 연상법이든 아니든, 나에게 있어서는 이런 의식의 상호관계는 너무나도 분명하다. 나의 경험을 전제로 할 때에는, 이러한 연상법이 충분한 의미를 지닐 수 있다는 것이다. 나에게는 안동김씨(상락김씨)에 대한 취재경험이 있고, 김방경 장군의 묘소를 돌아볼 때 광산김씨 입향조의 묘소도 눈여겨 보았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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