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난설헌 소설-이 생에서는 늘 이별이었네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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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6-05-24 13:19 조회1,644회 댓글0건본문
<제22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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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앉아 있으니 잠이 밀려왔다. 졸음을 쫓을 꺼리를 찾아 방안을 둘러보는 그의 눈에 맞은편 벽에 기대선 검고 기다란 몸매의 거문고가 눈에 띄었다. 열흘전, 입격을 축하하러 온 손곡이 등과 선물이라며 놓고 간 거문고였다. 그는 몸을 일으켜 방안을 가로질러 그 거문고를 집어 들고 방 가운데에 와서 보료 위에 앉았다. 그는 무릎 위에 거문고를 올리며 빙긋이 웃음을 지었다. 거문고와 악보를 건네주며 손곡이 하던 말이 떠올라서였다. 제대로 된 선비라면 풍류도 알아야 하오, 하고 손곡은 말했었다. 그는 오른손으로 술대를 끼고 왼손으로 거문고 줄을 골랐다. 허봉은 대현(大絃)부터 문현(文絃)·무현(武絃)·괘상청·괘하청·유현(遊絃) 순으로 차례로 현을 뜯어 소리를 시험해 보았다. 묵직한 음역에서 가벼운 음역 순으로 악기가 반응을 보였다. 악보를 펼쳤을 때였다. 문밖에 기척이 있었고 하인의 아뢰는 소리가 들렸다. 손곡이라도 온 것일까. 그가 여전히 줄을 잡은 채 물었다. 『 무슨 일인가? 』 『 강릉에서 하객이 오셨다고 대감마님께서 안사랑으로 드시랍니다. 』 아마 강릉외가나 친가 쪽 먼 족척어른이 그의 입격 소식을 듣고 상경한 모양이었다. 그는 불현듯 짜증이 났다. 매일 계속되는 판에 박힌 하객들의 축하인사와 권주(勸酒)에. 『 마님께 내가 출타하고 없더라고 아뢰어라. 』 『 하지만… 』하인이 머뭇거렸다. 하인들의 거짓말에 아버지는 엄격했다. 『 방금 나간 것 같다고 아뢰면 되질 않느냐 ! 』 하인의 발걸음이 멀어지고 있었다. 그는 거문고를 내려다보았다. 이미 거문고를 타고 싶은 흥은 달아나고 없었다. 하긴 거문고를 타서도 안되었다. 자리에 있으면서 인사를 드리지 않을 수도 없었으므로. 웬 손님이 이렇게 올까. 그깟 입격이 뭐 대단한 일이라고. 그런데 열흘내에 정리하고 오겠다던 손곡은 어째 아직 소식이 없는 것일까. 아버지에게 겨우 승락을 받아 놓았는데. 그는 손곡을 생각하자 입가에 쓴 미소가 떠올랐다, 자신도 모르게. 열 한살이나 된 아들이 있다고? 손곡에게도 시 쓰는 재주말고도 다른 재주가 있긴 있었군. 그는 일어섰다. 그리고 의관을 정제하고 소리 없이 대문 밖으로 나왔다. 밖은 어느새 어두워져 있었다. 그는 공호(公浩)네 집으로 가려다, 돌아서 본방교 쪽으로 걸었다. 남소문동 자앙(子盎)이네 집으로 가기 위해. 이번에 동방입격(同榜入格)한 공호도 비슷한 입장일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견의 집이 저만큼 보였다. 이견(而見)이 낙향한 후 이견의 집은 줄 곳 비어있었다. 그런데 이견의 집 대문에 하인이 장명등을 내 걸고 있었다. 들어온다던 이견의 종제가 온 것일까? 하고 걸어가는데, 대문이 열리고 선비 두 사람이 나왔다. 놀랍게도 둘 가운데 하나는 이견이었다. 그 옆에 있는 이는 공호였다. 『 아니, 형님 도대체 어찌 된 일이오? 』 『 미숙이, 입격 축하하이! 』이견은 그의 물음에는 답을 않고 축하부터 건네었다. 일년만이었다. 은거하여 학문만 하겠다고 이견이 낙향한 게 작년이었다. 『 자네 집에 가는 길인데 자넨 어딜 가는 길인가? 』공호가 말했다. 『 하객들 등살 때문엡 바람이나 쐬려고… 』허봉이 말했다. 『 입장이 나하고 비슷하군. 나도 하객들을 피해 나오다 서애 형님을 만났다네. 형님, 오래간만에 만났으니 우리 어디 가서 회포나 풉시다. 』 공호가 그렇게 말하고 앞장서서 광통교 쪽으로 걸었다. 이견이 걸으면서 저간의 경과들을 이야기했다, 어두운 표정으로 띄엄띄엄. 작년 봄부터 서애(西厓)에 세우던 상봉대(翔鳳臺)가 낙성(落成)을 앞둔 초가을에 때아닌 태풍(颱風)으로 불어난 낙동강 범람 때문에 무너져 내렸다고. 은거(隱居)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고 자조(自嘲)하고 있던 차에 누차 계속되는 출사(出仕) 왕명을 더는 거절하기 어려워 상경했다고 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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