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서운관정공파 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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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2-04-29 16:30 조회1,847회 댓글0건본문
서운관정공파 묘역
윤만 형님께서 지난 토요일, 경기도 의왕시 포일동 광곡산에 모셔 있는 서운관정공파 묘역 및 재실 서운재를 탐방하시고 자세한 길 안내와 탐방기행문을 소개하여 주심에 감사 드립니다.
문화유적총람CD 1집에 서운관정공파 묘역 내용이 있어 참고로 발췌하여 소개합니다.
▣ 문화유적총람1
● § 의왕 김장 영단
분류번호: 437-080-272-001
주소지: 경기도 의왕시 내손동 산 81
지정사항: <지정사항 없음>
시대분류: 조선 시대
관리자:
유적종류: 사묘(단)
유적내용:
김장은 왜구 토벌로 상낙군의 작위를 받은 방경(方慶)의 증손이며 안동김씨 서운관정공파(書雲觀正公派) 시조인 수(綏)의 아비이다.
고려에서 보궐지감찰사장령을 역임했으며, 조선에서는 사헌부집의를 추증받았다.
무덤은 고려말기에 잃은 듯하고, 전하는 기록도 없다.
1969년 안동김씨 종회에서 영단을 세웠다. 석물은 비석과 혼유석, 상석, 향로석이 있다.
참고문헌: 충북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경기도, 1991, 《서울 외곽 순환 고속도로 문화 유적 지표 조사 보고서》
● § 의왕 김수 영단(金綬靈檀)
분류번호: 437-080-272-002
주소지: 경기도 의왕시 내손동 산 81
지정사항: <지정사항 없음>
시대분류: 조선 시대
관리자:
유적종류: 사묘(단)
유적내용:
김수는 안동 김씨 서운관정공파의 시조인데 고려 공양왕(恭讓王) 때, 서운판정공을 역임하였고, 그의 손자인 자행(自行)이 관찰사 등과 같은 관직을 역임한 공로로 조선에서 예조참의로 추증을 받았다.
그는 조선조 개창 이후, 이태조의 부름을 받았으나 나가지 않고, 원주 지방에 은신하여 행적과 묘소를 확인할 수 없었다.
1968년 안동김씨 종회에서 그의 영단을 만들었다. 석물로는 비석, 혼유석, 향로석, 상석이 있다.
참고문헌: 충북1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경기도, 1991, 《서울 외곽 순환 고속도로 문화 유적 지표 조사 보고서》
● § 의왕 김자행 영단(金自行靈檀)
분류번호: 437-080-272-003
주소지: 경기도 의왕시 내손동 산 81
지정사항: <지정사항 없음>
시대분류: 조선 시대
관리자:
유적종류: 사묘(단)
유적내용:
김자행은 서운관정 수의 손자이며, 사헌부집의를 지낸 질의 아들이다.
평안도와 경상도의 관찰사를 지냈으며,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다.
그의 무덤은 원래 금천현에 있었으나, 1938년 시흥군 신림리에 있는 부인 이씨의 묘에 옮겨서 합장하였다가 1987년 다시 이 곳으로 이장하였다.
무덤의 석물은 문인석을 제외하고 이장하면서 새로 설치한 것인데 묘비, 혼유석, 상석, 향로석, 망주석이 있다.
참고문헌: 충북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경기도, 1991, 《서울 외곽 순환 고속도로 문화 유적 지표 조사 보고서》
● § 의왕 김희수 묘(金希壽墓)
분류번호: 437-080-310-004
주소지: 경기도 의왕시 내손동 산 81
지정사항: <지정사항 없음>
시대분류: 조선 시대
관리자:
유적종류: 묘
유적내용:
김희수(1475-1527)의 자는 몽정(夢禎), 호는 유연재(悠然齎)이다. 정언, 도승지를 거쳐 경상도 관찰사로 재임 중 과로로 죽었다.
해서를 잘 썼다. 동래의 낙안서원에 제향되었다.
무덤은 원래 성남고등학교 자리에 있었으나 1938년에 이장되어 왔다. 홑무덤으로 부인 양씨와 합장하였다.
봉분의 형태는 한 면의 길이가 360cm인 사각형, 둘레는 모두 19개의 호석을 2단으로 둘렀다.
묘비(146 x 58 x 12cm)의 글은 영의정 심정(沈貞)이 찬하고, 아들 노(魯)가 글씨를 써서 1529년(중종 24년) 에 세운 것이다.
혼유석, 상석, 향로석, 망주석, 문인석 등이 있다.
참고문헌: 충북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경기도, 1991, 《서울 외곽 순환 고속도로 문화 유적 지표 조사 보고서》
● § 의왕 김노 묘(金魯墓)
분류번호: 437-080-310-005
주소지: 경기도 의왕시 내손동 산 81
지정사항: <지정사항 없음>
시대분류: 조선 시대
관리자:
유적종류: 묘
유적내용:
김노(1498-1548)의 자는 경삼(景參), 호는 동고(東皐)이며, 희수의 아들이다. 직제학을 역임했으며 첨지중추부사로 있을 때 죽었다.
글씨가 뛰어나 조정의 전책과 고관들의 비갈을 많이 썼다.
봉분(450 x 453cm)은 네모형이며, 잘 다듬은 호석을 각 면마다 4개씩 돌렸다. 좌향은 남남동-북북서 방향이다.
묘비(150 x 57 x 13 cm)는 1549년 예조판서를 지낸 정사룡(鄭士龍)이 짓고, 해서로 이름이 높은 여성군 송인(宋寅)이 글씨를 썼으며, 호조좌랑 신효중(申孝仲)이 전액을 썼다.
석물로는 혼유석, 상석, 향로석, 망주석, 문인석이 있다.
참고문헌: 충북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경기도, 1991, 《서울 외곽 순환 고속도로 문화 유적 지표 조사 보고서》
▣ 김항용 - 안.김에 대한 전 자료의 정리와 항목별 분류를 다 하고 계신 것 같아 그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 김태서 - 감사드립니다.
▣ 김영환 -
▣ 김윤만 - 감탄하기엔 새삼스럽고 그저 고맙고 감사할 따름입니다.
▣ 김은회 - 항시 고맙게 생각합니다.
▣ 김영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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