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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백범일지(44)민족에 내놓은 몸10. 불한당의 괴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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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6-06-15 14:43 조회1,72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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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불한당의 괴수

이 방법으로 우리는 한 사람을 골랐다. 그는 다른 죄수와 같이 차리고 같은 일을 하지마는 그 눈에 정기가 있고 동작에도 남다른 데가 있었다. 나이는 40 내외였다. 인사를 청한즉 그는 충청북도 괴산 사람이요, 5년 징역을 받아 이태를 치르고 3년을 남긴 강도범으로 통칭 김 진사라는 사람이었다. 나는 누구며, 무슨 죄로 왔느냐고 묻기로, 나는 황해도 안악 사람이요, 강도로 15년을 받았다고 하였더니 김 진사는,

"거, 짐이 좀 무겁소그려"

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그가 날더러 '초범이시오?' 하기로 그렇다고 대답할 때에 왜 간수가 와서 더 말을 못하고 헤어졌다.

내가 그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을 본 어떤 죄수가 날더러 그 사람을 아느냐 하기로 초면이라 하였더니 그 죄수의 말이,

"남도 도적치고 그 사람 모르는 도적이 없습니다. 그가 유명한 삼남 불한당 괴수 김 진사요, 그 패거리가 많이 잡혀 들어왔는데 더러는 병나 죽고 사형도 당하고 놓여 나간 자도 많지요"

하였다.

그랬더니 그날 저녁에 우리들이 벌거벗고 공장에서 감방으로 들어올 때에 그 역시 벌거벗고 우리 뒤를 따라서,

"오늘부터 이 방에서 괴로움을 끼치게 됩니다"

하고 내가 있는 감방으로 들어온다. 나는 퍽이나 반가와서,

"이 방으로 전방이 되셨소?"

하고 물은즉 그는,

"네. 아, 노형 계신 방이구려"

하고 그도 기쁜 빛을 보인다. 옷을 입고 점검도 끝난 뒤에 나는 죄수 두 사람에게 부탁하여 철창에 귀를 대어 간수가 오는 소리를 지켜 달라 하고 김 진사와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내가 먼저 입을 열어, 아까 공장에서는 서로 할 말을 다 못하여서 유감일러니 이제 한 방에 있게 되니 다행이란 말을 하였더니 그도 동감이라고 말하고는 계속하여서 그는 마치 목사가 신입 교인에게 세례 문답을 하듯이 내게 여러 가지를 묻는다.

그 첫 질문은,

"노형은 강도 15년이라 하셨지요?"

하는 것이었다.

"네, 그렇소이다"

"그러면 어느 계통이시오? 추설이요, 목단설이시오? 북대요 또 행락은 얼마 동안이나 하셨소?"

나는 이게 다 무슨 소린지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추설' '목단설'은 무엇이요, '북대'는 무엇이요, '행락'은 대체 무엇일까? 내가 어리둥절하고 있는 것을 보더니, 김 진사는 빙긋 웃으며,

"노형이 북대인가 싶으오"

하고 경멸하는 빛을 보였다.

내 옆에서 우리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죄수 하나가 김 진사를 대하여 나를 가리키며, 나는 국사범 강도라, 그런 말을 하여도 못 알아들을 것이라고 변명하여 주었다. 이 자는 찰강도라 계통 있는 도적이었다. 그의 설명을 듣고야 김 진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 어찌 이상하다 했소. 아까 공장에서 노형이 강도 15년이라길래 위아래로 훑어보아도 강도 냄새가 안 나기로 아마 북대인가보다 하였소이다"

한다.

나는 연전에 양산 학교 사무실에서 교원들과 함께 하던 이야기를 생각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세상에 활빈당(活貧黨)이니 불한당(不汗黨)이니 하는 큰 도적 떼가 있어서 능히 장거리와 큰 고을을 쳐서 관원을 죽이고 전재(錢財)를 빼앗았으되 단결이 굳고 용기가 있으며,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동작이 민활하여 나라 군사의 힘으로도 그들을 잡지 못한단 말을 들었는데, 우리가 독립 운동을 하자면 견고한 조직과 기민한 훈련이 필요한즉, 이 도적 떼의 결사와 훈련의 방법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 하여 두루 탐문해 보았으나 끝내 아무 단서도 얻지 못하고 만 일이 있었다.

사흘을 굶으면 도적질할 마음이 난다고 하지마는 마음만으로 도적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니 거지도 용기와 공부가 필요할 것이다. 담을 넘고 구멍을 뚫는 좀도둑은 몰라도 수십 명, 수백 명 떼를 지어 다니는 도적이라면 거기에는 조직도 있고, 훈련도 있고, 의리도 있으려니와 무엇보다도 두목 되는 지도자가 있을 것인즉, 수십 명, 수백 명 도적 떼의 지도자가 될 만한 인물이면 능히 한 나라를 다스려 갈 만한 지혜와 용기와 위엄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김 진사에게 도적 떼의 조직에 관한 것을 물었다. 그런즉 진사는 의외에도 은휘(隱諱 : 숨기고 꺼리는 것 - 편집자 주*)함 없이 내 요구에 응하였다.

"우리 나라의 기강이 다 해이한 이때까지도 고대로 남은 것은 벌과 도적의 법뿐이외다."

하는 허두로 시작된 김 진사의 말에 의하면 고려 이전은 상고할 길이 없으나, 이조 시대의 도적 떼의 기원은 이성계(李成桂)의 이신벌군(以臣伐君 : 신하로서 임금을 들어 치는 것 - 편집자 주*)의 불의에 분개한 지사들이 도당을 모아 일변 이성계를 따라서 부귀 영화를 누리는 소위 양반의 무리의 생명과 재물을 빼앗고 일변 그들이 세우려는 질서를 파괴하여서 불의에 대한 보복을 하려는 데서 나왔으니, 그 정신에 있어서는 두문동 72현과 같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도적이라 하나 약한 백성의 것은 건드리지 아니하고 나라의 재물이나 관원이나 양반의 것을 약탈하여서 가난하고 불쌍한 자를 구제함으로 쾌사(快事 : 통쾌한 일 - 편집자 주*)를 삼았다. 이 모양으로 나라를 상대로 하기 때문에 자연히 법이 엄하고 단결이 굳어서 적은 무리의 힘으로 능히 5백 년간 나라의 힘과 겨루어 온 것이었다.

이 도적의 떼는 근본이 하나요, 또 노사장(老師丈)이라는 한 지도자의 밑에 있으나 그 중에서 강원도에 근거를 둔 일파를 '목단설'이라 부르고, 삼남에 있는 것을 '추설'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이 두 설에 속한 자는 서로 만나면 곧 동지로, 서로 믿고 친밀하게 하였다. 이 두 설에 들지 아니하고 임시 임시로 도당을 모아서 도적질하는 자를 '북대'라고 하는데, 이 북대는 목단설과 추설의 공동의 적으로 알아서 닥치는 대로 죽여버리게 되었다.

노사장 밑에는 유사(有司)가 있고 각 지방의 두목도 유사라고 하여 국가의 행정 조직과 방사하게 전국의 도적을 총괄하였다. 1년에 일차 '대장'을 부르니 이것은 목단설과 추설 전체의 대회요, 또 수시로 '장'을 부르니 이것은 한 설만의 대회였다. 대회라고 전원이 출석하기는 불가능하므로 각 도와 각 군에서 몇 명씩 대표자를 파견하기로 되었는데, 그 대표자는 각기 유사가 지명하게 되며, 한 번 지명을 받으면 절대 복종이었다.

이 '장' 부르는 처소는 흔히 큰 절이나 장거리였다. 대소 공사를 혹은 의논하고 혹은 지시하여 장이 끝난 뒤에는 으레 어느 고을이나 장거리를 쳐서 시위를 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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