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백리 김두남(金斗南) 선조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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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영. 발용 작성일06-06-18 11:53 조회1,469회 댓글2건본문
김두남(金斗南)
1657(효종8) ~1715(숙종41). 字는 (일경)一卿, 號 (탁청헌)濯淸軒, 성균관생원, 1687년(숙종13)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하고 헌납(獻納), 장령(掌令), 사련원헌납겸춘추관기주관(司言束院獻納兼春秋館記注官)을 역임하고 자헌대부(資憲大夫)(정2품) 예조판서겸지경연의금부사(禮曹判書兼知經筵義禁府事), 홍문관대제학(弘文館大提學),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 성균관사(成均館事), 오위도총부도총관(吳衛都摠莩摠官), 세손좌빈객(世孫左賓客)에 추증. 1734(영조10) 8월,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가계도 : 七陽(郡事公)-塡-三老-瑀-允剛-夏詳-壤-鼎--坰-寅亮-址-斗南
▲ 청백리 휘 두남 묘갈. 파주에서 용인으로 천장할 때 봉분은 없애고 묘갈만을 모셨다고 한다.
▲ 옥개석의 웅장한 모습. 석가레가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다.
▲ 묘비 전면.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 조명교(曺命敎)가 서(書)하였다.
▲ 비문 일부.
▲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유척기(兪拓基) 찬(撰). 영의정 서지수(徐志修) 서(書).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 조명교(曺命敎) 전면서(前面書)
▲ 후에 자헌대부에 증직 된 내용을 추기하였다.
▲ 치수를 재고.....
▲ 숭록대부 지중추부사 홍득 지묘(휘 두남의 子)
▲ 묘역 전경.
조명교(曺命敎)
1687(숙종 13)∼1753(영조 29).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이보(彛甫), 호는 담운(澹雲). 판결사 하기(夏奇)의 아들이다.
1717년(숙종 43)사마시를 거쳐, 1719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1721년(경종 1)검열에 재직 중 신임사화로 파직 당하였다.
1724년 영조가 즉위하자 정언에 등용되어 9개 조항의 시정(施政)을 상소하였으며, 이듬해 어사로 임명된 바 있고, 1727년 경종의 질병을 중외(中外)에 해명하도록 소를 올리고, 소론을 논척하는 데 앞장섰다.
1728년 이후 교리·부수찬·지평·승지·광주부사(廣州府使) 등을 역임하고, 1735년 대사성을 거쳐 이듬해 대사간·이조참의를 지냈다.
1740년에는 소론인 조태억(趙泰億)의 손자 영근(榮謹)의 문묘(文廟)배알을 막아 파직되었다.
그러나 다음해 다시 등용되어 정언·부교리·개성유수 등을 지내고, 1747년 대사헌에 올랐으며, 그해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다시 대사헌·호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1749년 대사헌에서 파직되었다가 이듬해 서용되어 호조참판·대사헌·이조참판에 이어 1753년 예문관제학에 이르렀다.
덕행과 학문으로 선비의 추앙을 받았으며, 글씨에도 뛰어나 많은 비문을 남겼는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능가사사적비(楞伽寺事蹟碑)·영의정최규서표(領議政崔奎瑞表)·예조판서김시환비(禮曹判書金始煥碑)·판돈녕부사조광원비(判敦寧府事趙光遠碑)·공조참판조문수비(工曹參判曺文秀碑)·청백리김두남비(淸白吏金斗南碑)등을 들 수 있다.
서지수(徐志修)
1714(숙종 40)∼1768(영조 4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일지(一之), 호는 송옹(松翁) 또는 졸옹(拙翁).
좌의정 명균(命均)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청풍김씨(淸風金氏)이다.
1733년(영조 9) 진사가 되고, 1740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양관(兩館:홍문관과 예문관)의 제학과 대사헌·이조판서 등 청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766년에는 영의정에 올라 할아버지 종태(宗泰), 아버지 명균에 이어 3대째 상신(相臣)이 되었다. 대사헌으로 있을 때 장헌세자(莊獻世子)의 비행을 조작하여 영조에게 허위보고한 김상로(金尙魯)·홍계희(洪啓禧) 일당을 탄핵하였으며, 시강원(侍講院)의 빈객(賓客)으로 장헌세자를 교도하여 그 보호에 힘썼다.
장헌세자가 죽고 그의 아들 정조가 동궁에 있을 때 정경(正卿)의 직위에 있으면서 동궁의 요속(僚屬)이 되어 보좌하였으며, 또 왕위에 오르는 데 절대적인 공헌을 하여 뒤에 정조의 추앙을 받았다.
천성이 청렴결백하여 세속과 어울리지 않았으며, 정조 때 청백리로 현창되었다.
글씨에도 뛰어나 영유(永柔)의 〈제갈량묘악비문천상추배기사비 諸葛亮廟岳飛文天祥追配紀事碑〉와 양주(楊州)의 〈풍덕부사서명무갈 豊德府使徐命茂碣〉용인의<청백리김두남비 淸白吏金斗南碑>을 썼다.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유척기(兪拓基)
1691(숙종 17)∼1767(영조 4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기계(杞溪). 자는 전보(展甫), 호는 지수재(知守齋).
대사헌 철(㯙)의 손자이며, 목사 명악(命岳)의 아들이다. 김창집(金昌集)의 문인이다.
1714년(숙종 40)에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에 제수된 이후 정언·수찬·이조정랑·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1721년(경종 1)에 세제(世弟)를 책립하자 책봉주청사(冊封奏請使)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신임사화 때 소론의 언관 이거원(李巨源)의 탄핵을 받고 해도(海島)에 유배되었다.
1725년(영조 1) 노론의 집권으로 풀려나서 이조참의·대사간을 역임하고 이듬해 승지로 참찬관을 겸하다가 경상도관찰사·양주목사·함경도관찰사·도승지·원자보양관(元子輔養官)·세자시강원빈객(世子侍講院賓客)·평안도관찰사·호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739년 우의정에 오르자 신임사화 때 세자책봉문제로 연좌되어 죽은 김창집(金昌集)·이이명(李頤命) 두 대신의 복관(復官)을 건의하여 신원(伸寃)시켰으나 신임사화의 중심인물인 유봉휘(柳鳳輝)·조태구(趙泰耉) 등의 죄를 공정히 다스릴 것을 주청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사직하였다. 그때 평소 그와 가까웠던 당시의 명류(名流) 조관빈(趙觀彬)·김진상(金鎭商)·이기진(李箕鎭) 등도 벼슬을 그만두었다.
그뒤 수차 임관(任官)에 불응하여 마침내 삭직당하여 전리(田里)에 방축되었다.
만년에 김상로(金尙魯)·홍계희(洪啓禧) 등이 영조와 그 아들 사도세자(思悼世子)사이를 이간시키니 그는 이를 깊이 우려하였고, 이천보(李天輔)가 영의정에서 물러나자 영조에 의하여 중용되어 영상으로 임명되었다.
그가 벽파 김상로를 조정에서 대할 때 항상 싫어하는 기색이었으나 김상로는 감히 말을 못하였다.
1760년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되었고, 이어서 봉조하(奉朝賀)를 받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그는 기국(器局)이 중후하고 고금의 일에 박통하였으며, 대신의 기풍을 지닌 노론 중의 온건파에 속하였다.
당대의 명필가요 금석학(金石學)의 권위자이기도 하였다.
글씨로는 경주의 〈신라시조왕비 新羅始祖王碑〉, 청주의 〈만동묘비 萬東廟碑〉 등을 남겼고, 저서로는 《지수재집》 15권이 있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댓글목록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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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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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깜짝 놀랄 자료입니다. 오랫동안 궁긍해 하던 우리 안김의 명인이요 청백리에 녹선 되신 분의 묘소가 이렇게 지척에 있었다니---
그런데 상기 두남 선조님의 소개 자료에는 자헌대부(정2품) 예조판서인데, 묘비에는 증통정대부(정3품) 행 통훈대부로 되어 있습니다.
어느 것이 옳은 것인지-
일단 홈 <군사공파란>에 올리겠습니다. 주요 인물란에도 올리겠습니다.
김발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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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발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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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묘비에 자헌대부에 증직이 된 내용이 추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부분을 미처 올리지 못하여 오해가 있었습니다.
묘비 사진 추가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