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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난설헌 소설-이 생에서는 늘 이별이었네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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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6-06-18 17:20 조회1,29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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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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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손곡(蓀谷).

  방안에 들어서자 초희는 옆에 끼고 있던 논어를 서안 위에 얹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는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연당의 푸른 물이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따가운 햇살에 비친 연당가 버드나무들이 수면 위에 길게 늘어져 있었다. 연당을 스쳐 온 바람이 느리게 밀려왔다. 작은 오라버니가 묵사동(墨寺洞)으로 분가한 후 하나 좋아진 게 단 하나 있다면 그들이 쓰던 별당 아랫채를 초희가 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초희는 무연한 시선으로 연당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수면을 건너오는 물 동그라미의 외연이 넓어지고 있었다. 초희는 시선을 들어 그 물 동그라미들의 내연을 따라갔다. 연당 건너편 버드나무 아래서 누군가 수면 위에 무언가를 던지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별당 행랑어멈인 태점이 연당에 물고기 밥을 던지고 있었다.
 물고기 밥을 다 던져 주고 난 다음에도 한동안 버드나무 아래에 서서 무연히 수면을 내려다보고 있던 태점이 버드나무 가지 하나를 꺾어 버들피리를 만들어 입에 물더니 물가에 앉았다. 아마, 태점이 또 고향생각이 난 모양이었다. 초희는 창에서 물러나 대나무 베개를 베고 방에 누웠다. 그녀는 태점이 부는 버들피리소리 듣는 것을 좋아했다. 버드나무 우거진 경포(鏡浦)를 생각나게 하기 때문이었다.
 버들피리소리는 처음에는 늦여름 더위 먹은 바람결처럼 느릿하게 들려 왔다. 그러다 차차 소리에 빠름과 느림이 배분되고 애조가 배이기 시작했다. 태점은 지난 봄에 결혼한 새악시였다. 본래 그녀는 강릉 애일당 노비였는데, 얼굴에 큰 점이 있어 서른 가깝도록 시집을 못간 것을 안타까이 여긴 외삼촌이 그녀를 상처한 별당행랑아범과 맺어 준 것이었다.
 갑자기 피리소리가 멈췄다. 초희는 조바심이 났다. 피리소리가 아주 멈춘 것은 아닌 가하여. 윗 채 큰 올케는 버들피리소리가 청승맞다며 때로 태점에게 타박을 주었던 것이다. 다행히 피리소리는 다시 이어졌다. 피리소리는 점점 애잔해 졌다. 어떤 슬픔이 가슴이 있기에 태점은 저토록 애잔한 가락을 뽑아 내는 것일까. 초희는 가만히 피리소리를 듣고 있자니 이유도 없이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이상하게 근자에는 마음이 그렇게 허전할 수가 없었다. 작은 오라버니가 분가하고 나서부터 이랬다. 작은 오라버니는 분가 할 때 초희의 등을 다독여주며 말했다. 오라비 대신 더 훌륭한 선생님이 곧 오실 것이니 글 열심히 읽으라고. 그렇게 말하는 작은 오라버니는 초희의 마음을 조금도 모르는 것 같았다. 초희가 바라는 것은 작은 오라버니보다 훌륭한 선생님에게 배우는 것이 아니라 작은 오라버니가 언제나 초희 곁에서 있어 주는 것임을. 초희는 눈을 감았다.
 이상하게도 작은 오라버니가 분가하고 나자 가슴이 텅 빈 것 같고 온 집 안이 빈 것 같았다. 큰 오라버니 부처와 부모님들은 언제나처럼 초희에게 따뜻하고 자애로웠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글 읽는 것도 그전만큼 재미가 없어졌다. 오늘만 해도 그랬다. 악록(岳麓) 오라버니에게 논어를 배우다 생각이 딴 데 가 있는 것 같다고 몇 번이나 질책을 당했다. 마음이 산만하고 글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물론 분가한 후에도 작은 오라버니는 집에 자주 들렀고 묵사동이라면 집에서 먼 거리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가끔 집을 찾아오는 작은 오라버니가 그전과는 달리 서먹서먹하기까지 했다, 낯선 사람처럼. 피리소리가 아득하게 멀어지고 있었다. 잠이 밀려왔다. 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온다는 기한이 넘었는데도 작은 오라버니가 말한 선생님은 왜 안 오시는 걸까.
  누군가가 그녀를 흔들고 있었다. 초희는 눈을 떴다. 그녀를 흔들어 깨운 것은 네살바기 아우 균(筠)이었다. 아마 깜박 잠이 든 모양이었다. 피리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초희가 눈을 부스스 부비며 일어났다. 아우가 말했다. 둘째 형님이 왔어요. 누님과 함께 바깥사랑에 들라 합니다. 초희는 낯을 씻고 머리를 빗었다. 그리고 옷을 갈아입고 아우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왔다. 긴 여름 해가 뉘엿뉘엿 기울고 있었다. 오누이는 별당마당을 가로질렀다. 웬 종일 뜨거운 태양에 익은 별당마당에 깔린 자갈은 아직 뜨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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