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백범일지(45)민족에 내놓은 몸11. 도적만도 못한 단결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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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6-06-21 15:20 조회1,497회 댓글1건본문
11. 도적만도 못한 단결로는
그들은 대회에 참여하러 갈 때에는 혹은 양반으로 혹은 등짐 장수로, 혹은 장돌림, 혹은 중, 혹은 상제로 별별 가장을 하여서 관민의 눈을 피하였다. 어디를 습격하러 갈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당시에 세상을 놀라게 한 하동 장 습격은 장례를 가장하여 무기를 관에 넣어 상여에 싣고 도적들은 혹은 상제, 혹은 복인, 혹은 상두꾼, 혹은 화장객이 되어서 장날 백주에 당당히 하동 읍내로 들어간 것이었다.
김 진사는 이러한 설명을 구변좋게 한 후에 내게,
"노형 황해도라셨지? 그러면 연전에 청단(靑丹) 장을 치고 곡산 원을 죽인 사건을 아시겠구려?"
하기로, 아노라고 대답하였더니, 김 진사는 지난 일을 회상하고 유쾌한 듯이 빙그레 웃으며,
"그 때에 도당을 지휘한 것이 바로 나요. 나는 양반의 행차로 차리고 사인교를 타고 구종 별배로 앞 뒤 벽제까지 시키면서 호기 당당하게 청단 장에를 들어갔던 것이오. 장에 볼 일을 다 보고 질풍 신뢰와 같이 곡산읍으로 들이몰아서 곡산 군수를 잡아죽였으니 이것은 그놈이 학정을 하여서 인민으로 어육을 삼는다 하기로 체천행도를 한 것이었소"
하고 말을 마친다.
"그러면 이번 징역이 그 사건 때문이오?"
하고 내가 묻는 말에 그는,
"아니오. 만일 그 사건이라면 5년만으로 되겠소? 기위 면키 어려울 듯하기로 대단치 아니한 사건 하나를 실토하여서 5년 징역을 졌소이다."
나는 그들이 새 동지를 구할 때에 어떻게 신중하게 오래 두고 그 인물을 관찰하는 것이며, 이만하면 동지가 되겠다고 판단한 뒤에도 어떻게 그의 심지를 시험하는 것이며, 이 모양으로 동지를 고르기 때문에 한 번 동지가 된 뒤에는 서로 다투거나 배반하는 일이 거의 없다는 것이며, 장물 - 도적질한 재물 - 을 나눌 때에 어떻게 공평하다는 것이며, 또 동지의 의리를 배반하는 자가 만일에 있으면 어떻게 형벌이 엄중하다는 것도 김 진사에게 들었다.
인물을 고를 때에는 먼저 눈 정기를 본다는 것이며 죄 중에 가장 큰 죄는 동지의 처첩을 범하는 것과 장물을 감추는 것이요, 상 중에 가장 큰 상은 불행히 관에 잡혀가더라도 동지를 불지 아니하는 것이니, 이러한 사람을 위하여서는 그 가족이 편안히 살도록 하여 준다는 말도 들었다.
김 진사의 말을 듣고 나는 나라의 독립을 찾는다는 우리 무리의 단결이 저 도적만도 못한 것을 무한히 부끄럽게 생각하였다.
여기서 나는 동지 도인권을 생각하지 아니할 수 없다. 그는 본시 용강 사람으로 노백린, 김희선, 이 갑 등이 장령으로 있을 때에 군인이 되어서 정교의 자리에까지 올랐다가 군대가 해산되매 향리에 돌아와 있는 것을 양산 학교 체육 선생으로 연빙(延聘)하여 와서 우리와 동지가 되어 이번 사건에도 10년 징역을 받고 나와 같이 고생을 하게 된 사람이다.
이때에 옥중에서는 죄수를 모아서 불상 앞에 예불을 시키는 예가 있었는데 도인권은 자기는 예수교인이니 우상 앞에 고개를 숙일 수 없다 하여 아무리 위협하여도 고개를 빳빳이 하고 있었다. 이것이 문제가 되어서 마침내 예불은 강제로 시키지 아니하기로 작정이 되었다.
또 옥에서 상표를 주는 것을 그는 거절하였다. 자기는 죄를 지은 일도 없고 따라서 회개한 일도 없으니 개전을 이유로 하는 상표를 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또 그 후에 가출옥을 시킬 적에도 도인권은 내가 본래 무죄한 것을 지금 와서 깨달았으니 판결을 취소하고 나가라 하면 나가겠지마는 가출옥이라는 '가' 자가 불쾌하니 아니 받는다고 버티어서 옥에서도 할 수 없이 형기를 채우고 도로 내보내었다. 도인권의 이러한 행동은 강도로서는 능히 못할 일이라, 만산고목일지청(滿山枯木一枝靑 : 온산의 나무가 말라 죽었으나 오직 한 가지가 푸르다는 뜻 : 편집자 주*)의 기개가 있었다.
'홀로 높고 정갈하여 구애됨이 없으니
천하를 홀로 걸으매, 누가 나를 짝하랴
(嵬嵬落落赤裸裸
獨步乾坤誰伴我)라 한 불가(佛家)의 구(句)를 나는 도 군을 위하여 한 번 읊었다.
하루는 나가서 일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일을 중지하고 명치(明治 : 당시 일본의 왕이던 메이지를 말함 - 편집자 주*)가 죽었다는 것과 그 때문에 대사(大赦 : 사면령을 말하는 것으로 보임 - 편집자 주*)를 내린다는 말을 하였다.
이 때문에 최고 2년인 보안법 위반에 걸린 동지들은 즉일로 나가고 나는 8년을 감하여 7년이 되고, 김홍량 기타 15년은 7년을 감하여 8년이 되고 10년이라도 그 비례로 감형이 되었다. 그런 뒤 수 삭을 지나서 또 명치의 처가 죽었다 하여 다시 자기의 3분의 1을 감하니 내 형은 5년 남짓한 경형이 되고 말았다.
이때 종신이던 것이 20년으로 감하여진 안명근은 형을 가하여 죽임을 받을지언정 감형은 아니 받는다고 항거하였으나 죄수에게 대하여서는 일체를 강제로 집행하는 것인즉, 감형을 아니 받을 자유도 죄수에게는 있지 아니하다 하여 필경 20년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는 안명근은 새로 지은 마포 감옥으로 이감이 되어서 다시는 그의 면목을 대할 기회도 없게 되었다.
안명근은 전후 17년 동안 감옥에 있다가 연전에 방면되어 신천 경계동에서 그 부인과 같이 여생을 보내고 있더니 아령(俄領 : 러시아 땅 - 편집자 주*)에 있는 그 부친과 친아우를 그려서 그리로 가던 길에 만주 화룡현(和龍縣)에서 만고의 한을 품고 못 돌아올 길을 떠나고 말았다.
이렇게 연거푸 감형을 당하고 보니 이미 치러 버린 3년 나머지를 떼면 나머지 형기가 2년밖에 아니된다. 이때부터는 확실히 세상에 나가서 활동할 희망이 생겼다. 나는 세상에 나가면 무슨 일을 할까. 지사들이 옥에 다녀 나가서는 왜놈에게 순종하여 구질구질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많은 것을 보니 나도 걱정이 되었다.
나는 왜놈이 지어준 뭉우리돌대로 가리라 하고 굳게 결심하고 그 표로 내 이름 김 구(金龜)를 고쳐 김 구(金九)라 하고 당호 연하(蓮下)를 버리고 백범(白凡)이라고 하여 옥중 동지들께 알렸다.
이름자를 고친 것은 왜놈의 국적에서 이탈하는 뜻이요, '백범'이라 함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천하다는 백정과 무식한 범부까지도 전부 적어도 나만한 애국심을 가진 사람이 되게 하자 하는 내 원을 표하는 것이니, 우리 동포의 애국심과 지식의 정도를 그만큼이라도 높이지 아니하고는 완전한 독립국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나는 감옥에서 뜰을 쓸고 유리창을 닦을 때마다 하느님께 빌었다. 우리 나라가 독립하여 정부가 생기거든 그 집의 뜰을 쓸고 유리창을 닦는 일을 하여 보고 죽게 하소서 하고.
댓글목록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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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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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시작되는 백범일지 연재에 감사합니다.
도적들의 단결력보다 못한 독립운동가들의 단결력을 부끄러워한 것, 이름을 김구(金九)로 바꾼것, 당호 연하(蓮下)를 버리고 백범(白凡)이라 한 것,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