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백범일지(46) 민족에 내놓은 몸 12. 다시 인천 감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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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6-06-22 14:20 조회1,547회 댓글0건본문
12. 다시 인천 감옥으로
나는 앞으로 2년을 다 못 넘기고 인천 감옥으로 이감이 되었다. 나는 그 원인을 안다. 내가 서대문 감옥 제2과장 왜놈하고 싸운 일이 있는데 그 보복으로 그 놈이 나를 힘드는 인천 축항 공사로 돌린 것이었다.
여러 동지가 서로 만나고 위로하며 쾌활하게 3년이나 살던 서대문 감옥과 작별하고 40명 붉은 옷 입은 전중이 떼에 편입이 되어서 쇠사슬로 허리를 얽혀서 인천으로 끌려갔다. 무술(戊戌) 3월 초열흘날 밤중에 옥을 깨뜨리고 도망한 내가 17년만에 쇠사슬에 묶인 몸으로 다시 이 옥문으로 들어올 줄을 누가 알았으랴.
문을 들어서서 둘러보니 새로이 감방이 증축되었으나 내가 글을 읽던 그 감방이 그대로 있고, 산보하던 뜰도 변함이 없다. 내가 호랑이같이 소리를 질러 도변이놈을 꾸짖던 경무청은 매음녀 검사소가 되고, 감리사가 좌기하던 내원당(來遠堂)은 감옥의 집물을 두는 곳간이 되고, 옛날 주사, 순검이 들끓던 곳은 왜놈의 천지를 이루었다.
마치 죽었던 사람이 몇십 년 후에 살아나서 제 고향에 돌아와서 보는 것 같다. 감옥 뒷담 너머 용동 마루터기에서 옥에 갇힌 불효한 이 자식을 보겠다고 우두커니 서서 내려다 보시던 선친의 얼굴이 보이는 듯하다. 그러나 오늘의 김 구가 그날의 김창수라고 할 자는 없으리라고 생각하였다.
감방에 들어가니 서대문에서 먼저 전감된 낯익은 사람도 있어서 반가왔다.
어떤 자가 내 곁으로 쓱 다가앉아서 내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그 분 낯이 매우 익은데, 당신 김창수 아니오?"
한다.
참말 청천벽력이다. 나는 깜짝 놀랐다. 자세히 본즉 17년 전에 나와 한 감방에 있던 절도 10년의 문종칠(文鍾七)이다. 늙었을망정 젊었을 때 면목이 그대로 있다. 오직 그때와 다른 것은 이마에 움쑥 들어간 구멍이 있는 것이었다. 내가 의아한 듯이 짐짓 머뭇거리는 것을 보고 제 낯바닥을 내 앞으로 쑥 내밀어 나를 쳐다보면서,
"창수 김 서방, 나를 모를 리가 있소? 지금 내 면상에 이 구멍이 없다고 보면 아실 것 아니오? 나는 당신이 달아난 후에 죽도록 매를 맞은 문종칠이오. 그만하면 알겠구려"
하는 데는 나는 모른다고 버틸 수가 없어서 반갑게 인사를 하였다. 그자가 밉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였다.
문가는 날더러,
"당시에 인천 항구를 진동하던 충신이 무슨 죄를 짓고 또 들어오셨소?"
하고 묻는다. 나는 귀찮게 생각하여서,
"15년 강도요"
하고 간단히 대답하였다.
문가는 입을 삐죽거리며,
"충신과 강도는 상거가 심원한데요. 그 때에 창수는 우리 같은 도적놈들과 동거케 한다고 경무관한테까지 들이대지 않았소? 강도 15년은 맛이 꽤 무던하겠구려"
하고 빈정거린다.
나는 속에 불끈 치미는 것이 있었으나 문의 말을 탓하기는 고사하고 빌붙는 어조로,
"충신 노릇도 사람이 하고 강도도 사람이 하는 것 아니오? 한 때에는 그렇게 놀고 한 때에는 이렇게 노는 게지요. 대관절 문 서방은 어찌하여 또 이렇게 고생을 하시오?"
하고 농쳐 버렸다.
"나요? 나는 이번에는 감옥 출입이 일곱 번째니, 일생을 감옥에서 보내는 셈이오."
"역한 - 징역 기간 - 은 얼마요?"
"강도 7년에 5년이 되어서 한 반 년 지내면 또 한 번 세상에 다녀오겠소."
"또 한 번 다녀오다니, 여보시오 끔찍한 말도 하시오. 또 여기를 들어와서야 되겠소?"
"자본 없는 장사가 거지와 도적질이지요. 더욱이나 도적질에 맛을 붙이면 별 수가 없습니다. 당신도 여기서는 별 꿈을 다 꾸리다마는 사회에 나가만 보시오. 도적질하다가 징역한 놈이라고 누가 받자를 하오? 자연 농공상에 접촉을 못하지요. 개 눈에는 똥만 보인다고 도적질하던 놈은 배운 것이 그것이라 또 도적질을 하지 않소?"
문가는 이렇게 술회를 한다.
"그렇게 여러 번째라면 어떻게 감형이 되었소?"
하고 내가 물었더니 문은,
"번번이 초범이지요. 지난 일을 다 말했다가는 영영 바깥바람을 못 쏘여 보게요?"
하고 흥하고 턱을 춘다.
나는 서대문에 있을 적에 어떤 강도가 중형을 지고 징역을 하는 중에 그의 공범으로서 잡히지 않고 있다가 횡령죄의 경형으로 들어온 것을 밀고하여 중형을 지우고 저는 감형을 받고서 다른 죄수들에게 미움을 받는 사람을 보았다. 이것을 생각하니 문가를 덧들여 놓았다가는 큰일이다. 이 자가 내가 17년 전 김창수라는 것을 밀고하거나 떠벌이는 날이면 모처럼 1년 남짓하면 세상에 나가리라던 희망은 허사가 되고 만다.
그래서 나는 문가에게 친절 우친절하게 대접하였다. 사식도 틈을 타서 문가를 주어 먹게 하고 감식 - 감옥에서 주는 밥 - 이라도 문가가 곁에 있기만 하면 나는 굶으면서도 그를 먹였다. 이러다가 문가가 만기가 되어 출옥할 때에 나의 시원함이란 내가 출옥하는 것보다 못지 아니하였다.
나는 아침이면 다른 죄수 하나와 쇠사슬로 허리를 마주 매여 짝을 지어 축항 공사장으로 나갔다. 흙 지게를 등에 지고 10여 길이나 되는 사닥다리를 오르내리는 것이다. 서대문 감옥에서 하던 생활은 여기 비하면 실로 호강이었다. 반달이 못하여 어깨는 붓고 등은 헐고 발은 부어서 운신을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면할 도리는 없다. 나는 여러 번 무거운 짐을 진 채로 높은 사닥다리에서 떨어져 죽을 생각도 하였으나 그것도 할 수가 없는 것이 나와 마주 맨 사람은 대개 인천에서 구두 켤레나 담배 갑이나 훔치고 두서너 달 징역을 지는 판이라 그런 사람을 죽이는 것은 도리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조금도 편하려 하는 잔꾀를 버리고 '熱則熱殺 梨 寒則寒殺 梨(더울 때는 더위로 아사리를 죽이고, 추울 때는 추위로 아사리를 죽여라)'의 선가(禪家)의 병법으로 일하기에 아주 몸을 던져 버리고 말았다. 그리하였더니 몸이 아프기는 마찬가지라도 마음은 편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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