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게시판

허난설헌 소설-이 생에서는 늘 이별이었네 25

페이지 정보

김항용 작성일06-06-23 16:05 조회1,489회 댓글0건

본문

<제25회>

 

뉴시스 newsisfeel.com

 

  

  바깥사랑채 섬돌 저 만큼 앞에서 초희는 잠시 망설였다. 섬돌 위에 못 보던 크고 작은 신발과 발 너머 큰 오라버니 방에서 나오는 담소 소리에 귀에 선 걸걸한 음성이 섞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 초희와 균이 왔으면 들어오너라. 』언제나처럼 덤덤한 큰 오라버니의 음성이었다.
 오누이는 발을 제치고 앞 퇴로 올라 방안에 들어갔다. 방안에 처음 보는 꾀죄죄한 행색의 중년 사내가 두 오라버니와 낭자한 술상을 사이에 두고 앉아 있었다. 그 사내의 뒤에 저만큼 물러나 일행인 듯 보이는 초희 또래의 소년이 석상처럼 앉아 있었다. 세 사람은 이미 술이 거나하게 오른 듯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작은 오라버니가 그 낯선 일행에게 초희와 균이를 인사 시켰다. 중년 사내는 손곡 이달이라고 했고, 소년은 그의 아들이었는데 이름을 열(悅)이라고 했다. 나이는 초희보다 한살 많았다.
 『 앞으로 너희를 가르칠 선생님이시다. 열이도 함께 공부할 터이니 형제처럼 의좋게 지내라. 』
 선생님? 초희는 놀랐다. 초희는 다시 한번 사내를 훑어보았다. 사내는 찌그러진 갓을 쓰고 수염은 다듬지 않아 아무렇게나 자랐고 빛이 바랜 푸른 도포는 때에 절어 남루하기 짝이 없는 행색이, 그야말로 말로만 듣던 영락한 서생의 몰골이었다. 초희가 기다리던 선생님은 저런 사내가 아니었다.
 『 손곡, 비록 제 아우들이 미거하나마 앞으로 쓸만한 재목이 되도록 잘 다듬어 주시오.』 큰 오라버니가 손곡에게 술잔을 권하며 말했다.
 『 허허, 천학비재(淺學菲才)인 이 사람의 어깨가 무거워집니다. 특히 매씨(妹氏)는 어린 나이에 벌써 운(韻)에 통효(通曉)하여 절구(絶句)를 능숙하게 짓는다 하니… 』손곡이 술잔을 비우며 말했다.
 『 시(詩)는 읽을 만 하나 아직 깊은 맛이 없습니다. 아마 학문이 얕은 탓이겠지요. 손곡이 잘 이끌어 주면 언젠가는 반소나 이청조를 능가할 날이 있으리라 기대해봅니다. 』하곡이 손곡의 빈 잔에 다시 술을 채우며 말했다.
 『 하곡 같은 준재가 그렇게 칭찬하니 내가 과연 매씨를 가르칠 만한 능력이 있는가 두렵소. 』
 능력! 사내가 한말 가운데 불현듯 능력이라는 말이 초희의 떨떠름해 하는 가슴에 와 맺혔다. 눈앞에 앉은 저 꾀죄죄한 사내가 과연 내게 시와 학문을 가르칠 만한 능력이 있는 것일까? 도대체 오라버니는 저 사내의 무엇을 보고 균이와 나를 맡기려는 것일까? 초희는 사내의 시를 자신의 귀로 듣고 자신의 눈으로 보아 사내가 그럴 만한 능력이 있는가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려면 먼저 자신의 시를 먼저 보여 사내의 기선을 제압해야 할 것 같았다. 초희가 입을 열었다.
 『 선생님, 소녀의 시를 한 번 들어 보시고 가르치심을 주시어요. 』
 갑자기 끼어 든 초희의 음성이 뜻밖이었던 모양으로 담소를 나누던 세 사람이 초희를 돌아  보았다. 악록이 당돌한 초희의 말에 언짢은 표정을 지었으나 초희는 개의치 않고 사내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사내는 다소 얼떨떨해 하는 표정이었다. 사내가 채워 준 술잔을 비우고 하곡이 말했다.
 『 손곡, 초희가 아직 어려 치기(稚氣)가 탱천(撑天)한 데가 있습니다. 버릇이 없더라도 이왕 말이 나왔으니 한 번 들어보시고 가르치심을 주시지요. 』
 『 하곡의 매씨니 그 기상이 어련하겠소? 좋소이다. 시를 듣는다는 것은 술을 마시는 것만큼 기분 좋은 일이니까. 』 손곡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 초희야, 손곡이 이해 하신다니 네 시를 읽어보도록 해라. 』 하곡이 빈 잔을 놓고 떨떠름한 표정으로 있는 악록에게 술을 채우고는 초희에게 말했다.
 초희는 길게 숨을 들이마시고 마음을 가라앉히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낭랑한 음성으로 자신의 시(詩) 양류지사(楊柳枝詞)를 낭송하기 시작했다.
 
    灞陵橋畔渭城西
    파릉교에서 위성서쪽에 이르는
    雨鎖煙籠十里堤
    빗속에 잠긴 십릿길 긴 둑이 안개 낀 듯 자욱하네
    繫得王孫歸意切
    양류에 말을 매던 님은 돌아올 마음이 없으니
    不同芳草綠萋萋
    꽃다운 풀 푸르게 우거진들 무엇하리

 

 초희가 다음 편으로 넘어가려는데 손곡의 게슴츠레하던 눈이 짧은 순간, 빗살처럼 날카롭게 초희의 눈을 쏘았다. 초희는 그 눈빛에 가슴이 서늘해 졌다. 손곡의 취한 음성이 이어졌다.
  『 껄껄, 맹랑한 낭자로구먼 !』
  『 손곡 무슨 말씀이오? 』 음미하듯 술을 마시며 시를 듣고 있던 하곡이 물었다.
  『 글자를 몇 자 바꾼 *온정균(溫庭筠)의 시로 나를 시험하려 드니 어찌 맹랑하다 않을 수 있겠소? 』
 하곡과 악록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들은 동시에 초희를 보았다. 악록의 얼굴에는 노기가, 하곡의 얼굴에는 당황이 어려 있었다. 초희는 고개를 떨구었다. 오라버니들과 아버지는 속여넘겼던 시였다. 영문도 제대로 모르면서 곤경에 처한 제 누이가 안타까운 듯 옆에 앉은 어린 아우가 초희의 저고리 끝단을 만지작거리며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손곡이 빙긋이 웃으며 물었다.
  『 낭자, 더 시험이 필요한가, 자네의 스승이 되는데? 』
 초희는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두 오라버니나 손곡 보다 소년이 그녀를 비웃고 있는 것 같아 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는 소년을 흘깃 쳐다  보았다. 그러나 소년은 손곡 뒤에서 고개를 숙인 채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초희는 어서 곤경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잘못이 드러났을 때는 빨리 시인하고 사죄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초희가 일어나 절하며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 용서하십시오. 소녀가 고인(高人)께 무례를 범했습니다. 』

 

註)
*온정균 (溫庭筠 812∼870?)ㅡ중국 당나라시인. 허난설헌이 표절한 溫庭筠(온정균)의 원시(楊柳枝歌第四)는 다음과 같다. 關下宮外鄴城西 遠映征帆近拂堤 繫得王孫歸意切 不開春草綠萋萋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