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할머니 낙랑공주에 대한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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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만 작성일02-05-02 09:14 조회1,786회 댓글0건본문
경순대왕 춘향대제에 즈음하여 경순대왕비이시고 우리 선안동김문의 친할머니
이신 안정숙의공주이며 신란궁부인이기도 하신 낙랑공주에 대한 사서의 기록을
살펴 보았습니다.
1. 삼국사기 권 제11(신라본기 제11) 경순왕.
--태조는 (특히) 교외에 출영하여 라왕을 위로하고 (그에게) 宮東(궁동)의 甲第
(갑제 ; 으뜸가는 집) 一區(일구)를 내리고 장녀 낙랑공주로써 그의 아내를 삼
았다.
--12월에 그(라왕 김부)를 봉하여 正承(政丞 = 정승)공을 삼으니 그 위는 태자
위의 위에 있게 되고, 녹 일천석을 주고 (기타) 侍從(시종). 員將(원장)도 다 채
용하였으며, 신라를 고치어 경주라 하여 공(김부)의 식읍(봉읍)을 삼았다.
--처음 신라가 귀부할 때에 태조는 매우 기뻐하여 이미 厚禮(후례)로 대우하고
사람을 시켜 (라왕에게) 말하되 "지금 왕이 나라를 나에게 주니 그 주고 받음
이 대단히 크다. 바라건대 우리 종실과 혼인을 맺어 舅甥(구생 ; 장인과 사위)
의 의를 길이 하고 싶다"고 하였다.
2. 삼국유사 권 제1 낙랑국.
--또한 백제 온조왕의 말에는 "동쪽에 낙랑이 있고, 북쪽에 말갈이 있다고 했다"
--이는 아마도 옛날 한나라 때 낙랑군에 소속되었던 현일 것이다. 신라 사람들
이 역시 이곳을 낙랑이라고 했기 때문에 지금 고려에서도 또한 여기에 따라 낙
랑군부인이라고 불렀다. 또 태조가 그 딸을 김부에게 시집보내면서 역시 낙랑
공주라고 불렀다.
3. 삼국유사 권 제2 김부대왕.
--태조는 신라의 국서를 받자 太相(태상) 왕철을 보내서 맞게 했다. 왕은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우리 태조에게로 돌아가니 香車寶馬(향차보마)가 삼십여리
에 뻗치고 길은 사람으로 꽉 막히고, 구경꾼들이 담과 같이 늘어 섰다.
--태조는 교외에 나가서 영접하여 위로하고 대궐 동쪽의 한 구역(지금의 정승
원)을 주고, 장녀 낙랑공주를 그의 아내로 삼았다. 왕이 자기 나라를 작별하고
남의 나라에 와서 살았다 해서 이를 鸞鳥(난조)에 비유하여 공주의 칭호를 神
鸞公主(신란공주)라고 고쳤으며, 諡號(시호)를 孝穆(효목)이라 했다.
4. 고려사 권 제2 「세가」 제2 09가6.(을미 18년, 935년)
--11월 갑오일에 신라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왕도를 출발하였는데 인민들이 모
두 그를 따라 나섰다.
--이 때에 향나무로 꾸민 수레와 구슬로 장식한 말이 30리에 뻗쳐 길이 메었
고 구경꾼들이 담벽처럼 늘어 섰으며 연도 주. 현들에서의 供饋(공궤)가 매우
성대하였다. 왕이 사절을 파견하여 그 일행을 위로하였다.
--계묘일에 신라왕이 왕철 등과 함께 개경으로 들어왔다. 왕이 의장병을 갖추
고 교외로 나가서 그를 영접하였으며 태자에게 명하여 여러 대신들과 함께 그
들을 호위하여 柳花宮(유화궁)으로 들어와서 사관을 정하게 했다.
--계축일에 왕이 정전에 나와서 백관을 모아놓고 의례를 갖추어 왕의 맏 딸
낙랑공주를 신라왕의 아내로 삼았다.
5. 고려사 권 제88 「열전」 제1 03나6.(신명순성왕태후 유씨)
--충주 사람이니 증태사 내사령 유긍달의 딸이다. 태자 왕태. 정종. 광종. 문원
대왕. 정증통국사와 낙랑. 흥방 두 공주를 낳았다. 죽으니 시호를 신명순성태후
라고 하였다.
6. 고려사 권 제91 「열전」 제4 19나7.(공주)
--태조. 딸이 아홉명이었다.
--(안정숙의공주) 신명왕태후 유씨의 소생이니 신라왕 김부가 고려조에 투항
(북역본, 원문은 入朝)했으므로 공주를 그에게 시집보내고 낙랑공주라 불렀으
며, 또 신란궁부인이라고도 불렀다.
7. 고려사절요 제1권 태조신성대왕.(을미 18년)
--겨울 10월 임술에 신라왕 김부가 시랑 김봉휴를 보내어 들어와서 조회하기
를 청하므로 왕이 섭시중. 왕철과 시랑 한헌옹 등을 보내어 회보하였다.
--11월 갑오에 신라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왕도를 출발하니, 사대부와 서민들이
모두 그를 따랐다. 향거와 보마가 30여리에 뻗혔고, 길은 사람으로 꽉차서 막혔
으며, 구경꾼들이 쭉 둘러서 있었다. 길가에 있는 주. 현에서는 접대가 매우 성
대하였고, 왕이 사람을 보내어 문안하고 위로하였다.
--계묘에 신라왕이 왕철 등과 함께 개경으로 들어오니, 왕이 의장을 갖추어 교
외에 나가서 맞이하여 위로하고, 둥궁과 여러 재신에게 명하여 그를 호위하고
들어와서 柳花宮(유화궁)에 머무르게 하였다.
--계축에 왕이 정전에 나아가 문무백관을 모으고 례를 갖추어 맏 딸 낙랑공주
를 신라왕에게 시집보내었다.(2002. 5. 1)
▣ 김은회 - 귀중한 글 잘읽었습니다.
▣ 김주회 - 귀한 자료 잘 보았습니다.
▣ 김항용 - 감사합니다.
▣ 김태서 - 자료 감사드립니다.
▣ 김영환 - 고맙습니다.
▣ 김재익 - 자료 글 감사 합니다
▣ 김영윤 -
이신 안정숙의공주이며 신란궁부인이기도 하신 낙랑공주에 대한 사서의 기록을
살펴 보았습니다.
1. 삼국사기 권 제11(신라본기 제11) 경순왕.
--태조는 (특히) 교외에 출영하여 라왕을 위로하고 (그에게) 宮東(궁동)의 甲第
(갑제 ; 으뜸가는 집) 一區(일구)를 내리고 장녀 낙랑공주로써 그의 아내를 삼
았다.
--12월에 그(라왕 김부)를 봉하여 正承(政丞 = 정승)공을 삼으니 그 위는 태자
위의 위에 있게 되고, 녹 일천석을 주고 (기타) 侍從(시종). 員將(원장)도 다 채
용하였으며, 신라를 고치어 경주라 하여 공(김부)의 식읍(봉읍)을 삼았다.
--처음 신라가 귀부할 때에 태조는 매우 기뻐하여 이미 厚禮(후례)로 대우하고
사람을 시켜 (라왕에게) 말하되 "지금 왕이 나라를 나에게 주니 그 주고 받음
이 대단히 크다. 바라건대 우리 종실과 혼인을 맺어 舅甥(구생 ; 장인과 사위)
의 의를 길이 하고 싶다"고 하였다.
2. 삼국유사 권 제1 낙랑국.
--또한 백제 온조왕의 말에는 "동쪽에 낙랑이 있고, 북쪽에 말갈이 있다고 했다"
--이는 아마도 옛날 한나라 때 낙랑군에 소속되었던 현일 것이다. 신라 사람들
이 역시 이곳을 낙랑이라고 했기 때문에 지금 고려에서도 또한 여기에 따라 낙
랑군부인이라고 불렀다. 또 태조가 그 딸을 김부에게 시집보내면서 역시 낙랑
공주라고 불렀다.
3. 삼국유사 권 제2 김부대왕.
--태조는 신라의 국서를 받자 太相(태상) 왕철을 보내서 맞게 했다. 왕은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우리 태조에게로 돌아가니 香車寶馬(향차보마)가 삼십여리
에 뻗치고 길은 사람으로 꽉 막히고, 구경꾼들이 담과 같이 늘어 섰다.
--태조는 교외에 나가서 영접하여 위로하고 대궐 동쪽의 한 구역(지금의 정승
원)을 주고, 장녀 낙랑공주를 그의 아내로 삼았다. 왕이 자기 나라를 작별하고
남의 나라에 와서 살았다 해서 이를 鸞鳥(난조)에 비유하여 공주의 칭호를 神
鸞公主(신란공주)라고 고쳤으며, 諡號(시호)를 孝穆(효목)이라 했다.
4. 고려사 권 제2 「세가」 제2 09가6.(을미 18년, 935년)
--11월 갑오일에 신라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왕도를 출발하였는데 인민들이 모
두 그를 따라 나섰다.
--이 때에 향나무로 꾸민 수레와 구슬로 장식한 말이 30리에 뻗쳐 길이 메었
고 구경꾼들이 담벽처럼 늘어 섰으며 연도 주. 현들에서의 供饋(공궤)가 매우
성대하였다. 왕이 사절을 파견하여 그 일행을 위로하였다.
--계묘일에 신라왕이 왕철 등과 함께 개경으로 들어왔다. 왕이 의장병을 갖추
고 교외로 나가서 그를 영접하였으며 태자에게 명하여 여러 대신들과 함께 그
들을 호위하여 柳花宮(유화궁)으로 들어와서 사관을 정하게 했다.
--계축일에 왕이 정전에 나와서 백관을 모아놓고 의례를 갖추어 왕의 맏 딸
낙랑공주를 신라왕의 아내로 삼았다.
5. 고려사 권 제88 「열전」 제1 03나6.(신명순성왕태후 유씨)
--충주 사람이니 증태사 내사령 유긍달의 딸이다. 태자 왕태. 정종. 광종. 문원
대왕. 정증통국사와 낙랑. 흥방 두 공주를 낳았다. 죽으니 시호를 신명순성태후
라고 하였다.
6. 고려사 권 제91 「열전」 제4 19나7.(공주)
--태조. 딸이 아홉명이었다.
--(안정숙의공주) 신명왕태후 유씨의 소생이니 신라왕 김부가 고려조에 투항
(북역본, 원문은 入朝)했으므로 공주를 그에게 시집보내고 낙랑공주라 불렀으
며, 또 신란궁부인이라고도 불렀다.
7. 고려사절요 제1권 태조신성대왕.(을미 18년)
--겨울 10월 임술에 신라왕 김부가 시랑 김봉휴를 보내어 들어와서 조회하기
를 청하므로 왕이 섭시중. 왕철과 시랑 한헌옹 등을 보내어 회보하였다.
--11월 갑오에 신라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왕도를 출발하니, 사대부와 서민들이
모두 그를 따랐다. 향거와 보마가 30여리에 뻗혔고, 길은 사람으로 꽉차서 막혔
으며, 구경꾼들이 쭉 둘러서 있었다. 길가에 있는 주. 현에서는 접대가 매우 성
대하였고, 왕이 사람을 보내어 문안하고 위로하였다.
--계묘에 신라왕이 왕철 등과 함께 개경으로 들어오니, 왕이 의장을 갖추어 교
외에 나가서 맞이하여 위로하고, 둥궁과 여러 재신에게 명하여 그를 호위하고
들어와서 柳花宮(유화궁)에 머무르게 하였다.
--계축에 왕이 정전에 나아가 문무백관을 모으고 례를 갖추어 맏 딸 낙랑공주
를 신라왕에게 시집보내었다.(2002. 5. 1)
▣ 김은회 - 귀중한 글 잘읽었습니다.
▣ 김주회 - 귀한 자료 잘 보았습니다.
▣ 김항용 - 감사합니다.
▣ 김태서 - 자료 감사드립니다.
▣ 김영환 - 고맙습니다.
▣ 김재익 - 자료 글 감사 합니다
▣ 김영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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