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수정부근에서 많은[100여점] 의류 출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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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작성일02-05-02 20:00 조회1,638회 댓글0건본문
서운관정공파 김첨선조님의 의복 수점을 보고 기쁜 마음을 참을 수 없어
아직 공개되지 않은 소식은 미리 현종 여러분에게만 알려 드립니다.
1991년 봄 경기도 포천군 창수면에서 문온공할아버님의 후손이신
철원부사를 역임하시고 상의원정으로 치사하신 김확(1572-1653) 할아버님의
이장을 위한 파묘가 있었습니다.
김확 할아버님은 지봉 이수광, 교산 허균과 처남 매부사이이십니다.
너무나도 두터운 회닫이때문에 굴삭기로서 회곽을 깨고나니
그속에 향나무로 만든 두께 10쎈치 정도의 관이 보였습니다.
아직도 향내음이 진동하는 가운데 관을 어렵게 열었더니 그 관 속에는
또 관이 있었습니다.
소위 말하는 겉관(곽)과 속관(관)이었습니다.
이 관곽 모두 약 2쎈치 정도의 숯가루를 입혔고 한지로 쌓여져 있었습니다.
그속에 염습을 하지 않고 평상복 그대로 입고 계신 할아버님, 할머님이
돌아가실때의 그 모습 99%로 계셨고, 그 주위를 많은 의류로 꼭꼭 채워저 있었습니다.
그 때의 사진을 찍어 놓은 것이 여러장 있어 지금 다시 살펴 보아도 정말 살아 계신 듯 합니다.
미이라가 되어 건조된 상태로 발견된 예는 많이 들었지만 피부도 조금도 상하지 않으시고
치아도 그대로이며, 심지어 가장 먼저 상한다는 안구도 그대로 였습니다.
믿기지 않는 일이라 사진으로 찍어 보관하고 있습니다.
새로 마련한 수의로서 이장을 모시고 구묘의 모습 그대로, 석물도 그대로 옮겨 모셨습니다.
여기에서 발굴된 지석 또한 백자로 되어 있는 9장(복제본 2개 포함 도합 11장)은 현재
종중에서 보관하고 있으며, 이 사진은 제가 얼마전에 {김확 지석} 이라는 제목으로
본 홈에 게재 하였었습니다. 아울러 정신문화연구원에도 이 지석 파일을 기증하여
디지탈한국 홈 페이지에 올려 있습니다. 보시고 싶으신 분은 본인에게 연락 주시면
보내드릴 수 있으며, 디지탈한국 홈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출토된 의류는 단국대 고전복식박물관 팀과 본인이 직접 한점 한 점 챙겨 보기도 하였습니다.
이 의류는 현재 경기도 박물관에서 정밀 조사에 들어 갔으며 곧 조사 보고서가 나오리라
기대 됩니다. 특히 할아버님이 돌아가실 당시의 직함이 궁중의 의복을 맡은 기관(상의원)의
최고 책임자이시었기 때문에 당시의 궁중의복의 원단도 많을 것으로 단대석주선박물관 팀의
의 견 이었습니다. 그 질이나(전혀 손상되지 않았으니까요-할아버님 모습이 그 대로인대 하물며
의복이야 그 당시 그대로이지요) 양(100여점이 넘을 것임), 종류에서 지금까지 발견된
출토의류와는 비교가 안 될 것으로 사료 됩니다.
자세한 보고서가 나오는 대로 여러분에게 먼저 알려 드리겠습니다.
김확선조님은 1572(선조 5)에 태어나신 조선 중기의 문신이십니다.
안동김씨 문온공의9세손이시며 자는 정경(正卿), 호는 금사(金沙).
아버지는 의금부도사 대섭(大涉)이시며, 어버니는 이조판서 청파군 심전의 따님이십니다.
두명의 누님이 태어난 후 막내로 태어나시어 어려서 집안과 교류가 깊었던
초당 허엽의 아들 하곡 허봉에게서 공부를 하시었습니다.
후에 작은누님이 허봉의 동생 허균에게시집을 가게 되었습니다.
큰 누님은 지봉유설의 저자 지봉 이수광에게 출가하셨습니다.
허봉에게서 열심히 공부하여 1589년 사마시에 합격, 진사가 되시었으나,
아버님의 급서의 충격으로 과거를 포기하였다가 늦게 1618년(광해군 10)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시었습니다.
그후 철원부사(鐵原府使)를 지내시고 상의원정으로 치사하시었습니다.
일찍이 하곡(荷谷) 허봉(許봉)에게 수학하여, 문장이 뛰어나 사림들 사이에
명성이 높았다고 어려 곳에 기록 되어 있습니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병조정랑(兵郎)으로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호위하여
한강을 건넜으며, 1627년 정묘호란 때는 동궁을 배위(陪衛)하여 남행(南行)하는 등 국가의
비상시에 왕실의 안위를 담당한 바 있다고 역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1653(효종 4). 에 돌아가셨습니다.
묘지명은 생질(큰누님+지봉이수광)인 판서 이민구가 지었습니다.
이민구의 형은 영의정을 지낸 이성구입니다.
▣ 김항용 - 잘 읽었습니다. 5.5. 모임때 사진을 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 김윤만 - 처음 듣는 놀라운 이야기에 감격스럽습니다. 꼭 보고싶습니다.
▣ 김태서 - 잘 보았습니다.감사합니다.
▣ 김재익 - 우리 문화의 寶庫 문을 열고 보았으니 잘 보전 하길...
▣ 김주회 - 놀랍습니다. 대단합니다. 완벽하게 보전하시면 좋겠습니다.
▣ 김발용 - 갑자기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 김영윤 -
▣ 김영윤 -
▣ 김은회 -
아직 공개되지 않은 소식은 미리 현종 여러분에게만 알려 드립니다.
1991년 봄 경기도 포천군 창수면에서 문온공할아버님의 후손이신
철원부사를 역임하시고 상의원정으로 치사하신 김확(1572-1653) 할아버님의
이장을 위한 파묘가 있었습니다.
김확 할아버님은 지봉 이수광, 교산 허균과 처남 매부사이이십니다.
너무나도 두터운 회닫이때문에 굴삭기로서 회곽을 깨고나니
그속에 향나무로 만든 두께 10쎈치 정도의 관이 보였습니다.
아직도 향내음이 진동하는 가운데 관을 어렵게 열었더니 그 관 속에는
또 관이 있었습니다.
소위 말하는 겉관(곽)과 속관(관)이었습니다.
이 관곽 모두 약 2쎈치 정도의 숯가루를 입혔고 한지로 쌓여져 있었습니다.
그속에 염습을 하지 않고 평상복 그대로 입고 계신 할아버님, 할머님이
돌아가실때의 그 모습 99%로 계셨고, 그 주위를 많은 의류로 꼭꼭 채워저 있었습니다.
그 때의 사진을 찍어 놓은 것이 여러장 있어 지금 다시 살펴 보아도 정말 살아 계신 듯 합니다.
미이라가 되어 건조된 상태로 발견된 예는 많이 들었지만 피부도 조금도 상하지 않으시고
치아도 그대로이며, 심지어 가장 먼저 상한다는 안구도 그대로 였습니다.
믿기지 않는 일이라 사진으로 찍어 보관하고 있습니다.
새로 마련한 수의로서 이장을 모시고 구묘의 모습 그대로, 석물도 그대로 옮겨 모셨습니다.
여기에서 발굴된 지석 또한 백자로 되어 있는 9장(복제본 2개 포함 도합 11장)은 현재
종중에서 보관하고 있으며, 이 사진은 제가 얼마전에 {김확 지석} 이라는 제목으로
본 홈에 게재 하였었습니다. 아울러 정신문화연구원에도 이 지석 파일을 기증하여
디지탈한국 홈 페이지에 올려 있습니다. 보시고 싶으신 분은 본인에게 연락 주시면
보내드릴 수 있으며, 디지탈한국 홈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출토된 의류는 단국대 고전복식박물관 팀과 본인이 직접 한점 한 점 챙겨 보기도 하였습니다.
이 의류는 현재 경기도 박물관에서 정밀 조사에 들어 갔으며 곧 조사 보고서가 나오리라
기대 됩니다. 특히 할아버님이 돌아가실 당시의 직함이 궁중의 의복을 맡은 기관(상의원)의
최고 책임자이시었기 때문에 당시의 궁중의복의 원단도 많을 것으로 단대석주선박물관 팀의
의 견 이었습니다. 그 질이나(전혀 손상되지 않았으니까요-할아버님 모습이 그 대로인대 하물며
의복이야 그 당시 그대로이지요) 양(100여점이 넘을 것임), 종류에서 지금까지 발견된
출토의류와는 비교가 안 될 것으로 사료 됩니다.
자세한 보고서가 나오는 대로 여러분에게 먼저 알려 드리겠습니다.
김확선조님은 1572(선조 5)에 태어나신 조선 중기의 문신이십니다.
안동김씨 문온공의9세손이시며 자는 정경(正卿), 호는 금사(金沙).
아버지는 의금부도사 대섭(大涉)이시며, 어버니는 이조판서 청파군 심전의 따님이십니다.
두명의 누님이 태어난 후 막내로 태어나시어 어려서 집안과 교류가 깊었던
초당 허엽의 아들 하곡 허봉에게서 공부를 하시었습니다.
후에 작은누님이 허봉의 동생 허균에게시집을 가게 되었습니다.
큰 누님은 지봉유설의 저자 지봉 이수광에게 출가하셨습니다.
허봉에게서 열심히 공부하여 1589년 사마시에 합격, 진사가 되시었으나,
아버님의 급서의 충격으로 과거를 포기하였다가 늦게 1618년(광해군 10)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시었습니다.
그후 철원부사(鐵原府使)를 지내시고 상의원정으로 치사하시었습니다.
일찍이 하곡(荷谷) 허봉(許봉)에게 수학하여, 문장이 뛰어나 사림들 사이에
명성이 높았다고 어려 곳에 기록 되어 있습니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병조정랑(兵郎)으로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호위하여
한강을 건넜으며, 1627년 정묘호란 때는 동궁을 배위(陪衛)하여 남행(南行)하는 등 국가의
비상시에 왕실의 안위를 담당한 바 있다고 역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1653(효종 4). 에 돌아가셨습니다.
묘지명은 생질(큰누님+지봉이수광)인 판서 이민구가 지었습니다.
이민구의 형은 영의정을 지낸 이성구입니다.
▣ 김항용 - 잘 읽었습니다. 5.5. 모임때 사진을 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 김윤만 - 처음 듣는 놀라운 이야기에 감격스럽습니다. 꼭 보고싶습니다.
▣ 김태서 - 잘 보았습니다.감사합니다.
▣ 김재익 - 우리 문화의 寶庫 문을 열고 보았으니 잘 보전 하길...
▣ 김주회 - 놀랍습니다. 대단합니다. 완벽하게 보전하시면 좋겠습니다.
▣ 김발용 - 갑자기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 김영윤 -
▣ 김영윤 -
▣ 김은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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