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공 어록 07 (1271년, 60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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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6-07-18 23:02 조회1,539회 댓글0건본문
1271년 (60세)
삼별초 토벌시 (전주 나주 탈환, 진도 토벌)
신사전은 나주에 이르러 반적들이 육지로 나왔다는 소문을 듣고 황급히 달아나 서울로 돌아가 버렸다. 전주 부사(副使) 이빈(李彬)도 역시 전주성을 포기하고 도망해 버렸다. 그리하여 이 두 사람은 모두 도망간 죄로 면직당하였다.
김방경이 신사전 대신에 추토사로 임명되었고 몽고 원수 아해(阿海)와 더불어 군사 천여 명을 거느리고 반적을 토벌하게 되었다. 반적들은 나주성을 포위하고 또 군사 일부를 보내 전주를 공격케 하였다. 나주 사람들이 전주 사람들과 더불어 항복할 것을 상의하였는데 전주 사람들은 결정적 태도를 취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김방경이 전주로 가는 도중에 이 소식을 듣고 혼자 말을 타고 밤낮을 헤아리지 않고 남으로 달려 내려가면서 먼저 전주에 공문을 보내기를 “아무 날에는 군사 만 명을 거느리고 입성할 것이니 빨리 군량을 준비하여 기다려야 한다”라고 하였다.
전주 사람들이 이 편지를 나주 사람에게 보이니 반적들이 이 말을 듣고 마침내 포위망을 풀고 가버렸다. 이로부터는 다시 제멋대로 노략질을 못하게 되었다.
김방경이 토적사(討賊使) 상장군 변윤(邊胤), 장군 조자일(趙子一), 공유(孔愉) 등이 반적들이 금성(錦城-나주)을 공격하는 것을 보고도 구원하지 않았던 사실을 탄핵하는 글을 왕에게 올렸고 섬에다 귀양 보내자고 요청했으나 왕은 그들을 용서하고 다만 철직만 시키었다. 공유는 환관들과 교제하고 결탁하였으므로 죄를 면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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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즉시로 달로화적에게 청하여 다시 김방경으로 하여금 반적들을 토벌하게 하고 그에게 상장군의 벼슬을 주면서 위로하여 보내었다.
김방경이 진도에 이르니 반적들이 모두 배를 타고 기치들을 수없이 펼쳐 꽂았으며, 징소리와 북소리가 바다를 끓어 번지듯 요란하였다. 또 성 위에서는 북을 울리고 아우성을 치며 큰 소리를 내어 기세를 돋우고 있었다.
아해는 겁을 내어 배에서 내려서 나주에로 퇴각하여 주둔하려고 하였다. 김방경이 말하기를 “원수가 만일 후퇴한다면 이것은 우리의 약점을 보여 주는 셈이다. 적들이 승승장구하여 들여 닥치면 누구가 그 창 끝을 당해 낼 것인가? 또 황제가 이 사실을 듣고 책임을 묻는 날이면 무엇이라 대답하겠는가?”라고 하니 아해가 감히 퇴각할 수가 없게 되었다.
김방경이 홀로 군사를 거느리고 공격해 들어가니, 반적들은 전함으로 역습을 해왔는데 원군(몽고군)은 모두 퇴각하였다. 김방경이 말하기를“결승은 오늘 해야 한다”라고 하면서 적진에 돌입하니 적들이 그가 탄 배를 포위하여 사방에서 압박하면서 자기 진영 측으로 몰아 갔다.
김방경과 군사들이 죽을 힘을 다하여 싸웠으나 화살도 돌도 다 떨어졌을 뿐만 아니라 또 모두가 화살에 맞아 일어나지 못하였다. 김방경이 탄 배가 진도의 기슭에 닿게 되니 적의 한 군졸이 칼날을 번득이면서 배 안에 뛰어들었다. 김천록(金天祿)이 짧은 창으로 그를 찔러 넘겼다.
김방경이 일어나면서 말하기를 “차라리 고기 뱃속에 장사를 지낼지언정 어찌 반적들의 손에 죽겠느냐?”라고 하면서 바다에 몸을 던지려고 하였다. 그러나 시위병이었던 허송연(許松延), 허만지(許萬之) 등이 그것을 말리었다.
이때 부상당한 군사들이 김방경이 위급한 것을 보고 소리를 내지르면서 일어나 급히 싸웠으며 김방경은 호상(胡床)에 앉아 군사들을 지휘하였는데 안색이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이때 장군 양동무(楊東茂)가 몽충(蒙衝-전함)을 타고 돌격해서 싸움이 조금 풀리게 되어 포위를 뚫고 나오게 되었다.
김방경이 장군 안세정(安世貞), 공유(孔愉) 등이 구원하러 오지 않았던 죄를 들어서 그들을 베려고 하였으나 아해가 말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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