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신교서 번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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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6-07-20 09:32 조회1,369회 댓글0건본문
교서
가선대부 경상우도병마절도사 겸 진주목사 효충장의협력선무공신 자헌대부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상락군 김시민에게 내리는 임금의 글
왕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그대는 외로운 성을 지키고 많은 적을 막아내어 이미 나라에 목숨을 바치는 충성을 다 바쳤으니 그 공적을 가상히 여기고 그대의 노고에 보답하려면 의당 공훈을 표창하는 절차를 밟아야 할 것이므로 이미 거둔 여러 사람의 공의(公議)를 따라 특별한 은총을 표시하고자 한다.
아! 그대의 타고난 기품은 웅대하며 호탕하여 일찍이 활 쏘고 말 타는 일을 전공하여 무과에 합격하였고, 자신에게는 충의를 실현하겠다고 다짐하였으며 국가의 어려운 일에 힘을 다하였으니 그 마음가짐이 변함이 없었다. 지난번 국가의 운명이 막힘으로 인하여 섬 오랑캐의 날뜀을 당하였다. 우리나라가 백여 년 동안 평화의 시대를 겪은 나머지 온 백성이 굳센 뜻을 가지지 못하여 팔도가 바람 부는 대로 무너질 때에 한 명의 남아다운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다. 이 때 그대는 진양(진주)의 판관으로서 큰 기둥처럼 홀로 우뚝 섰다. 스스로 관찰사에게 청하여 용감한 군사를 거느리고 여러 차례 인근 군현의 적을 격파하였고 벌떼처럼 웅크리고 있는 도적의 군대를 쫓았으니 그 명성이 이로 인해 스스로 떨치고 이웃 고을이 그대에게 의지하여 편안하게 되었다.
바야흐로 관군이 싸우기 위해 다른 지방으로 나가 있을 때에 오랑캐의 기병이 그 빈 틈을 타서 진주성을 공격해온다는 보고를 듣고 급히 본 성으로 달려 들어갔으니 죽음 보기를 자기 집에 돌아가는 것처럼 여긴 것이다. 돌을 져다가 성의 귀퉁이(女墻)를 중수함에 자신이 병졸보다 먼저 앞장섰고 맛있는 음식을 자신이 먹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모지라는 작은 것을 나누어 먹으니 백성들의 기뻐하는 마음을 얻을 수 있었고, 피눈물을 마시며 성위에 올라 지휘하면서 죽음으로써 함께 지켜 내자고 맹서하여 약속하였다. 밤낮없이 싸움을 독려하고 지혜로운 계책을 냄이 더욱 기발하였다. 적은 군사를 가지고 밖으로부터의 도움이 없이 싸웠으니 적은 군대를 가지고는 진실로 많은 수의 적을 상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나뿐 무리들이 마침내 멀리 도망을 치려하였다. 그러나 그대가 오히려 약한 군사를 가지고 강한 적을 제어할 수 있었음은 오직 처음부터 끝까지 충성을 바쳤기 때문이다.
그 공로가 이와 같으므로 이전에 상을 내림이 한 번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목사로 승진시켜 그대의 아름다운 명성을 포상하였고, 이어서 군사를 총괄하도록 발탁하여 큰 재목의 뜻을 펴기를 기다렸다. 뜻밖에 한 발의 유탄을 맞아 마침내 나의 만리장성이 무너지리라고 어찌 생각하였겠는가? 살아서는 어진 장수가 되었고 죽어서는 충신이 되었으니 그대는 어찌 유감이 있으리오. 그대와 더불어 이 어려움을 함께 이겨내었으나 편안하고 즐거움은 함께 할 수 없으니 이처럼 나의 가슴속에 아픔을 느끼고 있다.
그대에게 정승의 지위(병조판서)를 증직하여 자손을 등용하더라도 어찌 족히 의사(義士)를 표창함을 다 하겠는가? 오랑캐가 다시 와서 성이 함락되었으니 전일의 그대 공훈이 더욱 값지구나. 그대가 진주 사람들에게 사랑을 끼침이 이미 깊어서 그대의 공적을 기리는 상소가 간절하고 여론을 물어보아도 마찬가지일 뿐만 아니라 내 뜻도 또한 그러하다.
이에 그대를 선무공신 2등에 봉하고 두 계단의 품계를 올려주며, 그 부모와 처자에게도 한 등급을 높여준다. 아들이 없으면 생질이나 조카, 사위를 한 등급을 올려 주겠으며, 적장자는 대대로 이를 세습하여 그 녹을 잃지 않게 할 것이다. (죄를 지은 경우에는) 영구토록 사면령을 적용할 것이다.
이에 노비 9구, 토지80결, 은7냥, 겉옷과 속옷의 옷감 1벌, 말 1필을 내려주니 이르거든 받으라.
아아! 앞으로 백 세대에 달할 때 까지 그 아름다운 명성을 지닐 것이며 후손에게 내려 전해질 것이다. 죽은 사람을 살려 낼 수 없으므로 조용히 내 마음속에서 스스로 슬퍼한다.
그러므로 이에 나의 뜻을 보이고자 하니 생각건대 마땅히 이 마음을 잘 알아주겠지!
(공신 명단)
1등 이순신, 권율, 원균
2등 신점, 권응수, 김시민, 이정암 ,이억기,
3등 정기원, 권협, 유사원, 고언백, 이광악, 조경, 권준, 이순신(李純信). 기효근, 이운룡
만력 32년(1604) 10월 일 (施命之寶)
(정구복, 한국학중앙연구원 역사연구실 교수 번역)
<진주대첩과 김시민공신교서>
공신교서란 국가에 공을 세운 사람을 표창하고 그 자신과 후손들에게 상전과 특권을 부여하면서 내리는 임금의 글이다. 임진왜란 때에는 왕을 호종한 호종공신과 군공을 표창한 선무공신이 책봉되었다. 공신교서 앞 부분에는 전공을 비롯해 그 업적을 기록하고, 뒷 부분에는 그 업적에 해당하는 재산과 특전의 내역을 기술하였다. 그러나 김시민 장군의 경우는 상전을 내려줄 당시에 이미 세상을 떠났으므로 초상화를 그려 모시게 하거나, 그의 시중을 드는 반당과 구사라는 사환인을 내려주지 않았다.
이 김시민 교서는 현재 일본의 고서점에 있다. 김시민 교서는 임진왜란의 사료로서도 중요하며 특히 왕의 애틋한 마음이 잘 표현되어 있어 문학적 작품으로도 의미를 가진다. 이 공신교서는 녹색의 생명주에 해서체로 유려하게 쓰여져 있어 문화재적 가치도 높다.
진주대첩은 1592년 당시 왕은 의주로 피난을 하였고, 일본군이 함경도까지 진출한 백척간두의 위기 상황에서 육지에서 거둔 첫 전투였으며 그 결과는 대승리였다. 이런 대승을 거둔 이유로는 경상우도관찰사였던 학봉 김성일의 적극적 조처로 인근의 군대가 협력하였기 때문이다. 1593년 6월의 2차 진주성 전투는 1차 진주성전투에서 패배한 것을 보복하기 위한 전투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직접 지시한 전쟁이었다. 이로 인해 6만여 명의 진주시민 모두 학살되었다.
진주대첩은 일본군이 한국의 곡창인 전라도를 점령하기 위한 기도를 막아낸 전투라는 점에서 이순신의 수군의 승리와 조헌의 금산전투, 웅치전투와 함께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전라도가 점령되지 않음으로서 임진왜란기의 많은 곡식을 유용하게 사용하였다. 진주대첩에 대한 상세한 기록은 김성일의 진주성 <수성절차>와 <승첩치계>에 상세하게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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