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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 어록 08 (1273년, 6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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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6-07-23 11:18 조회1,57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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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3년 (62세)

탐라에서 삼별초 토벌시


   반적들이 탐라에 들어가서 내성과 외성을 쌓고 그 험준함을 믿고 더욱 더 날뛰게 되었으며 때때로 나와서는 노략질을 하였으며 안남(安南)의 수령 공유(孔愉)를 붙잡아 가지고 갔다. 이리하여 바닷가 지방은 소란하게 되었으며 반적들의 침입 범위는 경기(京畿)에까지 확대되었고 도로가 제대로 통하지 못하게 되었다.

   왕은 이것을 심히 우려하여 14년에 김방경을 행영 중군 병마 원수(行瑩中軍兵馬元帥)로 삼아서 보내었다. 김방경이 다시 군사들을 훈련하여 수군과 함께 만여 명을 거느리고 흔도, 홍다구와 더불어 반남현(潘南縣)에 주둔하고 장차 탐라로 떠나려 하였는데 각 도(道)들에서 온 전선들은 모두 바람에 까불리므로 전라도에서 온 1백60척 만을 가지고 떠났다.

   함대가 추자도(楸子島)에 들러 바람이 순조롭게 불어 줄것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밤중에 돌연히 거센 바람이 불어서 어디로 가는지 방향을 모르게 되었다. 새벽이 되어 보니 벌써 탐라에 가까이 와 있었다. 그런데 바람과 파도가 세차서 전진하려고 해도 할 수 없었고 후퇴하려고 해도 할 수 없었다.

   김방경이 하늘을 우러러 크게 탄식하면서 이르기를 “나라의 안녕함과 위태로움이 이번 토벌 사업 하나에 달려 있는데 오늘 일의 성패는 나에게 있지 않은가?”라고 하였다. 이윽고 풍랑이 멎었으므로 중군(中軍)은 함덕포(咸德浦)로부터 진공해 들어갔다.

   반적들은 바윗돌 사이에 복병을 배치하고 있다가 뛰쳐 나오며 고함을 치면서 중군의 진격을 막았다. 김방경이 소리를 높여 꾸짖으면서 여러 배들이 동시에 진격하도록 독촉하니 대정(隊正) 고세화(高世和)가 먼저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적진에 돌입해 들어갔고 여러 군사들이 그 기세를 따라 서로 늦을세라 돌진하였으며 장군 나유(羅裕)는 정예한 군사들을 이끌고 곧 뒤따라 이르러서 적을 살상. 포로한 것이 심히 많았다.

   한편 좌군(左軍)의 전함 30척은 비양도(飛揚島)로부터 반적들의 보루를 직충해서 쳐들어가니 반적들이 바람에 나부끼는 풀잎처럼 몰려 자성(子城)에 밀리어 들어갔다. 관군이 외성을 넘어서 들어가 화시(火矢) 4발(發)을 놓으니 그 연기와 불꽃이 하늘에 가득 찼으며 반적의 무리들이 크게 혼란에 빠졌다.

   그러던 중 반적의 편에서 넘어와 투항한 자가 있어 말하기를 “반적들이 이미 형세가 궁박해져서 달아날 것을 꾀하고 있으니 빨리 쳐서 점령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얼마 후에 반적들의 괴수 김통정(金通精)은 그 일당인 70여명을 인솔하여 산중으로 도망해 들어가고 적장(賊將) 이순공(李順恭), 조시적(曹時適) 등은 옷을 벗고 자기가 저지른 죄를 달게 받겠다는 뜻을 표시하면서 항복해 왔다. 김방경이 여러 장군들을 지휘하여 자성에 들어가니 선비들과 여인들이 소리를 내어 통곡하였다.

   김방경이 말하기를 “다만 큰 괴수들만 죽이려 할 뿐이니 너희들은 겁내지 말라!”고 하고 그 우두머리인 김윤서(金允敍) 등 6명을 붙잡아다가 네거리에서 참형에 처하였고 그들과 친당(親黨) 35명을 사로잡아 항복한 반군 1천3백여 명과 함께 배에다 나누어 싣고 귀환하였다. 그리고 탐라의 주민들은 모두 평안히 이전처럼 안심하고 살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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