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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존재기(著存齋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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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영 작성일06-07-24 14:45 조회1,463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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著存齋記
愛慕를 드리면 계신듯 하고 精誠을 드리면 나타나니 나타남(著)과 계신듯함(存)을 마음에서 잊지않는 것이 孝이다. 대저 春秋의 義로움을 지켜 千秋에 日星보다 빛나고 대대로 詩禮를 강습하여 一堂에서 追慕의 정성을 부친다. 先祖가 심은 뽕나무와 가래나무도 공경 하거늘 하물며 陟降하는 魂靈이 이에 있음에랴! 霜露를 밟으면 悽愴한 마음이 일어나고 齋戒를 드리면 그 모습이 선연하니 이에 齋舍를 건립하여 바야흐로 우뚝하고 찬연하다.
가만히 생각건대, 金翼元公諱 士衡은 朝鮮 太祖朝의 左議政으로 宗廟에 配享되었다. 成宗 燕山朝에 通禮公 諱 泂과 그 손자 退藏公 諱 漢東은 山嶽이 뛰어난 資質을 내리고 하늘이 영명한 才能을 부여하여 강개한 忠義를 떨쳤다. 家風을 계승하여 부모에게 孝道하고 형제간에 友愛로왔으며 온화하기가 金玉같은 君子였다. 世道가 점점 무너져 관직생활을 부끄럽게 여기더니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 은둔함은 西山에서 餓死한 夷齊같은 뜻이고 封章을 올려 대궐에 호소함은 차라리 東海 멀리 떠나려는 뜻이었다. 武信公 諱 益重은  英祖 戊申年에 倡義하여 功勞를 세웠다. 冠履를 拜受하고 대궐에서 물러나니 늠름한 風采는 亂賊에게 대항하여 하늘을 함께 이고 살수없다는 각오를 보였다. 열렬한 貞忠은 亂賊을 크게 꾸짖어 唐나라 常山太守 安果卿의 혀와 같았고 나라 위해 목숨을 돌보지 아니함은 北海 李邕의 志節과 같았다. 蒼邱에서 근심을 풀고 하룻밤에 秘策을 올리니 名聲은 宇宙에 드리워 萬古토록 밝게 빛난다. 이에 朝廷에서 벼슬을 追贈하고 鄕里에서 祭祀를 드린다. 이후로 數世가 지나도록 後孫들이 번성하고 해마다 祭祀를 드렸으나 오랫동안 齋戒할 장소가 없었다. 世代가 비록 오래 되었으나 어찌 감히 追遠의 정성을 잊겠는가. 참으로 人事는 겨를이 없을 경우가 있으니 齋舍 건립을 오랫동안 經營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遺香이 다하지 않았으니 또한 行人들이 손으로 가리키며 탄식하였고 孝思를 길이 전했으니 어찌 단지 子孫들이 歲時로 처량하게만 여기겠는가. 宗族의 의논을 모아 數間의 淸齋를 건립 하기로 합의하고 비로소 자리를 잡으니 智異山 기슭에 가까운 곳이었다. 이에 庚午年 봄에 일을 시작하여 목수들이 솜씨를 발휘하고 후손들이 役事를 도와 數月만에 공사를 마쳤으니 무릇 五楹 四間에 堂室과 부엌이 모두 갖추어졌다. 齋舍를 이미 落成하여 著存이라 편액하고는 모두 말하기를 <이 役事에 記文이 없을 수가 없다>고 하면서 그 族人榮轅 榮國 榮環 榮俊을 보내 나에게 記文을 청했다. 내 글을 못한다고 固辭하였으나 이루지 못했다.
아! 故國의 榮華는 이미 流水나 浮雲처럼 덧없이 흘러가고 그 後裔들 또한 근래 자못 衰頹했으니 安東 金氏들이 옛날을 생각하며 지금을 슬퍼하는 懷抱가 과연 어떠 하겠는가!
그러나 盛衰와 興廢는 常理이니 깊이 한탄할 것이 못된다. 오직 報本과 追遠의 정성은 사람이 영원히 버릴수없는 바이다. 이에 祭日에 齋室에 들어가 엄숙히 음성을 듣듯 아련히 모습을 뵙듯이 하고 祭物을 이미 陳設하여 빈藻가 모두 청결하면 先靈이 陟降하면서 어찌 <나에게도 後孫이 있다.>고 말하지 않겠는가! 子孫된 이들이 여기서 노래하고 여기서 잔치하며 여기서 회합하여 敦睦의 풍습을 講論하고 先祖의 가르침을 잃지 않는다면 앞에서 얘기한 著存의 의미가 또한 지극히 아름다울 것이다. 金氏諸公은 힘쓸 지어다.
歲庚午 季春 首陽 鄭 응 敎
저존재: 경남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 <산청군발행: 산청樓亭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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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영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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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저존재기는 2003년 12월에 계시하였던 글 입니다.
소설 '열전김방경'의 작가 김봉석 선생님으로부터 요청이 있어 올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