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언신(鄭彦信) 과 우리가문(김확, 김제갑. 김수. 김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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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6-07-24 16:30 조회1,722회 댓글1건본문
우의정을 지낸 정언신(鄭彦信) -1527(중종 22)∼1591(선조 24).공은 철원부사와 상의원정을 지내신 김확선조님의 장인이십니다.
아울러 병조판서로 있을 때 김제갑선조께서 창성부사로 임명될때 반대하기도 했으며
서운관정공후손이신 김수선조님이 이조좌랑으로 당시 도순찰사인 정언신의 종사관을 지내기도 했으며
제학공후손이신 충무공 김시민장군은 니탕게의 난때 당시 도순찰사인 정언신의 막하 장수로 공을 세우셨으며,
정언신이 우의정으로 있을때 ' "김시민은 적을 방어할 줄 알며 智謀方略(지모방략)이 명장 중에서도 으뜸이라" 고 추천하였습니다.
이런 깊은 인연이 있는 정언신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정언신과 우리가문의 기록
★정언신(鄭彦信)
1527(중종 22)∼1591(선조 2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입부(立夫), 호는 나암(懶庵). 예조좌랑 진(振)의 아들이다.
1566년(명종 21)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이 되고, 1571년(선조 4) 호조좌랑으로 춘추관기사관이 되어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고, 그뒤 전라도도사·장령·동부승지 등을 거쳤다.
그뒤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함경도병마절도사로 나가 변민(邊民)을 잘 다스리고 녹둔도(鹿屯島)에 둔전(屯田)을 설치하여 군량미를 풍족하게 비축하였다. 이어 대사헌으로 옮겼다가 부제학이 되었다.
1582년(선조 16) 니탕개(尼湯介)가 쳐들어오자 우참찬으로 함경도도순찰사에 임명되어 막하로 ★이순신(李舜臣)·★신립(申砬)·★김시민(金時敏)·★이억기(李億祺) 등 뛰어난 명장들을 거느리고 적을 격퇴하였다.
이어 함경도관찰사로 북쪽 변방을 방비하고 병조판서에 승진되었다.
1589년 우의정이 되어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후 그 잔당에 대한 옥사를 다스리고는 위관(委官)에 임명되었으나, 서인 정철(鄭澈)의 사주를 받은 대간으로부터 정여립의 구촌친(九寸親)이므로 공정한 처리를 할 수 없다는 탄핵을 받아, 위관을 사퇴하고 이어서 우의정도 사퇴하였으며, 정철이 위관을 대신하였다.
그뒤 역가문서(逆家文書)가운데에 그가 들어 있다는 것을 구실로 정철 등으로부터 계속 정여립의 일파로 모함을 받아 남해에 유배되었다가 투옥, 사사(賜死)의 하교가 있었으나 감형되어 갑산에 유배, 그곳에서 죽었다.
1599년에 복관되었다. 문경의 소양사(瀟陽祠)에 제향되었다.
김확(金?)의 배위는 정언신의 따님
김확
1572(선조 5)∼1653(효종 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정경(正卿), 호는 금사(金沙). 아버지는 도사 대섭(大涉)이다.
1589년 사마시에 합격, 진사가 되고, 1618년(광해군 10)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철원부사(鐵原府使)에 이르렀다. 일찍이 하곡(荷谷) 허봉(許봉)에게 수학하였으며, 문장이 뛰어나 사림들 사이에 명성이 높았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병랑(兵郎)으로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호위하여 한강을 건넜으며, 1627년 정묘호란 때는 동궁을 배위(陪衛)하여 남행(南行)하는 등 국가의 비상시에 왕실의 안위를 담당한 바 있다.
김확;부인 동래 정씨(東萊鄭氏)는 우의정(右議政) 정언신(鄭彦信)의 딸인데, 씩씩하고 아름다우며 차분한 데다 말이 적고 행실이 간결하여 대문을 나서지 않았고 창문을 통해 엿보지 않는 등 시집가기 전부터 이미 그러하였다. 친척이 초청하면 반드시 일을 들어 못 가는 이유를 해명하였고 나이가 많아서도 여전하였다.
의정공(議政公=정언신)의 조복(朝服)이 해어지자 밤에 등불을 켜 놓고 손수 새 옷을 만들기 시작하여 동이 트기 전에 완성하니, 의정공이 그의 민첩한 솜씨에 감탄하였다.
공(김확)에게 시집와서 부모를 섬길 때처럼 시부모를 섬기니, 시부모가 그의 봉양에 만족하였다. 나의 형제와 부인의 여러 조카들이 날마다 앞에서 모시고 놀았는데, 어느 날이나 해가 지도록 길쌈을 손에서 놓은 적이 없었고, 밖에 나가 보면 손님이 자리에 가득 하였으나 하루도 술과 고기가 술동이와 도마에 있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이는 의정공의 성품이 손님을 좋아하여 평소 술상을 차리는 일을 부인이 맡았었기 때문에 가르침을 익힌 것이었다.
새벽에 일어나 가사(家事)를 다스리면 노비들이 시키는 대로 일을 하였는데, 부리는 데 방법이 있었고 살림살이에 제도가 있었다. 처음에 공은 대대로 선비로 내려와서 가산(家産)이 그리 풍족하지 않았으나 가세(家勢)가 성립되어 향리에서 부호(富豪)로 일컬어진 것은 부인이 살림을 잘하였기 때문이었다.
큰오라버니 대사헌공[大司憲公 정협(鄭協)]은 첩실(妾室)이 집안 살림을 하고 있었는데, 의정공의 기일(忌日)을 만날 때마다 제물(祭物)을 장만하여 주면서 말하기를, “어찌 나의 어버이로 하여금 복첩(僕妾)이 지내는 제사를 흠향하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여동생이 가난하여 조석(朝夕)거리를 대주었으나 여전히 그의 자녀들을 데리고 있었으며 서제(庶弟)의 딸들도 모두 양육하여 출가(出嫁)를 시키었는데, 이는 부인에게 있어서 자잘한 일이었다.
신미년(辛未年 1631년 인조 9년) 6월에 향년 64세로 세상을 떠나 공의 곁에 묻히었다. 1남 5녀를 두었다. 아들은 생원(生員) 김정지(金鼎之)이고 김정지도 1남 김환(金奐)을 두었다. 딸은 현감(縣監) 오정주(吳挺柱), 사인(士人) 송지헌(宋之獻), 이성익(李成翼), 서문도(徐文道), 홍억(洪億)에게 시집갔다. (묘지명에서 인용)
김시민
김시민;서기 1583년 ★니탕개 등의 여진족이 침입하였을때는 ★정언신을 함경도도순찰사로 하고 그 막하에 장수로 ★이순신, ★신립, 김시민, ★이억기 등 뛰어난 무관들이 참전하여 크게 공을 세웠다.
정언신 정승과 ★조헌 선생은 "김시민은 적을 방어할 줄 알며 智謀方略(지모방략)이 명장 중에서도 으뜸이라" 하며 천거하였다. (충무공 김시민장군실기 p.129)
정승 정언신(鄭彦信)과, 중봉 조헌(重峰 趙憲)이 추천하는
말이 [적(敵)을 방어하는 재주가 명장 중에서도 상사(上駟)라] 하였다. (신도비문)
김수
김수(金?)(서운관정공파); 1583년 번호(藩胡)가 침입하여 경원부(慶源府)가 함락되자 이조정랑으로서 도순찰사 정언신(鄭彦信)의 종사관이 되었다.
김제갑
김제갑(金悌甲);1588년 평안도지역 국경방어 강화책의 일환으로 특별히 창성 부사(昌城府使)로 임명되었지만, 70세에 가까운 늙은 문관을 보내는 것이 불가하다는 병조판서 정언신(鄭彦信)의 반대로 해임되었다
정언신의 자손들
아들 정협(선조(宣祖) 21년 (무자, 1588년), 식년시(式年試) 을과4(乙科4) 대사헌역임
정협(鄭協)1
1561(명종 16)∼1611(광해군 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화백(和伯), 호는 한천(寒泉). 우의정 언신(彦信)의 아들이다.
1585년(선조 18) 진사시에 장원한 뒤 1588년에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검열·정자를 지냈다.
1589년 아버지가 정여립(鄭汝立)의 모역사건에 연루되어 남해로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죽은 뒤로는 미관말직으로 전전하다가 1599년 아버지가 신원(伸寃)되자, 검상에 기용되었다.
이때부터 보덕·수찬·헌납·장령·사인·판교·사간·부응교·응교·사예 등을 역임하였다.
1605년 동지부사로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와 동지중추부사·대사간 등을 지내고,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이조참판·좌부빈객·대사헌·대사간·부제학·예조참판·동지의금부사를 거쳐 이듬해 동지춘추관사·예조참판·이조판서가 되었다.
문장에 능하여 앞서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역대실록을 중간할 때에는 편수관으로 참여하였다. 시주를 즐기고, 노소현우를 가리지 않고 교유하였다고 한다.
아들;정율(鄭慄)
딸; 김확; 김확(金?)
1572(선조 5)∼1653(효종 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정경(正卿), 호는 금사(金沙). 아버지는 도사 대섭(大涉)이다.
1589년 사마시에 합격, 진사가 되고, 1618년(광해군 10)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철원부사(鐵原府使)에 이르렀다. 일찍이 하곡(荷谷) 허봉(許봉)에게 수학하였으며, 문장이 뛰어나 사림들 사이에 명성이 높았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병랑(兵郎)으로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호위하여 한강을 건넜으며, 1627년 정묘호란 때는 동궁을 배위(陪衛)하여 남행(南行)하는 등 국가의 비상시에 왕실의 안위를 담당한 바 있다.
김확;부인 동래 정씨(東萊鄭氏)는 우의정(右議政) 정언신(鄭彦信)의 딸인데, 씩씩하고 아름다우며 차분한 데다 말이 적고 행실이 간결하여 대문을 나서지 않았고 창문을 통해 엿보지 않는 등 시집가기 전부터 이미 그러하였다. 친척이 초청하면 반드시 일을 들어 못 가는 이유를 해명하였고 나이가 많아서도 여전하였다.
의정공(議政公)의 조복(朝服)이 해어지자 밤에 등불을 켜 놓고 손수 새 옷을 만들기 시작하여 동이 트기 전에 완성하니, 의정공이 그의 민첩한 솜씨에 감탄하였다.
공에게 시집와서 부모를 섬길 때처럼 시부모를 섬기니, 시부모가 그의 봉양에 만족하였다. 나의 형제와 부인의 여러 조카들이 날마다 앞에서 모시고 놀았는데, 어느 날이나 해가 지도록 길쌈을 손에서 놓은 적이 없었고, 밖에 나가 보면 손님이 자리에 가득 하였으나 하루도 술과 고기가 술동이와 도마에 있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이는 의정공의 성품이 손님을 좋아하여 평소 술상을 차리는 일을 부인이 맡았었기 때문에 가르침을 익힌 것이었다.
새벽에 일어나 가사(家事)를 다스리면 노비들이 시키는 대로 일을 하였는데, 부리는 데 방법이 있었고 살림살이에 제도가 있었다. 처음에 공은 대대로 선비로 내려와서 가산(家産)이 그리 풍족하지 않았으나 가세(家勢)가 성립되어 향리에서 부호(富豪)로 일컬어진 것은 부인이 살림을 잘하였기 때문이었다.
큰오라버니 대사헌공[大司憲公 정협(鄭協)]은 첩실(妾室)이 집안 살림을 하고 있었는데, 의정공의 기일(忌日)을 만날 때마다 제물(祭物)을 장만하여 주면서 말하기를, “어찌 나의 어버이로 하여금 복첩(僕妾)이 지내는 제사를 흠향하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여동생이 가난하여 조석(朝夕)거리를 대주었으나 여전히 그의 자녀들을 데리고 있었으며 서제(庶弟)의 딸들도 모두 양육하여 출가(出嫁)를 시키었는데, 이는 부인에게 있어서 자잘한 일이었다.
신미년(辛未年 1631년 인조 9년) 6월에 향년 64세로 세상을 떠나 공의 곁에 묻히었다. 1남 5녀를 두었다. 아들은 생원(生員) 김정지(金鼎之)이고 김정지도 1남 김환(金奐)을 두었다. 딸은 현감(縣監) 오정주(吳挺柱), 사인(士人) 송지헌(宋之獻), 이성익(李成翼), 서문도(徐文道), 홍억(洪億)에게 시집갔다.
손자;정세미(鄭世美)=정협의 아들;광해군(光海君) 0년 (무신, 1608년), 별시(別試) 병과5(丙科5)
1583(선조 16)∼1624(인조 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사원(士元), 호는 동와(東窩). 참판 협(協)의 아들이다.
1606년(선조 39) 진사가 되고, 2년 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도사가 되었다.
1608년 태학생(太學生)으로 있을 당시 호남의 유생 고경리(高敬履) 가 성혼(成渾)이 정여창(鄭汝昌)·김굉필(金宏弼)·조광조(趙光祖)·이황(李滉)의 4현(賢)의 도를 이어 받아 정주학을 계승하였다고 주장하며 그의 신원을 청할 때, 이언적(李彦迪)을 논외로 함은 그의 학문적 업적을 깎아내리는 처사라고 그 부당함을 상소하였다.
1611년(광해군 3) 수찬을 거쳐 정언·도호부사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손자;정세구(鄭世矩)=전율(鄭慄)의 아들;광해군(光海君) 4년 (임자, 1612년), 증광시(增廣試) 병과11(丙科11)
1585(선조 18)∼1635(인조 1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대방(大方).
좌의정 언신(彦信)의 손자로, 율(慄)의 아들이다.
1612년(광해군 4)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1613년 승정원주서를 거쳐 4년 뒤 병조좌랑이 되었는데, 대북파의 이이첨(李爾瞻)이 집권하고 있을 때였으므로 그의 장인 이효원(李孝元)이 소북파 유영경(柳永慶)의 일파라고 하여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다.
1625년(인조 3) 사헌부지평·세자시강원필선·사헌부장령 등을 역임하였으며, 1627년 2월 주문사(奏聞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30년 전라감사, 다음해에 승지를 지냈고, 1635년 다시 전라감사로 있다가 그해 전주부윤으로 전직된 뒤 죽었다.
명민유재(明敏有才)라는 세평을 들었다.
손자 정세규(鄭世規)
1583(선조 16)∼1661(현종 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군칙(君則), 호는 동리(東里).
좌의정 언신(彦信)의 손자로, 율(慄)의 아들이다.
1613년(광해군 5) 사마시에 합격하고, 문음(門蔭)으로 의금부도사를 거쳐 화순현령·안산군수를 역임하였는데, 모두 혜정(惠政)을 베풀어 표리(表裏)를 하사받았다.
1636년(인조 14)에 조신(朝臣)들의 추천을 받아 4품의 산질(散秩)에서 충청도관찰사로 특진되고, 그해 겨울 병자호란으로 왕이 남한산성에서 포위되자 근왕병을 이끌고 포위된 남한산성을 향하여 진격하다가 용인·험천(險川)에서 적의 기습으로 대패하였다.
이때의 충성심으로 패군의 죄까지 면죄받고 전라감사·개성유수를 거쳐 공조판서에 임명되었다.
이때 사헌부는 문음출신으로 특별한 정적(政績)이 없어 육경(六卿)이 될 수 없다고 강격히 반대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형조판서·전주부윤·대사헌·호조판서·함경감사·지의금부사·우참찬 등을 번갈아 역임하고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1654년(효종 5) 강화유수가 되어 승천(昇天)·연미(燕尾)·갑곶(甲串)·광성(廣城) 등에 진(鎭)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그의 출세에는 김육(金堉)의 뒷받침이 있었다고 하는데, 조선시대에 문음출신으로 육경에 오른 가장 대표적 인물이다. 시호는 경헌(景憲)이다.
증손;정유(鄭攸)정세미의 아들(정언신-정협-정세미-정유)인조(仁祖) 17년 (기묘, 1639년), 별시(別試) 병과12(丙科12)
증손;정수(鄭脩)정세미의 아들.;효종(孝宗) 1년 (경인, 1650년), 증광시(增廣試) 을과2(乙科2)
1609(광해군 1)∼1662(현종 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공신(公愼). 비장연부사 세미(世美)의 아들이다. 문장에 능통하였다.
1630년(인조 8) 진사가 되었으며, 1650년(효종 1)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사간원정언을 거쳐 병조정랑·예조정랑·영춘현감·지평 등의 요직을 지냈다.
1660년(현종 1)에는 대사간 이경억(李慶億), 사간 박세모(朴世模) 등과 함께 윤선도(尹善道)의 비리를 탄핵하여 함경도로 안치하도록 하였다.
댓글목록
김태영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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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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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우의정 정언신(鄭彦信) 과 우리가문 귀한 자료 잘 읽었습니다.
지난 6월 둘째주 다녀온 부사공(휘 확)묘소 석물등 잘 보존된 묘역이 새롭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