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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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작성일02-05-03 20:14 조회1,572회 댓글0건본문
숭의전
* 문화재명 : 숭의전
* 지 정 별 : 사적 제223호
* 소 재 지 : 연천군 미산면 아미리 산10
* 지 정 일 : 1971. 12. 28
* 관리단체 : 개성 왕씨 종친회
숭의전 사진자료
http://www.iyc21.net/sub04/image/p_02-01-01.gif
http://www.iyc21.net/sub04/image/p_02-01-05.gif
* 문화재현황
- 규격 : 숭의전, 배신청, 이안청, 전사청, 재실 고직사
- 면적 : 76.1평
- 구조 : 맞배지붕, 단층와가
- 건립연대 : 태조6년 1397년
- 단청여부 : 단청
아미산 자락의 품안에 아늑히 자리잡아 검푸른 임진강을 바라보며 창건이래 수많은 사연을
간직하고 있는 숭의전은 고려 태조를 비롯한 3왕조 (현종, 문종, 원종)의 위패를 모시고 고려조
충신 16공신(복지겸, 홍 유, 신숭겸, 유금필, 배현경, 서희, 강감찬, 윤 관, 김부식, 김취려, 조 충,
김방경, 안 우, 이방실, 김득배, 정몽주)을 제사 지내는 사당으로 평양의 숭령 전(崇靈殿 단군과
고구려시조 동명성왕)과 숭인전(崇仁殿 기자), 경주의 숭 덕전(崇德殿 신라 시조) 충남 직산의
숭렬전(崇烈殿 백제 온조왕)등과 같이 조선시대에 역대 왕조의 시조(始祖)를 봉향하던 곳이다.
태조6년(1397)에 고려태조 왕건의 묘전(廟殿)을 세웠고, 정종(定宗) 원년 (1399년)에는 태조(太祖)
외에 고려의 혜종, 정종, 광종, 경종, 성종, 목종, 현종의 7왕을 제사 지냈으며 제5대 문종조 때에는
전조(前朝)를 예우하여 숭의전(崇義殿 )이라 이름지었고 고려조 4왕의 위패를 모시고 고려16공신의
제사도 함께 지내도록 하였다
고려 태조 왕건의 원찰(願刹)이었던 앙암사(迎巖寺)터에 창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묘전(廟殿)이다
숭의전의 자세한 연혁은 아래와 같다.
▶ 1397년(태조 6년) 왕명으로 앙암사 터에 고려 태조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을 건립하다.
▶ 1399년(정종 1년) 왕이 禮曺에 명하여 태조와 함께 고려조에 많은 업적을 쌓은 혜종, 성종, 현종,
문종, 원종, 충렬왕, 공민왕등 8왕의 위패를 봉안하다.
▶ 1425년(세종 7년) 조선의 宗廟에는 5室을 제사하는데 고려조의 8왕을 제사함은 합당치 않다는
유사(有司)의 헌의(獻議)에 의해 태조. 현종. 문종. 원종등 4왕만을 春秋로 봉향하다.
▶ 1451년(문종 1년) 前朝를 예우하여 숭의전이라 이름짓고 고려 4왕과 고려조의 충신
복지겸(卜智謙)등 16공신을 배향하다. (이때에 고려현종의 원손(遠孫) 왕우지(王牛知)를 찾아
숭의전 부사(副使)로 삼고 순례(循禮)라 이름지어 주어 왕씨들로 하여금 제사를 받들게 함)
▶ 1566년(선조 9년) 왕이 예조에 명하여 豊基 용천사에 있던 고려 태종의 畵像을 숭의전에
이안하여 봉안하다.
▶ 1605년(선조 38년) 경기감사 이정귀가 숭의전을 중수하다.
▶ 1727년(영조 3년) 왕의 특명으로 숭의전을 改修하다.
▶ 1789년(정조 13년) 12월, 마전군수 한문홍이 숭의전을 중건하다.
▶ 1868년(고종 5년) 왕의 전교(傳敎)로 개성부유수 서형순이 숭의전을 중수하다.
▶ 1908년(순종 2년) 마전군수 왕우순, 숭의전 참봉 왕재형, 마전군 주사 정용한등의 논의로
숭의전을 중수하다.
▶ 1950년 6. 25로 숭의전이 전소되다.
▶ 1971년 12월 28일 [문화재 보호법]에 의해 숭의전지가 사적 제223호 지정됨
▶ 1972년 - 1973년까지 왕씨 후손들의 노력과 국비, 지방비의 보조로 숭의전이 현재의
규모로 복원, 건립되어 오늘에 이르다.
건물은 正殿(50평), 移安廳(8.7평), 陪臣廳(13.98평), 典祀廳(8.17평), 內神門(3칸), 庫直舍(15.64평), 內神門(3칸), 外神門(1칸) 雲鳥門(1동), 夾門(3동 3칸)등이 있다.
숭의전 봉안 4왕 16공신을 살펴보면 태조, 현종, 문종, 원종이며 1
6공신은 복지겸, 홍유, 신숭겸(고려개국공신), 유금필, 배현경, 서희, 강감찬, 윤관, 김부식 김취려,
조충, 김방경, 안우, 이방실, 김득배, 정몽주등이다.
문종때에 중건되었고, 문종때 고려조의 개국공신 복지겸외 15인의 위패를 봉안하여 고려왕족의
후손들로 하여금 이곳을 관리하게 하고 崇義殿이라 이름지어 졌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태조가 등극하자 고려왕조의 종묘사직을 없앨 생각으로 왕의 위패를 배에
실어 강물에 뛰었더니 임진나루에 내려와 움직이지 않아 왕씨 자손이 몰래 위패를 거두어 이곳에
봉하였다고 전해짐.
봄. 가을 두차례에 걸쳐 시향을 지내고 있고 지금도 개성왕씨 30-40가구가 연천군 미산면 아미2리
속칭 애미와 괴그불, 논골등지에 마을을 이루며 살고 있고, 연천군 백학면 두일리, 백령리에도 많은
가구수(50여가구)의 왕씨들이 살고 있다.
당초 정전, 배신청, 전사청, 남문, 협문, 곳간, 수복사등이 있었으나, 한국전쟁때 소실되어 터만
남았다가 1972년부터 숭의전, 배신청, 전사청등이 차례로 복원되었다.
사적 제 223호로 관리되고 있고 현재도 관리인이 직접 거주하면서 기거하고 있다.
볼거리로는 숭의전내에 수령이 300-500년 정도의 느티나무가 있는데 높이가 20m 둘레가
4.7m이고 이 나무는 조선 문종 2년(1451년) 고려 왕씨 후손이 심었다고 전해오는데, 철따라
웅웅 소리를 내며 울면 비나 눈이 많이 오고, 이 나무에 까치가 모여들면 마을에 경사가,
까마귀가 모여 들면 틀림없이 초상이 난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현재 군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숭의전 동쪽에 蠶頭峰이 있는데 임진강에 수직으로 솟은 바위 봉우리인데 그 형태가 누에의 머리와
닮았다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잠두봉 절벽에는 조선후기 마전군수를 역임했던 韓文洪(1787-1790)의 칠언율시가 석각되어 있고
측백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숭의전 입구에 御水井이라는 우물이 있는데 고려태조 왕건이 궁예의 신하로 있을 때
개성과 철원을 왕래하면서 그 중간 지점이였던 이곳 仰巖寺에서 쉬면서 마셨던 우물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또한 숭의전 서쪽에 도동박이라는 개울이 있는데 조선초 숭의전에서 각종 제기와 귀중품을
훔쳐 달아나던 도둑이 온몸에 땀이 젖도록 밤새 도망했으나, 날이 밝고 보니 멀리 못가고
이곳에서 맴돌고 있었으므로 마을 사람들이 도둑을 잡고 장물을 모두 되찾은 곳이라 한다.
숭의전앞, 임진강에 있는 깊은 소로 종못(鐘淵)이 있는데 명주실 한 꾸러미가 들어가는 깊이라
하는데 이 못은 삼국시대부터 지금의 숭의전 자리에 있었던 앙암사의 범종이 이곳에 빠졌다하여
지어진 이름으로 자세한 유래는 다음과 같다.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고려 왕조의 상징 이였던 종묘사직을 없애기
위해 송도의 종묘에 봉안되어 있던 고려왕들의 위패를 배에 실어 강물에 띄워 보냈는데, 배는
물 흐름과 반대로 임진강 상류 방향으로 역류하며 스스로 삭녕 지역까지 올라가다 다시 방향을
바꾸어 지금의 동이리 썩은소에서 하루를 정박한 후에 3km 아래에 있는 앙암사 석벽(잠두봉)
아래로 떠 내려와 머무르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이곳에 있던 앙암사는 고려 태조 왕건이 궁예의 신하로 있을 때 철원과 개성의 중간지점이며
빼어난 풍광을 자랑하는 이곳에 자주 머물며 기도하던 왕건의 願刹로 고려왕들의 위패를 실은
배가 앙암사 아래 머무르게 된 것 또한 우연이 아닌 신묘한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날 밤 심한 폭우와 함께 천둥 번개가 앙암사를 때려 절은 형체를 알 수 없게 파괴되어
순식간에 폐허로 변해 버렸다 한다. 당시 마전군수는 이러한 여러 사실을 조정에 보고하여
그 이듬해인 조선 태조6년(1399) 앙암사가 있던 그 자리에 배에 실려 있던 고려왕들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을 건립하게 되었다 한다.
또한 앙암사가 벼락에 파괴될 당시 경내에 있던 큰 범종이 임진강으로 굴러 물 속에 잠겼는데
그 후 이 못에서 國難이 일어나기 전에는 종소리가 울려 퍼져 미리 예견했다고 하여 이 못을
종못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옛 문헌에 의하면 수면이 잔잔한 날 잠두봉 정상에서 임진강을
내려다보면 그때 강속으로 잠긴 범종을 목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숭의전 아래가 바로 임진강이며 여름이면 수많은 강태공들이 찾아오고 지역의 초. 중학교학생들의
소풍 코스이며 현재도 주말과 휴일이면 타지에서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현재 도로도 포장공사중에 있고 하루 버스가 전곡에서 4차례 다니고 있다. 서울에서 의정부 >> 동두천 >> 전곡 >> 백학쪽으로 오면 되고 일산이나 문산 쪽에서는 문산 >> 적성 >> 전곡방면으로 가다가 아미2리로 들어가면 된다. 도중에 옻나무약수도 만날 수 있고 서울과 불과 2시간 이내에 올 수 있는 곳이라 주말, 휴일 가족나들이에는 적격이라 할 수 있다.
숭의전 입구에서는 이 마을에서 생산되는 각종 채소와 먹거리도 살수가 있으며 주차(40여대: 무료주차임)장과 음식점(고려가든, 임진나루, 어부동)이 3개소, 상점 1개소가 있다. 특히 고려가든(대표: 이경순)에서 만드는 동동주와 빈대떡의 맛은 일품이라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입맛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향토사료집/ 연천문화원 발행/ 1997/ 자료참조]
* 건 물
·정전(50평) ·이안청(8.7평)·배신청(13평) ·전사청(8.17평)
·앙암재(13.98평) ·고직사(15.64평)·내신문(3칸)·
외신문(1칸) ·협문(3동 3칸)·운조문(1동)
▣ 김태서 -
▣ 김재익 -
▣ 김은회 -
▣ 김영윤 -
▣ 김항용 -
▣ 김정중 -
* 문화재명 : 숭의전
* 지 정 별 : 사적 제223호
* 소 재 지 : 연천군 미산면 아미리 산10
* 지 정 일 : 1971. 12. 28
* 관리단체 : 개성 왕씨 종친회
숭의전 사진자료
http://www.iyc21.net/sub04/image/p_02-01-01.gif
http://www.iyc21.net/sub04/image/p_02-01-05.gif
* 문화재현황
- 규격 : 숭의전, 배신청, 이안청, 전사청, 재실 고직사
- 면적 : 76.1평
- 구조 : 맞배지붕, 단층와가
- 건립연대 : 태조6년 1397년
- 단청여부 : 단청
아미산 자락의 품안에 아늑히 자리잡아 검푸른 임진강을 바라보며 창건이래 수많은 사연을
간직하고 있는 숭의전은 고려 태조를 비롯한 3왕조 (현종, 문종, 원종)의 위패를 모시고 고려조
충신 16공신(복지겸, 홍 유, 신숭겸, 유금필, 배현경, 서희, 강감찬, 윤 관, 김부식, 김취려, 조 충,
김방경, 안 우, 이방실, 김득배, 정몽주)을 제사 지내는 사당으로 평양의 숭령 전(崇靈殿 단군과
고구려시조 동명성왕)과 숭인전(崇仁殿 기자), 경주의 숭 덕전(崇德殿 신라 시조) 충남 직산의
숭렬전(崇烈殿 백제 온조왕)등과 같이 조선시대에 역대 왕조의 시조(始祖)를 봉향하던 곳이다.
태조6년(1397)에 고려태조 왕건의 묘전(廟殿)을 세웠고, 정종(定宗) 원년 (1399년)에는 태조(太祖)
외에 고려의 혜종, 정종, 광종, 경종, 성종, 목종, 현종의 7왕을 제사 지냈으며 제5대 문종조 때에는
전조(前朝)를 예우하여 숭의전(崇義殿 )이라 이름지었고 고려조 4왕의 위패를 모시고 고려16공신의
제사도 함께 지내도록 하였다
고려 태조 왕건의 원찰(願刹)이었던 앙암사(迎巖寺)터에 창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묘전(廟殿)이다
숭의전의 자세한 연혁은 아래와 같다.
▶ 1397년(태조 6년) 왕명으로 앙암사 터에 고려 태조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을 건립하다.
▶ 1399년(정종 1년) 왕이 禮曺에 명하여 태조와 함께 고려조에 많은 업적을 쌓은 혜종, 성종, 현종,
문종, 원종, 충렬왕, 공민왕등 8왕의 위패를 봉안하다.
▶ 1425년(세종 7년) 조선의 宗廟에는 5室을 제사하는데 고려조의 8왕을 제사함은 합당치 않다는
유사(有司)의 헌의(獻議)에 의해 태조. 현종. 문종. 원종등 4왕만을 春秋로 봉향하다.
▶ 1451년(문종 1년) 前朝를 예우하여 숭의전이라 이름짓고 고려 4왕과 고려조의 충신
복지겸(卜智謙)등 16공신을 배향하다. (이때에 고려현종의 원손(遠孫) 왕우지(王牛知)를 찾아
숭의전 부사(副使)로 삼고 순례(循禮)라 이름지어 주어 왕씨들로 하여금 제사를 받들게 함)
▶ 1566년(선조 9년) 왕이 예조에 명하여 豊基 용천사에 있던 고려 태종의 畵像을 숭의전에
이안하여 봉안하다.
▶ 1605년(선조 38년) 경기감사 이정귀가 숭의전을 중수하다.
▶ 1727년(영조 3년) 왕의 특명으로 숭의전을 改修하다.
▶ 1789년(정조 13년) 12월, 마전군수 한문홍이 숭의전을 중건하다.
▶ 1868년(고종 5년) 왕의 전교(傳敎)로 개성부유수 서형순이 숭의전을 중수하다.
▶ 1908년(순종 2년) 마전군수 왕우순, 숭의전 참봉 왕재형, 마전군 주사 정용한등의 논의로
숭의전을 중수하다.
▶ 1950년 6. 25로 숭의전이 전소되다.
▶ 1971년 12월 28일 [문화재 보호법]에 의해 숭의전지가 사적 제223호 지정됨
▶ 1972년 - 1973년까지 왕씨 후손들의 노력과 국비, 지방비의 보조로 숭의전이 현재의
규모로 복원, 건립되어 오늘에 이르다.
건물은 正殿(50평), 移安廳(8.7평), 陪臣廳(13.98평), 典祀廳(8.17평), 內神門(3칸), 庫直舍(15.64평), 內神門(3칸), 外神門(1칸) 雲鳥門(1동), 夾門(3동 3칸)등이 있다.
숭의전 봉안 4왕 16공신을 살펴보면 태조, 현종, 문종, 원종이며 1
6공신은 복지겸, 홍유, 신숭겸(고려개국공신), 유금필, 배현경, 서희, 강감찬, 윤관, 김부식 김취려,
조충, 김방경, 안우, 이방실, 김득배, 정몽주등이다.
문종때에 중건되었고, 문종때 고려조의 개국공신 복지겸외 15인의 위패를 봉안하여 고려왕족의
후손들로 하여금 이곳을 관리하게 하고 崇義殿이라 이름지어 졌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태조가 등극하자 고려왕조의 종묘사직을 없앨 생각으로 왕의 위패를 배에
실어 강물에 뛰었더니 임진나루에 내려와 움직이지 않아 왕씨 자손이 몰래 위패를 거두어 이곳에
봉하였다고 전해짐.
봄. 가을 두차례에 걸쳐 시향을 지내고 있고 지금도 개성왕씨 30-40가구가 연천군 미산면 아미2리
속칭 애미와 괴그불, 논골등지에 마을을 이루며 살고 있고, 연천군 백학면 두일리, 백령리에도 많은
가구수(50여가구)의 왕씨들이 살고 있다.
당초 정전, 배신청, 전사청, 남문, 협문, 곳간, 수복사등이 있었으나, 한국전쟁때 소실되어 터만
남았다가 1972년부터 숭의전, 배신청, 전사청등이 차례로 복원되었다.
사적 제 223호로 관리되고 있고 현재도 관리인이 직접 거주하면서 기거하고 있다.
볼거리로는 숭의전내에 수령이 300-500년 정도의 느티나무가 있는데 높이가 20m 둘레가
4.7m이고 이 나무는 조선 문종 2년(1451년) 고려 왕씨 후손이 심었다고 전해오는데, 철따라
웅웅 소리를 내며 울면 비나 눈이 많이 오고, 이 나무에 까치가 모여들면 마을에 경사가,
까마귀가 모여 들면 틀림없이 초상이 난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현재 군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숭의전 동쪽에 蠶頭峰이 있는데 임진강에 수직으로 솟은 바위 봉우리인데 그 형태가 누에의 머리와
닮았다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잠두봉 절벽에는 조선후기 마전군수를 역임했던 韓文洪(1787-1790)의 칠언율시가 석각되어 있고
측백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숭의전 입구에 御水井이라는 우물이 있는데 고려태조 왕건이 궁예의 신하로 있을 때
개성과 철원을 왕래하면서 그 중간 지점이였던 이곳 仰巖寺에서 쉬면서 마셨던 우물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또한 숭의전 서쪽에 도동박이라는 개울이 있는데 조선초 숭의전에서 각종 제기와 귀중품을
훔쳐 달아나던 도둑이 온몸에 땀이 젖도록 밤새 도망했으나, 날이 밝고 보니 멀리 못가고
이곳에서 맴돌고 있었으므로 마을 사람들이 도둑을 잡고 장물을 모두 되찾은 곳이라 한다.
숭의전앞, 임진강에 있는 깊은 소로 종못(鐘淵)이 있는데 명주실 한 꾸러미가 들어가는 깊이라
하는데 이 못은 삼국시대부터 지금의 숭의전 자리에 있었던 앙암사의 범종이 이곳에 빠졌다하여
지어진 이름으로 자세한 유래는 다음과 같다.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고려 왕조의 상징 이였던 종묘사직을 없애기
위해 송도의 종묘에 봉안되어 있던 고려왕들의 위패를 배에 실어 강물에 띄워 보냈는데, 배는
물 흐름과 반대로 임진강 상류 방향으로 역류하며 스스로 삭녕 지역까지 올라가다 다시 방향을
바꾸어 지금의 동이리 썩은소에서 하루를 정박한 후에 3km 아래에 있는 앙암사 석벽(잠두봉)
아래로 떠 내려와 머무르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이곳에 있던 앙암사는 고려 태조 왕건이 궁예의 신하로 있을 때 철원과 개성의 중간지점이며
빼어난 풍광을 자랑하는 이곳에 자주 머물며 기도하던 왕건의 願刹로 고려왕들의 위패를 실은
배가 앙암사 아래 머무르게 된 것 또한 우연이 아닌 신묘한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날 밤 심한 폭우와 함께 천둥 번개가 앙암사를 때려 절은 형체를 알 수 없게 파괴되어
순식간에 폐허로 변해 버렸다 한다. 당시 마전군수는 이러한 여러 사실을 조정에 보고하여
그 이듬해인 조선 태조6년(1399) 앙암사가 있던 그 자리에 배에 실려 있던 고려왕들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을 건립하게 되었다 한다.
또한 앙암사가 벼락에 파괴될 당시 경내에 있던 큰 범종이 임진강으로 굴러 물 속에 잠겼는데
그 후 이 못에서 國難이 일어나기 전에는 종소리가 울려 퍼져 미리 예견했다고 하여 이 못을
종못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옛 문헌에 의하면 수면이 잔잔한 날 잠두봉 정상에서 임진강을
내려다보면 그때 강속으로 잠긴 범종을 목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숭의전 아래가 바로 임진강이며 여름이면 수많은 강태공들이 찾아오고 지역의 초. 중학교학생들의
소풍 코스이며 현재도 주말과 휴일이면 타지에서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현재 도로도 포장공사중에 있고 하루 버스가 전곡에서 4차례 다니고 있다. 서울에서 의정부 >> 동두천 >> 전곡 >> 백학쪽으로 오면 되고 일산이나 문산 쪽에서는 문산 >> 적성 >> 전곡방면으로 가다가 아미2리로 들어가면 된다. 도중에 옻나무약수도 만날 수 있고 서울과 불과 2시간 이내에 올 수 있는 곳이라 주말, 휴일 가족나들이에는 적격이라 할 수 있다.
숭의전 입구에서는 이 마을에서 생산되는 각종 채소와 먹거리도 살수가 있으며 주차(40여대: 무료주차임)장과 음식점(고려가든, 임진나루, 어부동)이 3개소, 상점 1개소가 있다. 특히 고려가든(대표: 이경순)에서 만드는 동동주와 빈대떡의 맛은 일품이라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입맛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향토사료집/ 연천문화원 발행/ 1997/ 자료참조]
* 건 물
·정전(50평) ·이안청(8.7평)·배신청(13평) ·전사청(8.17평)
·앙암재(13.98평) ·고직사(15.64평)·내신문(3칸)·
외신문(1칸) ·협문(3동 3칸)·운조문(1동)
▣ 김태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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