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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묘지명 특별기획전을 다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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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영 작성일06-07-31 13:24 조회1,517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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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묘지명 특별기획전을 다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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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5일 용산 국립박물관에서 있은 충무공 김시민장군 공신교서 고유제때 스쳐지나며 보았던 고려 묘지명 특별 기획전을 관람하지 못한 것이 아쉬워 오늘(7.29 토) 오후에 용산 지하철 이촌역에 내렸습니다. 2번 출구로 나오니 짙은 안개사이로 드러난 햇살은 후덥지근한 습도를 발산 합니다.
전 국토를 수마가 갈기 갈기 찢어 놓았던 지긋지긋하던 물 난리도 한풀 꺽기는가 봅니다.
매표소 방향으로 다가가니 많은 인파에 놀랐습니다. 엇그제 까지만 해도 한산하던 편의점과 아이스크림 판매소는 두 줄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주말과 방학을 맞은 학생들과 장마비로 인하여 교외보다는 박물관 나들이가 좋았었나 봅니다. 줄을서서 매표를 하고 1층 역사관을 따라 들어갔습니다. 좌측으로 고려묘지명 특별 기획전시실과 맞은편으로 역사관 문서실에 선무공신 김시민 교서전(2006.7.29~8.27)이라는 커다란 입체 현수막이 걸려 있습니다.
우선 교서 원본을 보고 싶은 마음에 문서실로 들어섰습니다. 대형 유리관에 ‘선무공신 김시민 교서’ 원본이 길게 펼쳐져 있고 학생, 청소년들이 줄을서서 저마다 ‘MBC느낌표’에 대한 이야기를 한마디씩 하며 관심있게 살피고 있습니다. 카메라 촬영은 금지 되어 있다는 안내인의 멘트에도 아랑곳 하지않고 몰래 사진을 찍다 들켜 주의를 받는 아이들, 소란스런 장내가 방송 ‘느낌표’의 위력이 대단함을 실감하며 ‘고려 묘지명’ 전시관으로 들어 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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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 유리관에 정성스럽게 진열되어 있는 돌. 적게는 7백년에서 1천년이 흘렀습니다.
묘지명(墓誌銘)은 무덤의 주인이 누구이고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후세에 전하기 위해 무덤 안에 넣은 기록물을 말합니다. 각각의 묘지명은 오늘날 우리에게는 당시 문화와 역사, 삶과 생각을 생생하게 전해주는 소중한 역사 편지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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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이름은 경애라…평소에 일찍이 내게 말하기를,
“…뒷날 불행히도 내가 천한 목숨을 거두고, 당신은 많은 녹을 받아 모든 일이 잘 되더라도 저를 살림하는 재주가 없었다 하지 마시고 가난을 이겨내던 일은 잊지 말아주세요”라고 하였는데, 말을 마치고는 크게 탄식을 했다.
내가 좋은 벼슬로 자리를 옮기니, 아내가 기뻐하며 말하였다. “우리의 가난도 이제 가시려나 봐요”
내가 (무정하게) 대답했다. “간관은 녹봉이나 받는 자리가 아니요”
(그러자) 아내가 말했다.
“어느 날 당신이 궁궐에서 천자(天子 : 임금)와 옳고 그른 것을 따지게 된다면, 비록 가시나무 비녀를 꽂은 채 무명치마 입고 삼태기를 이고 살게 되더라도 달게 여길 거예요” 평범한 부녀자의 말 같지가 않았다.
그 해 9월에 아내는 병이 들었는데 이듬해 정월에 위독해져 세상을 떠나니, 한(恨)이 어떠하였겠는가 …
믿음으로 맹세컨대 당신을 감히 잊지 못하리라.
함께 묻히지 못하여 심히 애통하도다.---
고려 중기의 문신이자 효자로 이름난 최누백(崔婁伯 : ?~1205)이 죽은 첫 부인 염경애(廉瓊愛 : 1100~1146)를 위해 직접 지은 묘지명입니다. 수원 향리의 아들로서 과거를 통해 벼슬에 오른 최누백은 이 묘지명에서, 가난한 하급 관료 시절 가계를 위해 동분서주하던 아내와의 대화를 추억하고, 그녀를 결코 잊을 수 없다며 애통해 하는 구절이 190여점이나 되는 많은 묘지명중에 선정되어 전시되고 있음을 말해 줍니다..
내 삶을 돌아보니
사람됨이 어리석고 못나 나라에 보탬이 되지 못하였슴에도 벼슬과 수명이 이만큼 되도록 재난이나 화가 없었던 것은 반드시 남모르는 가호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평생의 행적을 적지 않을 수가 없으므로 그 생애의 대략을 스스로 써서 두 아들에게 남겨주어 보도록 하였다. 필경 세상을 떠난 날짜와 묻힐 곳은 마땅히 이어 써서 무덤에 기록으로 남겼을 것이다.
명(銘)하여 이른다.
파리한 몸 돌아보니 땅위의 군더더기 살덩이일뿐,
바탕은 미약하고 성질은 우직하네.
학문을 이룬것도 없이 선비라 강변하고,
조정에 나아가 외람되게 높은 벼슬 올랐네.
~이하생략~
김훤(金暄:1258~1305)이 스스로 쓴 묘지명 입니다. 김훤은 원종대에 왕실과 개경환도를 위해 활약하고 삼별초 군을 격퇴하여 정2품에 오르는등 정치적 비중이 큰 인물이었으나 자신의 공로나 업적등을 장황하게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뒷면에는 이진(李 王眞)이 따로 쓴 묘지명이 새겨져 있습니다. 찬자 이진은 익제 이제현의 부친으로 충렬공 (휘 방경)의 묘지명을 지은 인물입니다.
이날 전시된 묘지명은 <가족과 여성>.<정신세계>등의 범주로 나누어 감동과 시사성이 있는것만 190점의 묘지명중에 선정하였다는 유물관리부의 서성호 선생으로부터 설명을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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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죽음은 누구나 겪는 일로 피할수 없는 것이다.
요(堯). 순(舜)같은 성인이나, 우왕(禹王). 탕왕(湯王). 문왕(文王). 무왕(武王)처럼 덕이 있는 분이나 주공(周公). 공자(孔子). 맹자(孟子)와 같이 현명한 이들도 죽었다. 
살다가 죽는 것은 낮과 밤이 바뀌고 추위와 더위가 서로 교대하는 것과 같으니 어찌 죽음만 싫어하고 사는것만 좋아 할일인가? 다만 공명을 미처 세우지 못하였는데도 서둘러 멀리 떠나 처자와 벗들에게 오래도록 슬프고 아픔을 주는 것이 애석할 따름이다.
고려 중기의 문신 박황(朴璜)의 묘지명으로 아들 친구이자 제자인 최급(崔伋)이 지은 묘지명중에 일부 입니다.
애써 찾아보려 했던 이숙기가 撰한 보문각대제학 충숙공 (휘 승용)의 묘지명이 수장고에 보관되어 일반인의 접근이 차단되어 있음을 확인하였습니다.

      

<충숙공 (휘 승용) 묘지명>우측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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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손으로서 선조님의 묘지명을 보고싶은게 인지 상정이지요'. 유물관리부 장선생님의 친절하면서도 규정에 매여 있는 현실의 안타까움을 토로하는 설명을 들은뒤 더 큰 아쉬움만 뒤로 한채 애써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댓글목록

김발용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발용
작성일

  고려 묘지명 특별기획전 기사를 보고는 문영공(휘 순). 충숙공(휘 승용) 두 분 선조님의 지석이 전시되지나 않을까 기대하였는데 아쉽습니다. 지하 수장고에서 언제나 빛을 볼 수 있을런지....
역시 선조님 관련 유물들은 국립박물관이 아닌 지역 박물관에 기증하여 상시 전시되는 것이 올바른 방법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김항용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항용
작성일

  귀한 전시회를 다녀오셨습니다. 감상 후기를 감동으로 읽었습니다.
문영공과 충숙공 묘지명은 꼭 봐야 하는데--
우리가 모르는 또 다른 묘지명들이 박물관에 있을 수도 있을텐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