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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의 조선 인물지-병세재언록》- 김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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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영 작성일06-08-04 13:58 조회1,831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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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재록(梱材錄)
‘상장(相將)’이라 하지 않고 ‘장상(將相)이라 하는 것은 경중을 두어서 그렇게 말한것이겠는가? 인(仁). 지(知). 용(勇) 세가지 덕이 갖추어진 다음에 비로소 장수가 될수있으니, 장수란 그렇게 어려운것이다. 우리나라는 장수가 문관(文官)에 의해 관할되니, 명나라 직제(職制)와 비슷하다. 이에 무신의 발호하는 어지러움을 면하였으나 장수의 재목이 스스로 드러나지 않았던 것은 이 때문이다. 지금은 세상이 태평한지 오래되니, 중군(中軍)이 혁혁한 공을세운 사례가 더욱 적막하다. 그러나 하늘이 인재를 냄에 어찌 그치는 일이 있겠는가? 그들 중 가장 빼어난 인재를 뽑아서 곤재록(梱材錄)을 쓴다.
김영수(金永綬)는 통제사(統制使)로 있다가 죽었다. 앞서 제주목사(濟州牧使)로 있을 때 종매(從妹)가 역당(逆黨)의 부인이 된것으로 연좌되어 귀양간지 여러 해 만에 무고(無辜)로 사면을 받아서 비로소 다시 충청도 병사(兵使)로 임명 받았다. 성(城)을 쌓음에 당하여 군법으로 역인(役人)들을 부리는데 달고 괴로움을 역인들과 똑 같이 하였다. 역인들이 먹지 않으면 김병사도 또한 먹지 않으니, 일꾼들이 좋아하고 떠받들어 힘을 다하였다. 통제사로 옮겨가서 해선(海船)을 타고 훈련을 할 때 이무기가 길을 막고 있으니, 포를 쏘도록 해서 잡았다. 큰 솥에 삶아 여러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군사들이 감히 입에 가까이 하지 못하다가 김통제사가 큰 사발로 먹자, 여러 군사들이 비로소 그것을 먹었고, 모두 그 맛이 좋다고 하였다.
출전: 18세기의 조선 인물지-창비
조선 영조·정조 때의 학자 이규상(李圭象)이 지은 18세기 인물지(人物誌).
《병세재언록(幷世才彦錄)》에는 18세기 영조·정조 시대의 문화부흥기를 이끈 주역들이 망라되어 있어 사료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밝혀졌다.
《병세재언록》은 다시 당파에 얽매이지 않은 48명의 유학자들을 기록한 《유림록(儒林錄)》, 유학자 가운데 절개가 굳은 선비를 따로 떼어내어 묶은 《고사록(高士錄)》, 실학자들을 비롯해 68명의 문인들을 엮은 《문원록(文苑錄)》, 기술자들을 묶은 《곤재록(梱材錄)》, 서예가들을 묶은 《서가록(書家錄)》, 화가들을 묶은 《화주록(畵廚錄)》, 각 방면의 재인들을 엮은 《방기록(方伎錄)》 그리고 《과문록(科文錄)》 등으로 세분된다. 1997년 성균관대학교 민족문학사연구소에서 공동 번역해 《18세기의 조선 인물지-병세재언록》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댓글목록

김발용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발용
작성일

  이무기를 드신 통제사.. 전설의 고향에 나올법한 제목입니다.
지금쯤 부여에 계시겠고, 내일은 통제사 교지를 친견하시겠네요.

김항용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항용
작성일

  귀한 자료 발굴, 감사합니다. 언제 한번 이무기 한 사발 먹어야 되지 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