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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백범일지(50) 하편 머릿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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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6-08-11 11:19 조회1,46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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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편 머리말


내 나이 이제 67. 중경(重慶) 화평로(和平路) 오사야항(吳師爺巷) 1호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에서 다시 이 붓을 드니, 53세 때 상해(上海) 법조계(法曹界) 마랑로(馬浪路) 보경리(普慶里) 4호 임시정부 청사에서 '백범일지' 상권을 쓰던 때로부터 14년의 세월이 지난 후이다.

나는 왜 '백범일지'를 썼던고?

내가 젊어서 붓대를 던지고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제 힘도 재주도 헤아리지 아니하고 성패도 영욕도 돌아봄이 없이 분투하기 30여 년, 그리고 명의만이라도 임시 정부를 지키기 10여 년에 이루어 놓은 일은 하나도 없이 내 나이는 60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나는 침체된 국면을 타계하고 국민의 쓰러지려 하는 3.1 운동의 정신을 다시 떨치기 위하여 미주(美洲)와 하와이에게 있는 동포들에게 편지로 독립 운동의 위기를 말하여 돈의 후원을 얻어 가지고 열혈 남자(熱血男子)를 물색하여 암살과 파괴의 테러 운도을 계획한 것이었다.

동경 사건과 상해 사건 등이 다행히 성공되는 날이면 냄새나는 내 가죽 껍데기도 최후가 될 것을 예기하고 본국에 있는 두 아들이 장성하여 해외로 나오거든 그들에게 전하여 달라는 듯으로 쓴 것이 이 '백범일지'다.

나는 이것을 등사하여 미주와 하와이에 있는 몇 분 동지에게 보내어 후일 내 아들들에게 보여주기를 부탁하였었다.

그러나 나는 죽을 땅을 얻지 못하고 천한 목숨이 아직 남아서 '백범일지' 하편을 쓰게 되었다. 이때에는 내 두 아들도 이미 장성하였으니 그들을 위하여서 이런 것을 쓸 필요는 없어졌다.

내가 지금 이것을 쓰는 목적은 해외에 있는 동지들이 내 50년 분투 사정을 보고 허다한 과오로 은감(殷鑑)을 삼아서 다시 복철을 밟지 발기를 원하는 노파심에 있는 것이다.

지금 이 하편을 쓸 때의 정세는 상해에서 상편을 쓸 때의 것보다는 훨씬 호전되었다. 그때로 말하면 임시 정부라고 외국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 한인으로도 국무위원과 십수인의 의정원 의원 외에는 와 보는 자도 없었다. 그야말로 이름만 남고 실상은 없는 임시 정부였었다.

그런데 하편을 쓰는 오늘날로 말하면 중국 본토에 있는 한인의 각 당 각 파가 임시 정부를 지지하고 옹호할뿐더러 미주와 하와이에 있는 만여 명 동포가 이 정부를 추대하여 독립 운동 자금을 상납하고 있다.

또 외교로 보더라도 종래에는 중국·소련·미국의 정부 당국자가 비밀 찬조는 한 일이 있으나 공식으로는 거래가 없었던 것이, 지금에는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 씨가,

'한국은 장래에 완전한 자주 독립국이 될 것이다'

라고 방송하였고, 중국에서도 입법원장(立法院長) 손 과(孫科) 씨가 공공한 석상에서,

'일본의 제국주의를 박멸하는 중국의 양책(良策)은 한국 임시 정부를 승인함에 있다'

고 부르짖었으며, 우리 자신도 워싱턴에 외교 위원부를 두어 이승만 박사를 위원장으로 임명하여 외교와 선전에 힘을 쓰고 있고, 또 군정으로 보더라도 한국(韓國) 광복군(光復軍)이 정식으로 조직되어 이청천(李靑天)으로 총사령을 삼아 서안(西安)에 사령부를 두고 군사의 모집과 훈련과 작전을 계획 중이며, 재정도 종래에는 독립 운동의 침체, 인심의 퇴축, 적의 압박, 경제의 곤란 등으로 임시 정부의 수입이 해가 갈수록 감하여 집세를 내기도 어려울 지경이던 것이 홍구 - 상해 - 폭탄 사건 이래로 내외국인의 임시 정부에 대한 인식이 변하여서 점차로 정부의 수입도 늘어, 민국 23년도에는 수입이 53만 원 이상에 달하였으니 실로 임시 정부 설립 이래의 첫 기록이었다.

이 모양으로 임시 정부의 상태는 상해에서 이 책 상편을 쓸 때보다 나아졌지마는 나 자신으로 말하면 일부일(一復日) 노병과 노쇠를 영접하기에 골몰하다. 상해 시대를 죽자고나 하던 시대라 하면 중경 시대는 죽어가는 시대라고 할 것이다.

만일 누가 어떤 모양으로 죽는 것이 네 소원이냐 한다면, 나는 최대한 욕망은 독립이 다 된 날 본국(本國)에 들어가 영광의 입성식(入城式)을 한 뒤에 죽는 것이지마는, 적더라도 미주와 하와이에 있는 동포들을 만나보고 오는 길에 비행기 위에서 죽어서 내 시체를 던져 그것이 산에 떨어지면 날짐승, 길짐승의 밥이 되고, 물에 떨어지면 물고기의 뱃속에 영장하는 것이다 라고 대답할 것이다.

세상은 고해(苦海)라더니 살기로 어렵거니와 죽기도 또한 어렵다. 나는 서대문 감옥에서와 인천 축항 공사장에서 몇 번 자살할 생각을 가졌으나 되지 못하였고 안 매산(安梅山) 명근(明根) 형도 모처럼 굶어 죽으려고 나흘이나 식음을 전폐한 것을 서대문 옥리들이 억지로 달걀을 입에 흘려 넣어 죽지 못하였으니 죽는 것도 자유가 있는 자라야 할 일이어서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다.

나의 70 평생을 회고하면 살려고 산 것이 아니요, 살아져서 산 것이고 죽으려고 하여도 죽지 못한 이 몸이 필경은 죽어져서 죽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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