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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 고운사터 ..이몽일... 영남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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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중 작성일02-05-04 21:02 조회1,77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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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 고운사터


 

p-20000818.jpg 고운사(孤雲寺)는 경북 의성군 단촌면 구계리(龜溪里)의 등운산(騰雲山) 깊은 골짝에 터잡고 있는 이 나라 명찰(名刹) 중의 명찰이다. 그 절은 조계종 제16교구의 본사로서도 유명하지만 그 절집이 들어앉은 터 역시 예 로부터 더할 나위 없는 명기(明基)로 알려져 왔다. 그 절을 명찰이라 할 수 있는 것도 어쩌면 그 터가 지닌 바로 그 명기성(性)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우선 곳이름이나 집이름만 살펴봐도 그렇다. 등운이 라는 산이름과 고운(高雲)이라는 원래의 절이름, 그리고 가운루(駕雲樓)라 는 누각이름과 현대에 와서 세워진 고운대암(孤雲大庵) 등에 이르기까지 그 절에는 온통 구름과 연관된 이름들만 그 어떤 정통성을 부여받고 있는 듯하다. 원래 고운사(高雲寺)라 불리던 절이름이 일찍이 고운(孤雲) 최치 원과 인연이 닿아 고운사(孤雲寺)로 고쳐 불려지게 된 것은 일단 그렇다치 자. 산이 구름을 타고 오르고, 절집은 높이 뜬 구름 위에 있으며, 누각 또 한 떠가는 구름을 타고 있다고 한 것 등은 과연 어떻게 해서 지어진 이름 이던가.

알고보면 그 이름들은 모두 고운사가 들어앉은 터의 특징에서 비 롯된 것이다. 그리고 터의 그런 특징이란 것은 곧 풍수와 직결되는 것인 바, 풍수를 모르고서는 풍수사(風水寺)나 다름없는 고운사를 제대로 이해 할 수 없다고 보는 까닭도 모두 그 때문인 것이다. 고운사에 구름 운(雲)자가 들어간 이름이 많은 것은 그 곳 터가 마치 연 꽃이 반쯤 피어난 듯한, 이른바 부용반개형(芙蓉半開形)의 지세를 갖추고 있는 것과 관계깊다. 연꽃잎에 해당하는 몇몇 산봉우리들이 사방에서 한 곳으로 모여들고, 각 봉우리 지맥들이 마치 꽃잎이 만개(滿開)했을 때와도 같은 완만한 사면이 아닌 다소 급경사의 가파른 사면을 이루고 있는 형국 이 곧 부용반개형의 지세다.

자연지물(自然地物)만 놓고 볼 때 그런 지세 안에서는 그 어떤 지점에서도 오로지 맞은편 산봉우리들과 그 사이에 놓인 골짜기, 그리고 푸른 하늘에 떠가는 흰 구름밖에 보이지 않는다. 평야지대 가 아닌 산간지대의 반개형 지세에서 시계(視界)가 열려 있는 곳이라고는 그것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그 시계가 결정적으로 반영된 것이 바로 구름 운자가 들어간 이름들이다. 지금은 경내의 하천이 거의 복개돼버려 예전처 럼 고운사터에서 계류수에 비친 구름과 산, 그리고 절집의 운치를 감상할 수는 없다.

물론 물에 비친 구름을 통하여 그런 이름들이 지어졌음직하여 이제 더 이상 그런 진경을 볼 수 없다는 것이 무척 아쉽기는 하다. 그러나 지금도 경내의 어디에서든 하늘을 떠가는 흰구름을 한참 바라보고 있노라 면 산도, 절집도, 자기 자신도 모두 하나로 어우러져 구름을 타고 있는 듯 한 기분이 드는 것은 매한가지다. 원래 고운사(高雲寺)라는 절이름이 상징 하고자 했던, 그 절터가 곧 극락세계나 진배없다는 의도(그만큼 청정한 도 량임을 의미함) 만큼은 여전히 살아있음을 누구든지 느낄 수 있다는 말이 다. 부용반개형의 지세는 고운사 경내의 토지이용 방법에도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동북쪽 등운산(해발 524m)에서 서쪽으로 크게 두 갈래로 뻗어나온 산줄기가 마치 호흡을 조절하면서 일궈놓은 듯 군데군데에 아름다운 봉우 리들을 솟구쳐 놓았는데, 고운사는 세 줄기의 지맥이 서로 맞닿은 곳에 터 잡았다.

이를테면 안망천(혹은 미천) 상류의 계류가 Y자형으로 흐르고 있 는 가운데, 글자의 왼쪽이 북쪽이고, 위쪽이 동쪽인 상태에서 왼쪽 여백의 터에는 극락전(1695년 준공)이 남향해 들어서 있고, 그 동남간인 위쪽 여 백의 터(두계류의 합수머리)에는 웅장하게 새로 지은 대웅전(1992년 준공) 이 서남향해 들어서 있는 것이다.

예로부터 풍수가들 사이에는 극락전이 기대앉은 북쪽의 수봉(壽峰)이 매우 빼어나고, 그 남쪽으로 안대(案對)를 이루는 봉우리도 무척 아름다워 그야말로 그 절터는 오랜 수를 누릴 수 있 는 자리로서, 새재 이남으로는 그만한 명구(名區)가 없다는 말까지 나돈 적도 있다고 한다. 조선 왕실에서 고운사에 특별히 연수전(延壽殿)이라는 원당을 지었던 것도 십중팔구 부처님의 보살핌에 못지않게 그런 고운사터 의 명당성을 염두에 두었던 것이 틀림없지 않겠는가.

더구나 극락전과 대 웅전, 그리고 고금당의 좌향(坐向: 건물의 중심축 전면이 향해 있는 방향) 들은 한결같이 상대적으로 앞쪽으로 놓인 산사면의 기슭에 걸쳐져 있다. 시계의 절반은 지맥 몸체에 두어 좌향의 허(虛)함을 보(補)하고, 또 그 나 머지 절반은 트인 골짜기를 향하도록 두어 부용반개 지세에서 초래될 수 있는 시각적인 답답함을 일거에 해소해버렸으니 그 절묘한 좌향 설정이 단 순한 합리성의 차원을 넘어 경이롭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고운사는 터의 이용이 뚜렷하게 3구분돼 있는 듯하다. 수봉 자락의 극락 전에서는 염불과 목탁소리가 정정한데, 안봉(案峰) 중턱의 고금당(古金堂) 에서는 참선이 한창 진행중이고, 동북쪽의 여러 전각과 요사(繞舍)에서는 스님들이 경전을 공부하는지 쥐죽은듯이 조용하다.

하기야 연꽃 지세에서 는 꽃잎 하나하나가 생명력으로 가득차 있어 그같이 지맥별로 수행공간을 구분 설정해 보는 것도 나름대로 소기의 목적을 성취하는데 큰 도움이 될 법하다. 그러나 예전에는 계류에 의해 자연스레 경계지어졌던 그러한 구분 된 수행공간이 새 대웅전을 지을 때 마당을 넓히고자 하천을 모두 복개해 버려 그 의미가 크게 퇴색된 것이 못내 아쉽다. 복개된 하단부에 화려하고 위풍당당하게 들어서 있는 범종각(梵鐘閣)과 그 아래쪽으로 초라한 모습을 하고 있는 가운루를 비교해봐도 그렇다.

그 오랜 세월 동안 고운사의 얼굴 과도 같은 역할을 해온 가운루의 모습이 이제는 안쓰럽다 못해 가엾어 보 이기까지 한다. 모름지기 대웅전 앞에는 종각이 있어야 그래도 사찰다운 보편타당한 갖춤새를 지니는 것으로 착각했는지는 몰라도 바로 그 보편성 추구 때문에 고운사다운 독특한 개성과 멋이 모두 사라질 수도 있다는 사 실을 왜 몰랐다는 말이던가.

더구나 가운루는 그 원래 세운 뜻이야 어떻든 알고보면 본래부터 서쪽이 허결(虛缺)한 고운사 터를 비보(裨補)해 주는 역할도 겸하고 있는 누각이다. 극락전의 인공 안대(案對)를 이루고 있는 우화루(羽化樓)의 이름이 도교적인 색채가 짙어 실내에 우화루(雨花樓: 하 늘에서 천녀들이 부처님에게 내린다는 꽃비)라는 현판을 하나 더 걸어놓은 것처럼 가운(駕雲)이라는 이름 또한 도교적이어서 그 누각을 그토록 소홀 히 관리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했다면 그 두 건물을 세운 고운 최치원 선생 의 아호를 딴 고운사(孤雲寺)라는 절이름도 이 참에 아예 고운사(高雲寺) 로 환원, 확정짓는 것이 더 바람직하지 않겠는가.

고운사터의 역사성을 희석시키고 있는 일은 비단 그뿐만이 아니다. 연꽃 이 반개했든 아니면 만개했든 간에 예로부터 그런 지세에서는 무거운 돌을 과도하게 사용하는 것을 금기시하거늘 새 대웅전을 지으면서 마치 일부러 라도 그렇게 하기 힘든데 돌계단을 놓은 바윗돌들이 하나같이 큼지막하기 그지없다.

그런데 정작 더욱 문제되는 것은 옮겨놓은 옛 대웅전(현재는 나 한전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전각)을 향해 돌계단을 딛고 올라가다가 만 나는 기슭 위에 있는 한 기의 3층석탑이다. 무엇 때문에 굳이 그곳에 석탑 을 세워 놓았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된다. 고운사 사적기에 이 나라 풍수의 비조(鼻祖)인 선각국사 도선(道詵)이 그 절터에 석조의 약사여래와 5층석 탑을 조성했다는 기록이 나오기는 하지만 지금에 와서 그 기록의 진위 여 부를 확인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물론 도선이 주장했던 큰 풍 수이론이 지기쇠왕설(地氣衰旺說)과 음양비보설(陰陽裨補說)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비록 그가 직접 석탑을 조성하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그의 비보법 만은 후대에서 충분히 원용될 기회가 있었다고 볼 수는 있다. 문제는 그 석탑이 과연 고운사 경내에서도 어느 위치에 놓였던가 하는 것인데 필자의 생각으로는 그 장소가 지금의 새 대웅전 앞마당 합수머리 부근이 틀림없어 보인다. 무릇 꽃 형상의 지세에서는 꽃술(혹은 자방)을 갖추어야 제격인즉, 아마도 부용반개형의 고운사터에 꽃술이 없는 점을 감안하여 그에 상응 하는 인공 비보석탑을 화심(花心)에 해당하는 위치에 세움으로써 완전한 길국(吉局)을 도모하려 하지 않았던가 짐작되어지는 것이다.

고운사는 원 래부터 부용반개형이라는 특수한 풍수 형국을 배경으로 터잡은 절이다. 그 런 절터에 여느 가람과 똑같은 공간구조물들을 배치하고 꾸민다는 것은 한 마디로 오랜 세월 동안 지켜져 내려온 그 독특한 장소성과 공간성을 포기 하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미 훼손된 경관은 어찌할 수 없다손 치더라 도 지금이라도 비보석탑만은 제 위치를 올바르게 찾아 놓았으면 하는 바람 이다. 그 일이 곧 그 터를 물려받아 이용하고 있는 후손으로서 마땅히 해 야 할 도리라고 여겨지는 까닭이다.
<풍수학자.지리학박사>


▣ 김태서 -
▣ 김재익 - 사촌 뒷뫼 넘어 장재를 넘어가면 고운사가 십리 길이건만 , 요즈음 누가 산을 걸어서 넘어 가는이가 없구나 ,조금 돌아서 가면 포장 길인데 ,..어릴적 산넘어 즐겨다니던 그길이 그리워지내 ! *그 옛날 고운 최치원 선생이 내가 넘어 다니든 이 길을 걸어 넘었을 것이다.
▣ 김항용 -
▣ 김은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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