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백범일지(51) 3.1웅동의 상해 1. 경무국장 당시의 사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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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6-08-16 11:20 조회1,502회 댓글0건본문
3.1 운동의 상해 - 1. 경무국장 당시의 사건들
기미년 3월, 안동현에서 영국 사람 솔지의 배를 타고 상해에 온 나는 김보연 군을 앞세우고 이동녕 선생을 찾았다. 서울 양기탁 사랑에서 서간도 무관 학교 의논을 하고 헤어지고는 10여 년만에 서로 만나는 것이었다. 그 때에 광복 사업을 준비할 전권의 임무를 맡던 선생의 좋은 신수는 10여 년 고생에 약간 쇠하여 얼굴에 주름살이 보였다. 서로 악수하니 감개가 무량하였다.
내가 상해에 갔을 때에는 먼저 와 있던 인사들이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을 조직하여 김규식(金奎植)을 파리 평화 회의에 대한민국 대표로 파견한 지 벌써 두 달이나 후였다.
3.1 운동이 일어난 뒤에 각지로부터 모여온 인사들이 임시 정부와 임시 의정원을 조직하여 중외에 선포한 것이 4월 초순이었다.
이에 탄생된 대한 민국 임시 정부의 수반은 국무총리 이승만 박사, 그 밑에 내무, 외무, 재무, 법무, 교통 등 부서가 있어 광복 운동의 여러 선배 수령을 그 총장에 추대하였다.
총장들이 원지(遠地)에 있어서 취임치 못하므로 청년들을 차장으로 임명하여 총장을 대리케 하였다. 내가 내무총장 안창호 선생에게 문 파수를 청원한 것이 이때였다.
나는 문 파수를 청원한 것이 경무국장으로 취임하게 되니 이후 5년간 심문관 판사·검사의 직무와 사형 집행까지 혼자 겸하여서 하게 되었다. 왜 그런고 하면, 그 때에 범죄자의 처벌은 설유 방송(說諭放送 : 잘 타일러 내보냄 - 편집자 주*) 아니면 사형이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김도순(金道淳)이라는 17세의 소년이 본국에 특파되었던 임시 정부 특파원의 뒤를 따라 상해에 와서 왜 영사관에 매수되어 그 특파원을 잡는 앞잡이가 되려고 돈 10원을 받은 죄로 미성년자임에도 불구하고 극형에 처한 것은 기성 국가에서 보지 못할 일이었다.
내가 맡은 경무국의 임무는 기성 국가에서 하는 보통 경찰 행정이 아니요, 왜의 정탐의 활동을 방지하고 독립 운동자가 왜에게 투항하는 것을 감시하며, 왜의 마수가 어느 방면으로 들어오는가를 감시하는 데 있다. 이 일을 하기 위하여 나는 정보과 사복의 경호원(警護員) 20여 명을 썼다. 이로써 홍구의 왜 영사관과 대립하여 암투하는 것이다.
당시 프랑스 조계 당국은 우리의 국정을 잘 알므로 일본 영사관에서 우리 동포의 체포를 요구해온 때에는 미리 우리에게 알려주어서 피하게 한 뒤에 일본 경관을 대동하고 빈 집을 수사할 뿐이었다.
왜구 전중의일(田中義一)이 상해에 왔을 때에 황포마두(黃浦碼頭)에서 오성륜(吳成倫)이 그에게 폭탄을 던졌으나 폭발되지 아니하므로 권총을 쏜 것은 전중은 아니 맞고 미국인 여자 한 명이 맞아 죽은 사건이 났을 때에 일본, 영국, 법국(法國 : 프랑스를 말함 - 편집자 주*)세 나라가 합작하여 법조계의 한인을 대거 수색한 일이 있었다.
우리 집에는 어머님이 본국으로부터 상해에 오신 때였다. 하루는 이른 새벽에 왜 경관 일곱 놈이 프랑스 경관 서대납(西大納)을 앞세우고 내 침실에 들어섰다. 서대납은 나와 잘 아는 자라 나를 보더니 옷을 입고 따라오라 하여 왜 경관이 나를 결박하려는 것을 금하였다.
프랑스 경무청에 가니 원세훈(元世勳) 등 다섯 사람이 벌써 잡혀와 있었다. 프랑스 당국은 왜 경관이 우리를 심문하는 것도 허락치 아니하고 왜 영사관으로 넘기라는 것도 아니 듣고 나로 하여금 다섯 사람을 담보케 한 후에 나 아울러 모두 석방해 버렸다.
우리 동포 관계의 일에는 내가 임시 정부를 대표하여 언제나 배심관이 되어 프랑스 조계의 법정에 출석하였으므로 현행범이 아닌 이상 내가 담보하면 석방하는 것이었다. 왜 경찰이 나와 프랑스 당국과의 관계를 안 뒤로는 다시는 내 체포를 프랑스 당국에 요구하는 일이 없고, 나를 법조계 밖으로 유인해내려는 수단을 쓰므로 나는 한 걸음도 조계 밖에를 나가지 아니하였다.
내가 5년간 경무국장을 하는 동안에 생긴 기이한 일을 일일이 적을 수도 없고, 또 이루 다 기억도 못하거니와 그 중에 몇 가지만을 말하련다.
고등 정탐 선우 갑(鮮于甲)을 잡았을 때에 그는 죽을 죄를 깨닫고 사형을 자원하기로 장공속죄(將功贖罪 : 장차 공을 세워 죄를 갚음 - 편집자 주*)를 할 서약을 받고 살려 주었더니 나흘 만에 도망하여 본국으로 들어갔다.
강인우(康麟佑)는 왜 경부로 상해에 와서 총독부에서 받아 가지고 온 사명을 말하고 내게 거짓 보고 자료를 달라 하기로 그리하였더니 본국에 돌아가서 그 공으로 풍산 군수가 되었다.
구 한국 내무대신 동농(東農) 김가진(金嘉鎭) 선생이 3.1 선언 후에 왜에게 받았던 남작을 버리고 대동당(大同黨)을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아들 의한(懿漢) 군을 데리고 상해에 왔을 적 일이다. 왜는 남작이 독립 운동에 참가하였다는 것이 수치라 하여 의한의 처의 종형 정필화를 보내어 동농 선생을 귀국케 할 운동을 하고 있음을 탐지하고 정 가를 검거하여 심문한즉 낱낱이 자백하므로 처교하였다.
황학선(黃鶴善)은 해주 사람으로 3.1운동 이전에 상해에 온 자인데 가장 우리 운동에 열심히 있는 듯하기로 타처에 오는 지사들을 그 집에 유숙케 하였더니 그 자가 이것을 기호로 하여 일변 왜 영사관과 통하여 거기서 돈을 얻어 쓰고 일변 애국 청년에게 임시 정부를 악선전하거나 나창헌(羅昌憲), 김의한 등 십수 명이 작당하여 임시정부를 습격한 일이 있었으나 이것은 곧 진압되고 범인은 전부 경무국의 손에 체포되었다가 그들이 황학선의 모략에 속은 것이 분명하므로 모두 설유하여 방송하고 그 때에 중상한 나창헌, 김기제는 입원시켜 치료를 받게 하였다.
이 사건을 조사한 결과 황학선이가 왜 영사관에서 자금과 지령을 받아 우리 정부 각 총장과 경무국장을 살해할 계획으로 나창헌이 경성 의전의 학생이던 것을 이용하여 3층 양옥을 세를 내어 병원 간판을 붙이고, 총장들과 나를 그리로 유인하여 살해할 계획이던 것이 판명되었다.
나는 이 문초의 기록을 나창헌에게 보였더니 그는 펄펄 뛰며 속은 것을 자백하고 장인 황학선을 사형에 처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 때는 벌써 황학선은 처교(處絞 : 교수형에 처함 - 편집자 주*)된 뒤였다. 나는 나, 김 등이 전연 악의가 없고 황의 모략에 속은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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