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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의 올바른 직함에 대한 의견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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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6-08-18 10:50 조회1,63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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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저는 제 5회 안사연 여름캠프시 참배하는 숭의전의 충렬공 선조님에 대한 제례에 사용할 제문을 짓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기회에 다시 한번 충렬공 선조님의 공식 직함을 공람을 통하여 확정짓고 싶습니다. 대체적인 기록에는 첨의중찬이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숭의전에는 <僉議令 金方慶>이라 기록되어 있는데 <첨의령>은 첨의부의 최고 관직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충렬공께서 치사 후에 첨의령에 가자(加資)되었다는 기록도 있어 이에 대한 공식 직함 정리의 필요성이 있다고 봅니다. 여러분의 의견을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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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홈 게시판 자료를 종합하면 

1. 문하 시중 (1273-1275). (충렬공 62세) 1273년 원종14


○그리고 드디어 탐라를 평정한 공을 논하여, 김방경을 시중(侍中)으로, 변윤을 판추밀원사로, 김석(金錫)을 상장군 지어사대사로, 나유ㆍ송보연을 함께 대장군으로 삼았다.


(63세) 1274년 원종15 (충렬왕원년)

1274년 금년 정월 3일에 귀국 조정의 지시를 받고(원나라 총관 찰홀을 보내어) 즉시 큰 배 300척을 만들도록 조치를 취하여 추밀원 부사 허공을 전주도 변산에, 좌복사 홍록주를 나주도 천관산에 파견하여 재목을 준비하게 하였다. 또 시중 김방경을 도독사로 임명하고, 그가 관할하는 관원과 장령들도 모두 우수한 인재들로 뽑았으며, 필요한 인부와 장인, 자재들도 모두 국내 각지에 사람을 파견하여 재촉·보장하도록 하였다.


(64세) 1275년 충렬왕1

<4차 入元> ○봄 정월 경진일에 문하시중 김방경(金方慶)과 대장군 인공수(印公秀)를 원나라에 파견하여 역적 토벌, 군량 공급, 전함 건조, 일본 정벌 등으로 인한 고려의 궁핍한 사정을 호소하였다.


○ 3월 신묘일에 왕과 공주가 북산(北山) 낙산사(洛山寺)에 갔다. 문하시중 김방경이 원나라로부터 돌아왔다.

2. 첨의중찬 (1275-1283)

<1275년 관제개편>

원나라의 간섭은 직접 행정에도 미쳐 관제가 분수에 넘친다고 고치기를 강요하여 1275년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을 합쳐 첨의부(僉議府)로, 추밀원(樞密院)은 밀직사(密直司)로, 어사대(御史臺)는 감찰사(監察司)로 고치고 육부(六部)도 폐합, 변경하여 전리사(典理司)·군부사(軍簿司)·판도사(版圖司)·전법사(典法司)로 하였다.


(65세) 1276년 충렬왕2

○ 가을 7월 ----- 중찬 김방경, 직사관 문련(文璉)을 원나라에 파견하여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였다.


○ 13년(☞원 세조 지원, 고려 충렬왕 2년, 1276년) 7월에 심(?)이 그들의 첨의중찬 김방경(金方慶)을 보내 표를 받들어 올리며 송나라를 평정한 것을 하례하였다. <元史 卷二百八 列傳 第九十五 外夷一 高麗-58/41]>


(67세) 1278년 충렬왕4

○ 겨울 10월 계축일에 김방경을 첨의(僉議) 중찬(中贊) 상장군(上將軍) 판 감찰사사(判監察司事)로 임명하고 은 10근을 주었다.


(69세) 1280세 충렬왕6

○ 첨의중찬 김방경이 글을 올려 시작하기를 청하니, 좋은 말로 타이르며 허락하지 않았다.  겨울 10월에 왕이 마제산(馬堤山)에서 사냥하였다.


3. (도)첨의령 (1295-)

(84세) 1295년 충렬왕21

○ 봄 정월에 홍자번(洪子藩)을 첨의령(僉議令)으로, 조인규(趙仁規)를 첨의중찬으로 삼고, 중찬으로 치사한 김방경(金方慶)에게 첨의령을 가자하였다.

▣《고려사》 제76권 - 지 제30 > 백관 1 >

판문하(判門下). 건국 초기에는 내의령(內議令)이라고 부르던 것을 성종 때에 내사령(內史令)으로 고쳤고 문종 때에 와서는 중서령(中書令)으로 고치고 그 정원을 1명으로, 그 품계를 종 1품으로 정하였다.


충렬왕 원년에 폐지하였다가 21년에 도첨의령(都僉議令)을 두고 김방경(金方慶)을 이 관직에 임명하였다. 얼마 후 원나라의 중서령(中書令)과 유사하다 하여 판도첨의사사사(判都僉議使司事)로 고쳤으며 그 후에 영도첨의(領都僉議)로 고쳤다.

 *첨의부 : 1275(충렬1)년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을 합친 관청. 1293(충렬19)년 도첨의사사로 개칭. 1295(충렬21)년 다시 도첨의령을 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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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기로 볼 때 고려 최고관직명으로서 문하시중, 첨의중찬, 첨의령 등의 기록이 나오는데 이는 관청과 관직명의 개칭에 따라 나타난 것으로 보입니다. 즉 충렬공의 관직명인 첨의중찬과 첨의령은 다 같이 고려조 중기의 최고 관직명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충렬공께서 가장 오랜 기간 사용해 온 첨의중찬을 사용하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이에 다음과 같이 충렬공의 직함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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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 선충협모 정난정국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 행 삼한 벽상 추충 정난정원공신 광정대부 삼중대광 첨의중찬 상장군 판전리사사 세자사, 상락군 개국공, 시호 충렬(贈宣忠協謀 靖難定國功臣 壁上三韓 三重大匡  行 三韓壁上推忠靖難定遠功臣匡靖大夫 三重大匡 僉議中贊 上將軍 判典理司事 世子師, 上洛郡 開國公, 諡號 忠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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