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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의전에 관한 기록들- 연려실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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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6-08-18 12:21 조회1,674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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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숭의전(崇義殿)은 경기도 마전군(麻田郡)의 서쪽 5리 되는 곳에 있으며, 고려의 태조ㆍ현종(顯宗)ㆍ문종(文宗)ㆍ원종(元宗)을 향사하였다. 처음에 고려 태조의 어진(御眞)이 마전 앙암사(仰岩寺)에 있었으므로 그곳에 사당을 세운 것이다.
○ 태조(이성계) 임신년에 명하여 전조 태조(太祖 고려 태조)의 신주를 마전군에 옮겨 봉안하고 때에 따라 제사하였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고려조의 혜왕(惠王)ㆍ현왕(顯王)ㆍ충경왕(忠敬王 원종)ㆍ충렬왕(忠烈王)은 모두 백성에게 공로가 있으니, 마전에 있는 태조의 사당에 부제(祔祭)하기를 청하나이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고려조의 성왕(成王)은 중국을 사모하여 문물을 일으켜서 백성이 그 혜택을 받았으며, 문왕(文王)은 근신(謹愼)하게 부조(父祖)의 업을 지켜 세상을 태평하게 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였으며, 공민왕(恭愍王)은 홍건적(紅巾賊)을 두 번 섬멸하여 삼한(三韓)을 다시 중흥케 하고 상국(上國 중국)을 잘 섬겨 한 나라를 편안하게 하였사오니, 모두 우리나라에 공로가 있었습니다. 또한 태조묘(太祖廟)에 부제하기를 청하나이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좇았다. 《동각잡기》


6년 정축에 마전군의 귀의군(歸義君) 왕우(王瑀)를 치제(致祭)하는 글에, “온 세상의 백성에게 공이 있는 자는 마땅히 만세에 무궁한 제사를 누리나니, 경의 선대에서 비로소 삼한을 통일하고 5백 년 동안 문물 제도를 드리웠으니 백성에게 미친 공덕이 깊도다. 마땅히 그 세대를 영원히 전하여 무궁한 제사를 누려야 할 것이나, 흥폐와 존망은 천도(天道)의 상리인지라, 쇠퇴한 말세에 이르러 정치는 잔폐하고 백성은 원망하여 선세(先世)의 종묘 제사가 끊어지게 되었다. 내가 덕이 없는 몸으로 하늘의 은총을 입어 혁명의 첫머리에 이에 고전(古典)을 상고하여, 경이 능히 선대의 어진 것을 닮았으므로 작위와 식읍(食邑)을 봉하여 선대의 제사를 이어 받들게 한 것은 실로 옛 3대의 예(禮)를 좇은 것이다. 경이 바야흐로 장차 선대의 예물을 닦아서 정성스러이 삼가고 능히 효도하여 나라와 함께 즐거움을 같이하려 하였더니, 몇 해가 되지 않아 하늘이 빼앗아 갔으니 아아, 슬프다. 부음을 들은 이후로 지극히 애석한 마음 유달리 깊어서, 이에 유사에게 명하여 예로써 장사하게 하고 영구(靈柩) 앞에 전(奠)을 드리게 하니, 경의 영(靈)이 어둡지 않거든 나의 지극한 회포를 살펴주오.” 하였다. 그리고 곧 그 아들 상장군 조(珇)로서 귀의군(歸義君)에 습봉(襲封)하여 왕씨의 제사를 받들게 하고, 그 도(道)의 관찰사에게 명하여 가까운 고을의 인부를 징발하여 고려 태조 신성왕묘(高麗太祖神聖王廟)를 마전에 세웠다. 《국조보감》


세종 7년에 유사가 말하기를, “국가의 종묘에서 제사 받드는 것은 다만 5실(室)인데, 전조(고려)의 사당에는 8위(位)를 지내니 예에 합당하지 아니하다.” 하여, 이에 다만 태조ㆍ현종ㆍ문종ㆍ원종만 남겨두고 춘추 이중삭(二仲朔 음력 2월과 8월)에 향과 축문을 보내 제사하게 하였다.
12년에 전교하기를, “고려의 임금으로 공덕이 있는 자는 이미 제사를 받들게 했으나, 능(陵)이 무너진 곳을 개수하지 아니한 것은 차마 그대로 둘 수 없는 바이니, 능이 있는 곳은 마땅히 소재지의 관리로 하여금 땔나무를 베는 일을 금지하고 때때로 수축하고 보호하게 하라.” 하였다.
문종 원년에 숭의전에 편액을 하사하고, 고려 현종의 원손을 공주(公州)에서 찾아내어, 순례(循禮)라는 이름을 주어 부사(副使)로 삼고 전답과 노비를 하사하였으며, 마전현(麻田縣)을 승격시켜 마전군으로 하고, 교관(敎官)을 두어 왕씨의 자손을 가르치게 하며, 고려의 명신으로서 공덕이 있는 자를 택하여 사당(숭의전)에 배향하였다. 문종의 하교는 문종조 고사에 들어 있다.
문종이 숭의전을 짓고 사람들을 시켜 왕씨의 후손을 찾았으나 찾지 못하였다. 왕순례(王循禮)라는 자가 성명을 바꾸고 평민 행세를 하는 자가 있었는데, 마침 이웃 사람과 밭을 갈다가 밭 이랑을 다투던 끝에 그 사람이 관에 고하게 되었다. 임금이 곧 명하여 문과에 급제시켜 특히 3품에 올려 숭의전사(崇義殿使)로 삼아 왕건 태조의 제사를 주관하게 하였다. 《추강냉화(秋江冷話)》 《후청쇄어(侯鯖瑣語)》에는 명종조에 지었다 하였으나 그릇된 것이다.
숭의전의 배향 문종이 명하여 배향하였다.

태사 개국(太師開國) 무공공(武恭公) 복지겸(卜智謙)
태사 개국 장절공(壯節公) 신숭겸(申崇謙)
태사 개국 충렬공(忠烈公) 홍유(洪儒)
태사 문하시중(門下侍中)인헌공(仁憲公) 강감찬(姜邯贊)
태사 개국 무열공(武烈公) 배현경(裴玄慶)
태사 내사령(內史令)장위공(章威公) 서희(徐熙)
태사 개국 충절공(忠節公) 유금필(庾黔弼)
수 태보(守太保) 문하시중문숙공(文肅公) 윤관(尹瓘)
문하시중문열공(文烈公) 김부식(金富軾)
문하시중위열공(威烈公) 김취려(金就礪)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문정공(文正公) 조충(趙冲)
첨의령(僉議令)충렬공(忠烈公) 김방경(金方慶)
정당문학(正堂文學)김득배(金得培)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이방실(李芳實)
중서평장사(中書平章事)안우(安祐)
수 문하시중(守門下侍中)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

세조가 일찍이 강녕전(康寧殿)에 임어하고 명하여 숭의전부사왕순례를 입시하게 하여 어찬(御饌)을 내리고, 신숙주(申叔舟)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내가 그대에게 사사로운 은혜를 베푸는 것이 아니다. 세종께서 왕씨의 뒤를 세우려고 하셨으나 성취하지 못하셨고, 태종(문종)이 비로소 숭의전을 세우셔서 그 제사를 잇게 하셨으니, 이제 나는 선세(先世)의 뜻을 받들어 이은 것이다.” 하였다.
중종 7년에 관리를 보내 소뢰(小牢 염소나 돼지를 제물로 하는 제사)로써 숭의전에 제사 지냈다.
왕태조(王太祖)의 화상(畫像)이 처음에는 문경(聞慶)의 양산사(陽山寺 봉암사(鳳巖寺)의 속칭)에 있었는데, 신우(辛禑 우왕(禑王)) 5년에 왜변(倭變)으로 말미암아 풍기(豐基)용천사(龍泉寺)로 옮겨 모셨다가, 선조(宣祖) 병자년에 그 해당 관아에 명하여 의장(儀仗)을 갖추어서 숭의전으로 옮겨 모셨다. 《후청쇄어》


선조 을사년에 경기 감사 이정귀(李廷龜)가 숭의전을 중수한 후, 청하여 나라에서 향과 축문을 보내 제사지내고, 명하여 왕씨의 후손 왕곤(王鵾)을 전감(殿監)으로 삼았다.
숭의전은 마전의 강 언덕에 있는데, 왕태조가 궁예에게서 벼슬할 때, 송경(松京)을 왕래하며 쉬던 곳으로서, 아마도 태조의 고택(故宅)이었던 관계로 인하여 ‘숭의전’이라 한 것 같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제사지낼 고기를 몰래 베어 가지고 간 일이 있었는데, 그날 밤에 제관(祭官)의 꿈에 세 왕이 전상(殿上)에 나란히 앉아서 화를 내며 고기 도둑질한 자를 끌어다가 목베는 것을 보았다. 다음날 아침에 그 사람을 조사하였더니, 그 사람이 즉시 자수하여 응분의 죄를 받았으며, 또 숭의전 안에 두었던 유장(帷帳 휘장과 장막)과 기구를 몰래 훔쳐서 지고 나오던 자가 문까지 미처 이르기 전에 팔과 다리가 묶인 것 같아서 한 걸음도 옮기지 못하고 드디어 잡힌 사실이 있었다. 이러한 일이 있었으므로 고을 아전들이 엄숙히 존경하는 마음으로 제사를 지내고 감히 조금도 게을리하지 못하였다. 《지봉유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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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회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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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안녕하세요?
은회 입니다.
뜻깊고 알찬 행사임에도 참석치 못해 송구스럽습니다.
즐겁고 유익한 행사 되시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