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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방경 묘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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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1-06-26 21:56 조회2,64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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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렬공 김방경 할아버지의 예장문제와 관련된 기록중에 (고려사 등)



"충직하고 근검했으나 부하 장병들의 민폐를 막지 못한 것과 일본정벌 후의 불공평한 논공행상등으로 상, 하의 인심을 잃어 사후 예장 (禮葬 : 종친·공신·종1품 이상의 문·무신이 죽으면 나라에서 예를 갖추어 장사지내준 일, 종1품 이상의 관원은 禮葬 贈諡한다) 을 치르지 못하고 안동에서 장례를 지냈다고 한다." 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와는 다르게 분석한 석사학위 논문이 있어 그 내용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 [고려후기 김방경의 정치활동과 그 성격] (유선영, 1993, 전남대학교 대학원) 에는 다음과 같이 분석하고 있습니다.



1283년(충렬왕9) 72세의 나이로 물러나고 말았다. 이후 왕이 김방경에게 자문을 구하기도 하고, 또 집으로 거처를 옮기기도 했고, 또 1295년(충렬왕21) 그가 첨의령,상락군 개국공으로 봉해지고 세자(충선왕)의 청으로 식읍 3천호, 식실봉 3백호가 하사되었다. 1299년 조비무고사건 때는 궁궐에 나아가 조비를 옹호하는 등 개입을 했고, 퇴임 후에도 항상 나라 일을 걱정했다" 고 한 것처럼 그는 치사한 후에도 일정하게 정사에 간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시기는 충렬왕과 충선왕의 왕위분쟁으로 조정이 충렬왕파와 충선왕파로 나뉘어 극심하게 대립하던 때였다. 이때 그는 조비를 변호하는 등 충렬왕에 대립하여 충선왕의 편에 섰던 것으로 보인다. 1300년(충렬왕26) 89세로 그가 죽었을 때 그의 장례가 예장으로 치러지지 못했던 것은 그나 그의 아들 흔이 충선왕에 협조하므로써 충렬왕의 미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 정리해 보면



1298년 충선왕이 즉위하여 개혁정치를 펴다가 원의 간섭 및 충렬왕파에 의하여 8개월만에 밀려나 원으로 가고 출렬왕이 복위하는등 왕위분쟁 과정에서 충렬왕(재위 1274-1308)과 충선왕(재위 1298, 1308-1313)의 사이에서 김방경과 그의 둘째아들 김흔이 충선왕의 편에 섬으로써 1300년(충렬왕26, 89세) 출렬공이 돌아가시자 당시 권세를 잡고있던 충렬왕과 그의 측근들의 반대에 의해서 예장을 치르지 못한 것이다.



충렬공 사후 7년이 지나서 충렬왕이 이 일을 후회하고 1307년(충렬왕33) 선충협모정난정국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을 추증하고, 시호를 충렬이라 하고, 왕명으로 신도비를 세웠다. (충렬왕이 죽기 한해전인 1307년에는 충렬왕이 사냥에만 몰두하는등 정사를 방치하고, 충선왕의 절친한 벗이자 후원자인 원의 무종이 즉위하자 이미 모든 권한이 충선왕에게 돌아간 상태이므로 실제로는 충선왕에 의해서 이루어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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