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백범일지 (52) 3.1운동의 상해 2. 임시정부의 온갖 사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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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6-08-21 12:46 조회1,704회 댓글0건본문
2. 임시정부의 온갖 사건들
한 번은 박 모라는 청년이 경무국장 면회를 청하기로 만났다. 그는 나를 대하자 곧 낙루(落淚)하며 단총 한 자루와 수첩 하나를 내 앞에 내어 놓으며, 자기는 수일 전에 본국으로부터 상해에 왔는데 왜 영사관에서 그의 체격이 건장함을 보고, 김 구를 죽이라 하고 성공하면 돈도 많이 주려니와 설사 실패하여 그가 죽는 경우에는 그의 가족에게는 나라에서 좋은 토지를 주어 편안히 살도록 할 터이라 하고,
만일 이에 응치 아니하면 그를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엄벌한다 하기로 부득이 그러마 하고 무기를 품고 법조계에 들어와 길에서 나를 보기도 하였으나, 독립을 위하여 애쓰는 사람을 자기도 대한 사람이면서 어찌 감히 상하랴 하는 마음이 생겨서 그 단총과 수첩을 내게 바치고 자기는 먼 지방으로 달아나서 장사나 하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말을 믿고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놓아 보냈었다.
나는 '의심하는 사람이어든 쓰지를 말고, 쓰는 사람이어든 의심을 말라'는 것을 신조로 하여 살아 왔거니와 그 때문에 실패한 일도 없지 아니하였으니 한태규(韓泰圭) 사건이 그 예다.
한태규는 평양 사람으로서 매우 근실하여 내가 7,8년을 부리는 동안에 내외국인의 신임을 얻었었다. 내가 경무국장을 사면한 후에도 그는 여전히 경무국 일을 보고 있었다.
하루는 계원(桂園) 노백린(盧伯麟) 형이 아침 일찍 내 집에 와서 뒤 노변에 한복 입은 젊은 여자의 시체가 있다 하기로 나가 본즉 그것은 명주(明珠)의 시체였다.
명주는 상해에 온 후로 정인과(鄭仁果), 황석남(黃錫南)이 빌어 가지고 있는 집에 식모로도 있었고, 젊은 사내들과 추행도 있다는 소문이 있던 여자다. 어느 날 밤에 한 번 한태규가 이 여자를 동반하여 가는 것을 보고 한 군도 젊은 사람이니 그런가보다 하고 지나친 것이 얼마 오래지 아니한 것이 기억되었다.
시체를 검사하니 피살이 분명하다. 머리에 피가 묻었으니 처음에는 때린 모양이요, 목에는 바로 매었던 자국이 있는데, 그 수법이 내가 서대문 감옥에서 활빈당 김 진사에게 배운 것을 경호원들에게 가르쳐 준 그것이었다. 여기서 단서를 얻어 가지고 조사한 결과 그 범인이 한태규인 것이 판명되어 프랑스 경찰에 말하여 그를 체포케 하여 내가 배심관으로 그의 문초를 듣건대 그는 내가 경무국장을 사직한 후로부터 여러 가지 사정으로 왜에게 매수되어 그 밀정이 되어 명주와 비밀히 통기하던 중, 명주가 한이 밀정인 것을 눈치를 알게 되매 한은 명주가 자기의 일을 내게 밀고할 것을 겁내어서 죽인 것이라는 것을 자백하였다.
명주는 행실이 부정할망정 애국심은 열렬한 여자였다. 그는 종신 징역의 형을 받았다. 후에 나와 동관(同官)이던 나 우(羅愚)도 한태규가 돈을 흔히 쓰는 것으로 보아 오래 의심은 하였으나 확적한 증거도 없이 내게 그런 말을 고하면 내가 동지를 의심한다고 책망할 것을 두려워하여 말을 아니하고 있었다고 하였다.
후에 한태규는 다른 죄수들을 선동하여 양력 1월 1일에 옥을 깨뜨리고 도망하기로 약속을 하여 놓고 제가 도리어 감옥 당국에 밀고하여 간수들이 담총하고 경비하게 한 후에 약속한 시간이 되매 여러 감방문이 일제히 열리며 칼, 몽둥이, 돌멩이, 재 같은 것을 가지고 죄수들이 뛰어나오는 것을 한태규가 총을 놓아 죄수 여덟 명을 즉사케 하니 다른 죄수들은 겁을 내어 움직이지 못하매 파옥 소동이 진정되었다.
그리고 이 사건을 재판하는 마당에 한태규는 제가 쏘아 죽인 여덟 명의 시체를 담은 관머리에 증인으로 출정하더란 말을 들었고, 또 그 후에 한의 편지를 받았는데 그는 같은 죄수 여덟 명을 죽인 것이 큰 공로라 하여 방면이 되었고, 전에 잘못한 것은 다 회개하니 다시 써 달라고 하였다. 나중에 듣건대 이 편지에 대한 내 회답이 없는 것을 보고 겁이 나서 본국으로 도망하여 무슨 조그마한 장사를 하고 있다고 하였다. 내가 이런 흉악한 놈을 절대로 신임한 것이 다시 세상에 머리를 들 수 없을 만큼 부끄러워서 심히 고민하였다.
내가 경무국장이던 때에 있었던 일은 이만큼 말하고 상해에 임시 정부가 생긴 이후에 일어난 우리 운동 전체의 파란곡절을 회상해 보기로 하자.
기미년, 즉 대한민국 원년(元年)에는 국내나 국외를 물론하고 정신이 일치하여 민족 독립 운동으로만 진전되었으나 당시 세계 사조(世界思潮)의 영향을 따라서 우리 중에도 점차로 봉건이니, 무산 혁명이니 하는 말을 하는 자가 생겨서 단순하던 우리 운동선에도 사상의 분열·대립이 생기게 되었다.
임시정부 직원 중에도 민족주의니 공산주의니 하여 음으로 양으로 투쟁이 개시되었다. 심지어 국무총리 이동휘가 공산 혁명을 부르짖고, 이에 대하여 대통령 이승만은 데모크라시를 주장하여 국무회의 석상에서도 의견이 일치하지 못하고 대립과 충돌을 보는 기괴한 현상이 층생첩출(層生疊出 : 무슨 일이 자꾸 겹쳐 일어남 - 편집자 주*)하였다.
예하면 국무회의서는 러시아에 보내는 대표로 여운형, 안공근, 한형권(韓亨權) 세 사람을 임명하였건마는, 정작 여비가 손에 들어오매 이동휘는 제 심복인 한형권 한 사람만을 몰래 떠나 보내고 한이 시베리아를 지났을 때쯤 하여서 이것을 발표하였다.
이동휘는 본래 강화 진위대 참령(江華鎭衛隊參領)으로서 군대 해산 후에 해삼위(海蔘威) - 블라디보스톡 -로 건너가 이름을 대자유(大自由)라고 행세한 일도 있다.
하루는 이동휘가 내게 공원에 산보 가기를 청하기로 따라갔더니 조용한 말로 자기를 도와달라 하기로, 나는 좀 불쾌하여서 내가 경무국장으로 국무총리를 호위하는데 내 직책에 무슨 불찰이 있느냐고 물었다. 이 씨는 손을 흔들며, 그런 것이 아니라 대저 혁명(革命)이라는 것은 피를 흘리는 사업인데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독립 운동은 민주주의 혁명에 불과하니 이대로 독립을 하더라도 다시 공산주의 혁명을 하여야 하겠은즉, 두 번 피를 흘림이 우리 민족의 대불행이 아닌가, 그러니 적은 이 - 아우님이라는 뜻이니 이동휘가 수하 동지에게 즐겨 쓰는 말이다 - 도 나와 같이 공산 혁명을 하는 것이 어떤가 하고 내 의향을 묻는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나는 이 씨에게,
"우리가 공산 혁명을 하는 데는 제 3 국제공산당(國際共産黨 : 흔히 코민테른이라 부르는 제 3 인터내셔널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공산주의인터내셔널[Communist International]을 지칭하는 것으로, 1차 세계대전으로 제 2 인터내셔널이 와해된 후 레닌의 지도로 각국 노동운동의 좌파가 모여 1919년 모스크바에서 창립되었다 - 편집자 주*)의 지휘와 명령을 안 받고도 할 수 있습니까?"
하고 반문하였다.
이 씨는 고개를 흔들며,
"안되지요"
한다. 나는 강경한 어조로,
"우리 독립 운동은 우리 대한민국 독자의 운동이요, 어느 제3자의 지도나 명령에 지배되는 것은 남에게 의존하는 것이니 우리 임시 정부 헌장에 위반되오. 총리가 이런 말씀을 하심은 대불가(大不可)니 나는 선생의 지도를 받을 수 없고, 또 선생께 자중하시기를 권고하오"
하였더니 이동휘는 불만한 낯으로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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