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백범일지 (54) 3.1운동의 상해 4. 껍데기만 남은 임시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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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6-08-25 10:02 조회1,719회 댓글0건본문
4. 껍데기만 남은 임시 정부
국제 정세의 우리에게 대한 냉담, 일본의 압박 등으로 민족의 독립 사상이 날로 감쇄하던 중에 공산주의자의 교란으로 민족 전선은 분열에서 혼란으로, 혼란에서 궤멸로 굴러 떨어져갈 뿐이었는데 엎친 데 덮치기로 만주의 주인이라 할 장작림(張作霖)이 일본의 꾀에 넘어가서 그의 치하에 있는 독립 운동자를 닥치는 대로 잡아 일본에 넘기고 심지어는 중국 백성들이 한인의 머리를 베어 가지고 가서 왜 영사관에서 한 개에 많으면 10원, 적으면 3,4원의 상금을 받게 되고
나중에는 우리 동포 중에도 독립군의 소재를 밀고하는 일까지 생겼으니, 여기는 독립 운동자들이 통일이 없이 셋, 다섯으로 갈라져서 재물, 기타로 동포에게 귀찮음을 준 책임도 없지 아니하다. 이러하던 끝에 왜가 만주를 점령하여 소위 만주국이란 것을 만드니 우리 운동의 최대 근거지라 할 만주에 있어서의 우리 운동은 거의 불가능하게 되어 버렸다.
애초에 만주에 있던 독립 운동 단체는 다 임시 정부를 추대하였으나 차차로 군웅할거(群雄割據)의 폐풍이 생겨, 정의부와 신민부가 우선 임시 정부의 절제를 안 받게 되었다. 그러나 참의부만은 끝까지 임시 정부에 대한 의리를 지키더니 이 셋이 합하여 새로 정의부가 된 뒤에는 아주 임시 정부와는 관계를 끊고 자기들끼리도 사분오열하여 서로 제 살을 깎고 있다가 마침내 공산당으로 하여 서로 제 목숨을 끊는 비극을 연출하고 막을 내리고 말았으니, 진실로 슬픈 일이다.
상해의 정세도 소위 양패구상(兩覇俱傷-편집자 주*)으로 둘이 싸워 둘이 다 망한 셈이 되었다.
한국독립당 하나로 겨우 민족 진영의 껍데기를 유지할 뿐이었다.
임시정부에는 사람도 돈도 들어오지 아니하여 대통령 이승만이 물러나고 박은식(朴殷植)이 대신 대통령이 되었으나, 대통령제를 국무령제(國務領制)로 고쳐 놓을 뿐으로 나가고 제 1세 국무령으로 뽑힌 이상룡(李尙龍)은 서간도로부터 상해로 취임하러 왔으나 각원을 고르다가 지원자가 없어 도로 서간도로 물러가고, 다음에 홍면희(洪冕喜) - 나중에 홍진(洪震) - 가 선거되어 진강(鎭江)으로부터 상해에 와서 취임하였으나 역시 내각 조직에 실패하였다. 이리하여 임시정부는 한참 동안 무정부 상태에 빠져서 의정원에서 큰 문제가 되었다.
하루는 의정원 의장 이동녕 선생이 나를 찾아와서 내가 국무령이 되기를 권하였으나 나는 두 가지 이유로 사양하였다. 첫째 이유는 나는 해주 서촌의 일개 김 존위 - 경기도 지방의 영좌에 상당한 것 - 의 아들이니 우리 정부가 아무리 초창 시대의 추형에 불과하다 하더라도 나같이 미천한 사람이 일국의 원수가 된다는 것은 국가와 민족의 위신에 큰 관계가 있다는 것이요, 둘째로 말하면 이상룡, 홍면희 두 사람도 사람을 못 얻어서 내각 조직에 실패하였거늘 나같은 자에게 더욱 응할 인물이 없을 것이란 것이었다.
그런즉 이 씨 말이 첫째는 이유가 안 되는 것이니 말할 것 없고, 둘째로 말하면 나만 나서면 따라 나설 사람이 있다고 강권하므로 나는 승낙하였다. 이에 의정원의 정식 절차를 밟아서 내가 국무령으로 취임하였다.
나는 윤기섭(尹琦燮), 오영선(吳永善), 김 갑 김 철, 이규홍 등으로 내각을 조직하고 현재의 제도로는 내각을 조직하기가 번번히 곤란할 것을 통절히 깨달았으므로 한 사람에게 책임을 지우는 국무령제를 폐지하고 국무위원제(國務委員制)로 개정하여 의정원의 동의를 얻었다. 그래서 나는 국무 위원의 주석이 되었으나 제도로 말하면 주석은 다만 회의의 주석이 될 뿐이요, 모든 국무 위원은 권리에나 책임에나 평등이었다. 그리고 주석은 위원들이 번차례로 할 수 있는 것이므로 매우 편리하여 종래의 모든 분리를 일소할 수가 있었다.
이렇게 하여 정부는 자리가 잡혔으나 경제 곤란으로 정부의 이름을 유지할 길도 망연하였다. 정부의 집세가 30원, 심부름꾼 월급이 20원 미만이었으나 이것도 낼 힘이 없어서 집주인에게 여러 번 송사를 겪었다.
다른 위원들은 거의 다 가권(家眷 : 거느리는 가족들 - 편집자 주*)이 있었느나 나는 아이들 둘도 다 본국 어머님께로 돌려보낸 뒤라 홀몸이었다. 그래서 나는 임시 정부 정청에서 자고, 밥은 돈벌이 직업을 가진 동포의 집으로 이 집 저 접 돌아다니면서 얻어먹었다. 동포의 직업이라 하여 전차 회사의 차표 검사원인 인스펙터가 제일 많은 직업이어서 70명 가량 되었다.
나는 이들의 집으로 다니며 아침 저녁을 빌어먹는 것이니 거지 중에는 상거지였다. 다들 내 처지를 알므로 누구나 내게 미움 밥은 아니주었다고 믿는다. 특히 조봉길(曺奉吉), 이춘태(李春台), 나 우, 진희창(秦熙昌), 김의한 같은 이들은 절친한 동지들이니 더 말할 것 없고, 다른 동포들도 내게 진정으로 동정하였다.
엄항섭(嚴恒燮) 군은 프랑스 공무국(工務局)에서 받는 월급으로 석오(石吾) - 이동녕의 당호 - 나 나 같은 궁한 운동자를 먹여 살렸다. 그의 전실 임(林) 씨는 내가 그 집에 갔다가 나올 때면 대문 밖에 따라나와서 은전 한두 푼을 내 손에 쥐어주며,
"얘기 사탕이나 사 주셔요"
하였다. 아기라 함은 내 둘째 아들 신을 가리킨 것이다. 그는 초산에 딸 하나를 낳고 가엾이 세상을 떠나서 노가만(盧家彎) 공동 묘지에 묻혔다. 나는 그 무덤을 볼 때마다 만일 엄군에게 그러할 힘이 아니 생기면 내라도 묘비 하나는 해 세우리라 하였으나 숨어서 상해를 떠나는 몸이라 그것을 못한 것이 유감이다. 오늘날도 노가만 공동묘지 임씨의 무덤이 눈에 암암하다. 그는 그 남편이 존경하는 늙은이라 하여 내게 그렇게 끔찍하게 해주었다.
나는 애초에 임시 정부의 문 파수를 지원하였던 것이 경무국장으로, 노동국총판(勞動局總辦)으로, 내무총장으로, 국무령으로 오를 대로 다 올라서 다시 국무 위원이 되고 주석이 되었다. 이것은 문 파수의 자격이던 내가 진보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없어진 때문이었다. 비기건대 이름났던 대가가 몰락하여 거지의 소굴이 된 것과 마찬가지였다.
일찍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시무할 때에는 중국인은 물론이요, 눈 푸르고 코 높은 영, 미, 법 등 외국인도 정청에 찾아오는 일이 있었으나 지금은 서양 사람이라고는 프랑스 순포가 왜 경관을 대동하고 사람을 잡으러 오거나 밀린 집세 채근을 오는 것밖에는 없었다. 그리고 한창적에는 천여 명이나 되던 독립 운동자가 이제는 수십 명도 못되는 형편이었다.
왜 이렇게 독립 운동자가 줄었는가. 첫째로는 임시 정부의 군무차장 김희선, 독립신문 사장 이광수, 의정원 부의장 정 인과 같은 무리는 왜에게 항복하고 본국으로 들어가고, 둘째로는 국내 각 도, 각 군, 각 면에 조직하였던 연통제(聯通制)가 발각되어 많은 동지가 왜에게 잡혔고, 셋째로는 생활난으로 하여 각각 흩어져 밥벌이를 하게 된 때문이었다.
이러한 상태에 있어서 임시 정부의 할 일이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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