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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갓댁 고모댁 (22) 직제학공(김맹헌)배위 양성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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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6-09-04 11:18 조회1,51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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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온공(김구용)-부사공(김명리)- 1. 김맹헌(직제학공)2.김중서(참의공)3.김계우(사인공)

 

예문관직제학을 역임하신 김맹헌 선조님의 배위는 양성이씨 공소공 이사검의 따님이십니다.

 

친정할아버님은 이옥.증조할어버지는 이춘부.  친정오라버니는 사육신과 함께 단종복귀를 꾀하다  참변을 당한 이휘입니다.

 

 

이춘부(李春富) =친정 증조부
?∼1371(공민왕 20). 고려말의 문신. 본관은 양성(陽城). 양성군 연($연01)의 손자이며, 첨의평리(僉議評理)를 지낸 나해(那海)의 아들이다. 삼사좌윤·밀직·대언을 거쳐 공민왕 때 판추밀원사에 올랐다.
1359년(공민왕 8)홍건적이 쳐들어와 개경이 함락되자 전라도도순문사 겸병마사가 되어 이를 물리친 공으로 충근절의동덕찬화공신(忠勤節義同德贊化功臣)의 호를 받고 도첨의평리(都僉議評理)에 임명되었으며 난이 평정된 뒤에는 1등공신에 책록되었다.
그뒤 파면되었다가 신돈(辛旽)에게 아부하여 찬성사가 되었고, 왕의 환심을 사 시중까지 지냈다. 밀직 김란(金蘭)과 더불어 매일 아침 신돈의 집을 다녀와서야 등청을 할만큼 심복이었으며, 1371년 신돈이 수원에 귀양가게 되자 사헌부의 탄핵으로 사형에 처하여졌다

 

 

이옥(李沃)-친정 할아버지
?∼1409(태종 9). 고려말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양성(陽城). 도첨의시중(都僉議侍中) 춘부(春富)의 아들이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였다. 용맹이 있고 군사에 능하여 강릉도절제사로 있을 때 침입한 왜구를 격퇴하여 큰 공을 세웠다.
1371년(공민왕 20) 아버지 신돈(辛旽)의 일당으로 처형되자 노비가 되어 강릉으로 추방되었다. 우왕 때 복권되어 1387년(우왕 13) 좌상시(左常侍)에 올랐다.
뒤에 조민수(曺敏修)의 일파로 창왕을 세우는 데 가담하였다 하여 이성계(李成桂)일파의 공격을 받아 파출되었다.
조선 건국 이후 은퇴생활을 하다가 1398년(태조 7)  중추원사(中樞院使), 1400년(정종 2) 조전절제사(助戰節制使), 1405년(태종 5) 판한성부사, 이듬해 검교참찬의정부사(檢校參贊議政府事)를 지냈고, 1409년 개성유후사유후(開城留後司留後)로 있을 때 죽었다. 시호는 정절(靖節)이다.

 

이사검(李思儉)-친정 아버지
?∼1446(세종 28). 조선 초기의 무신. 본관은 양성(陽城). 개성유후 옥(沃)의 아들이다.
1405년(태종 5)무과에 급제하여 사직을 지내고, 1408년 양녕대군(讓寧大君)이 명나라에 조하(朝賀)할 때 수행하여 그의 난잡한 행동을 충고하여 미움을 받았다.
1418년 태종의 셋째아들인 충녕대군(忠寧大君:뒤의 세종)이 세자로 책봉되자 태종의 명으로 그를 보좌하였다. 이어 상호군에 승진하였다가 파직되어 평산에 내려갔다.
1419년(세종 1)왜구가 비인현에 쳐들어와 병선을 불사르는 등 만행을 저지르자 황해도첨절사에 임명되었다. 같은해 조전절제사로 황해도에 파견되어 근무하던 중 왜구가 식량을 요구하면서 교묘하게 싸움을 하지 않는 술책을 써오자 이들을 강력하게 물리치지 않은 죄로 변방에 충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1426년 상호군으로 명나라에 바칠 해청(海靑:매)을 잡으라는 명을 받았다.
이듬해 상호군으로 진응사(進鷹使)가 되어 매를 가지고 명나라로 가다가 요동에 이르러 매가 죽자 죽은 매를 가지고 북경의 대궐에 가서 중국 황제에 대한 조선왕의 예를 그르쳤음을 사죄하니, 명나라 황제가 가상히 여겨 장군모(將軍帽)를 하사하였다.
1429년 좌군첨총제(左軍僉摠制)·경상좌도처치사를 지내고 공조참판이 되었다.
1432년 판의금부사가 되고, 1434년 중추원부사, 이듬해 동지중추부사로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다시 명나라에 다녀온 뒤 동지중추원사가 되었다.
1438년 성절(聖節)을 하례하고 돌아오라는 명을 받았으며, 같은해 왜구에 대한 방비책을 제시하였는데, 그 내용은 왜관을 옮길 것, 진관 설치를 조정할 것, 병선을 증강할 것, 병기의 검열을 철저히 할 것 등이었다. 시호는 공소(恭昭)이다.

 

이휘(李徽)-친정 오라버니
?∼1456(세조 2).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양성(陽城). 자는 미경(美卿), 호는 송죽헌(松竹軒). 목사 사검(思儉)의 아들이다.
1435년(세종 17) 진사시에 합격하여, 1442년 이조좌랑을 지냈다.
1455년 세조의 즉위에 협력한 공으로 좌익공신(佐翼功臣) 3등에 책정되고 동부승지에 임명되었다.
1456년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 사육신이 단종의 복위를 모의할 때 공조참의로서 이 모의에 참가하였다가 일이 발각되자 육신 등과 같이 거열형(車裂刑)을 당하고 가산이 적몰(籍沒)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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