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응 선생님에 대한 또다른 기록-신종우의 인명사전에서 찾아낸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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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영 작성일06-09-08 17:59 조회1,452회 댓글2건본문
증조부님을 객관적으로 적으려고 하니까 힘드네요.
실제 직업이 교사 이셨으니까...선생님으로 하는게 적당할 거 같아서 김구응선생님으로 표기하겠습니다.
아직은 정리된 자료가 아닙니다....사진 자료와 함께 정리된 자료는 9월말경에 올릴수 있을거 같습니다.
출처
http://www.shinjongwoo.co.kr/index.html
성명(姓名) |
김구응(金구응) |
본관(本貫) |
안동(安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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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時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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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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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 |
죽계 |
김구응(모친 최정철여사) 지역 천안시 안동김씨 구분 독립운동가 시대 일제강점기 내용 병천 3·1 독립만세운동의 주역이신 김구응선생의 공적이 그늘에 묻혀 조명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유관순열사의 충절이 너무나 컸기에 유관순열사를 선양하다보니 다른 순국지사들의 애국충절이 그늘에 가리는 우를 범할 뻔하였다. 뒤늦게 김구응선생을 재조명할 기회를 얻어 추모제전도 거행하고 묘비도 제막하였다. 김구응은 천안시 병천면 가전리에서 출생하여 한학을 수학하는 한편 신문학도 익혀 신문명도 이해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우선 급선무가 교육을 확대하여 국민의 우맹을 줄이는 것이 조국독립의 첩경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고향동리에 청신의숙을 개설하고 직접 신·구학을 지도하였다. 한편 광복회 유창순지사와 수시 협의하여 독립의 필요성과 농촌계몽운동에 전념하였다. 그후 수신면 장산리 장명학교에서 일인교장 우에다 밑에서 훈도생활을 할 때 병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했던 조만형과 유관순의 오라버니 관옥을 제자로 가르쳤다. 1918년에 병천면 병천리에 미국인 구세실 신부가 경영하는 진명학교에서 훈도생활을 하다가 이듬해인 1919년 4월 1일 아우내장터 독립운동의 주역이 된 것이다. 김구응은 유관순, 유중권, 조인원, 김상훈, 이백하와 밀의 끝에 유관순의 서울 소식을 토대로 계획을 세웠다. 김구응은 총지휘책인 셈이고 유관순은 활동책임을 져서 유관순열사가 천안, 동부 6개면과 전의, 오창, 청주, 진천 등지에 연락하여 상호 접응 할 것을 약속하였다. 연락신호는 봉화로 하기로 하고 전날 매봉에 올라 신호로 봉화를 올렸다. 그랬더니 전날 약속한대로 각지에서 봉화로 답을 해왔다. 1919년 4월 1일이 되자 각지에 통하는 도로를 책임분담하고 태극기를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헌병주재소로 통하는 전화선을 절단하고 시위집회를 거행하였다. 김구응과 유관순은 각각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확성장치가 없던 그 시절에는 육성으로 수많은 군중에게 청취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각각 선언서를 읽은 것이다. 이때 군중은 만 여명을 헤아릴 수 있었으며 일본측 기록에도 6·7천명으로 추산된다고 하였으니 군중이 많이 집결하였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김구응은 이날 하오 5시에 병천 일헌병 주재소를 습격하였고 천안에서 중파된 왜헌병이 무차별 사격을 가하자 김구응은 손에 독립선언서를 말아든 채 총탄을 맞고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었다. 김구응의 호적부에도 "1919년 4월 1일 오후 5시 병천주재소 앞에서 사망함"으로 기록되어 있다. 김구응선생 자당 최정철여사 최여사는 전주최씨이며 안동김씨인 남편이 병천독립운동의 전해인 1918년에 사별하였다. 최여사는 현모양처로 매사에 명쾌하여 주위의 귀감이 된다고 칭찬이 자자하였다. 병천독립운동의 계획일자에 아들의 장거에 참여하여 만세를 불렀다. 하루종일 아들의 뒤를 따라 같이 활동하였다. 마침 주재소 앞에서 아들의 참경을 목격한 최여사는 일본헌병의 멱살을 잡고 흔들며 "내나라 독립하겠다는 것도 죄가 되는냐"고 소리쳤다. 최여사는 아들의 시체를 감싸안고 숨져갔다 한다. 최여사의 의연한 독립투쟁과 모성애는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사실이다. 당시 최여사는 67세의 고령이었다. 67세의 노인이 적수공권으로 아들의 죽음을 항의하였는데 그대로 떨쳐버릴 수도 있었을 것을 총을 쏘고 총검으로 난자하니 일본헌병의 짐승같은 행동에 분노를 일으키지 않을 수 없다. | |||||
묘(墓) | |||||
부(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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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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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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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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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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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兄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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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文獻)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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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其他) |
아우내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지 6개월이 지난 1919년 9월 29일 조선군사령관 우츠노미야타로가 본국의 육군대신 다나카에게 3.1운동 중의 사상자에 대한 종합적인 보고를 하였는데 다음은 그 가운데 충청남도 천안군 병천에서 일어난 시위운동에 관한 기록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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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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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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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또 다른 새 자료, 감동으로 읽었습니다. 님의 집중력 있는 문제 해결의 추진력, 또 하나의 감동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드디어 김구응 선생님의 위업이 바로 조명돼 가고 있습니다.
김대영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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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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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부족한 후손들 때문에 증조부님의 업적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어서 송구할 따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