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敬順大王 01 (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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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2-05-07 07:48 조회1,89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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敬順大王 01 (경순대왕 약사)







2002년 5월 5일, 경기 연천 장남면 고랑포리에 있는 경순왕릉에서 [경순대왕 춘향대제]가 있었습니다.



주최측에서 배부한 책자에 새로운 내용이 다수 있어 행사에 참석치 못한 분들을 위하여 연재하여 소개하고자 합니다.







아래에 소개하는 [경순대왕 약사] 중에서 새로운 내용을 보면



- 경순대왕께서 서기 897년에 태어나셨다는 내용,

- 경순대왕의 첫째 부인 죽방부인이 계림군 朴光佑의 딸이라는 내용,

- 후에 낙랑공주께서 금강산 頓道庵(돈도암)으로 입산하자 다시 순흥안씨를 맞으셨다는 내용,

- 경순대왕께서 고려에 항복한 것이 아니라, 백성을 위하여 遜國(손국) 또는 讓國(양국) 하였다는 내용

- 대왕께서 만년에 佛緣에 뜻을 두고 명산대천을 찾아 周遊天下 하시다가 제천에 이르러 離宮(이궁)을 짓고 그곳에 머무르시면서 미륵불상을 모시는 鶴樹寺(학수사)와 高自庵(고자암)을 세워 신앙과 수도에 몰입하셨다는 내용



- 978년 음4월 경순대왕께서 82세로 승하하시자, 979년 정월초 큰 아들 마의태자가 강원도 인제군 김부리에서 신라 제57대 왕으로 왕위를 계승하였다는 내용 등이 되겠습니다.







참고로 대제집행위원장이고 아래의 경순대왕 약사를 쓰신 김수선 (건국대 명예교수) 이라는 분은 수안김씨 종친회장으로 있는 분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수안김씨는 충렬공 方慶의 1자이신 金 (김선)의 아들 金資(김자)의 后에서 분파한 경우로 포항의 재원 종친님께서 수안김씨 집성촌을 탐방하시고 자세한 내용을 여러차례 소개하신 바 있습니다.











▣ 경순대왕 약사

--- 김수선 (건국대학교 명예교수/이공학박사)



경순대왕께서는 서기 897년에 신라의 서울 월성(지금의 경주)에서 태어나셨고 휘는 傅(부)요 시호는 敬順이시다. 아버님은 신흥대왕으로 추존되신 이찬 孝宗이시며, 어머님은 신라 제49대 헌강대왕의 따님이신 계아태후 계아부인 김씨이시고, 신라 제46대 문성대왕의 6세손이시다.







대왕께서는 당초에 계림군 朴光佑의 따님 竹房夫人 박씨를 왕비로 맞으셔서 金富大王이신 태자 鎰(일)과 湟(황 또는  -굉) 및 鳴鍾(명종)의 3子와 1女를 낳으셨고



다음으로 맞이하신 왕건 태조의 따님이신 낙랑공주와의 사이에 殷說(은열), 錫(석), 鍵(건), 鐥(선), 錘(추)의 5형제와 2女를 주였으며



후에 낙랑공주께서 금강산 頓道庵(돈도암)으로 입산하자 다시 순흥안씨를 맞으셔서 제9자 德摯(덕지)를 얻으셨다.







서기 927년에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의 왕도에 침입하여 신라 제55대 경애왕 박 휘위안을 시해하자, 대왕께서 927년 11월에 신라 제56대 (신라김씨 38대) 왕위에 오르시니 이때 보령이 31세이셨다.







당시의 신라의 국정을 살펴보면, 제51대 진성여왕 때부터 사방에 도적이 일어나고, 나라 안이 어지러워지게 되었으므로 진성여대왕께서는 그 조카인 효공대왕에게 양위하였다.



그러나 효공대왕 시대에는 북쪽의 궁예와 남쪽의 견훤이 크게 위세를 떨치고 왕권은 날로 쇠미해졌으며, 그 위에 대왕께서는 아드님이 없이 돌아가셨으므로 백성들이 효공대왕의 매부이자 신라 제8대 대왕 아달라 이사금의 먼 후손인 박씨 (휘경휘)를 세워 왕으로 모시니, 이 분이 곧 신라 제53대 신덕왕이시다. 신덕으로 비롯된 박씨왕은 경명왕-경애왕까지 3대로 그치고, 그 뒤를 이어 경순대왕께서 보위에 오르시게 된 것이다.







바야흐로 내우외환이 겹치고 국사다난한 시기에 왕위에 오르신 대왕께서는 국력배양과 호국안민을 위하여 노심초사 하시었으나, 이미 기울어진 천하대세를 만회할 수는 없었다.



대왕5년 (서기 931년) 2월에 고려태조 왕건의 예방을 받고, 양국의 우호를 다진 바 있으나, 견훤의 무도하고 횡포함은 날로 더하고, 서기 934년에 운주 (지금의 충남 홍성) 일대의 30여 군현이 고려에 복속하는 등 국토의 대부분을 상실하여, 해마다 국세가 쇠잔함으로 나라를 지탱하기 어려울 지경에 이르렀다.



이때 대왕께서는 만약에 왕위를 지키기 위하여 날로 강성해지는 고려에 항거한다면, 더불어 그 화가 백성들에게 미칠 것을 근심하시어 고려 태조에 讓國할 것을 군신과 더불어 논의하였다.







태자 (세칭 마의태자)께서 이를 반대하였으나, 대왕께서는 뜻을 굽히지 않으시고 서기 935년 11월에 시랑 김봉휴로 하여금 국서를 고려 왕건이 보낸 대상 왕철에게 전달케 하시니 이로써 신라왕조는 992년 8개월의 사직에 종언을 고하게 되었다.



경순대왕께서 천년사직을 들어 고려에 遜國(손국=讓國)하신 것을 군주의 권위를 생각하기 이전에 먼저 민생을 생각하고, 국가존망지추에 처하여 무엇보다도 "무고한 백성으로 하여금 肝腦塗地(간뇌도지)하게 하는 일을 나는 차마 못하겠다." 고 하시며, 무모한 항전을 포기하고 제세구민을 위하여 스스로 왕좌를 물러나신 대왕의 높은 뜻을 우리는 올바로 평가해야 할 것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경순대왕조의 기록을 빌어 말한다면 "경순대왕께서 고려 왕건에게 양국하신 일은 비록 마지못해서 한 일이지만 옳게 하신 일이다. 그때 만일 力戰死守하여 고려군에게 항거하다가 힘이 꺽이고 형세가 궁하여지면 반드시 그 종족이 覆滅(복멸)되고 화가 무고한 백성에게까지 미쳤을 것"이 틀림없다.



만약 그리 되었다고 하면, 오늘날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적지 또는 지하박물관 등으로 불리는 경주일대의 유적과 국보 보물 또는 고적 사적등 각종 문화유산을 남긴 찬란한 신라문화가 어찌 능히 보전되어 왔을 것이며, 신라김씨의 주종을 이루고 있는 경순대왕의 후손들과 그밖의 많은 신라 遺民(유민)들의 후예가 어떻게 생을 부지하여 지금처럼 蕃衍(번연)할 수 있었을 것인가.



일찍이 신라의 고도 월성 (지금의 경주) 의 이름없는 서민들이 대왕의 인덕을 흠모하는 나머지 사당을 지어 대왕의 영정을 모셔놓고 제향을 받들어 온 것은 곧 당시의 민심을 잘 나타낸 것이라 할 것이다.







대왕께서 고려에 讓國하시자 왕건은 정승공을 봉하여 태자보다 높은 지위에 서시게 하고 월성을 고쳐 경주라 하여 이 곳을 식읍으로 삼게 하였으며 고려 제5대 경종(=경순대왕의 사위) 때에 다시 尙父令으로 삼았다.



대왕께서는 만년에 佛緣에 뜻을 두고 명산대천을 찾아 周遊天下 하시다가 제천에 이르러 離宮(이궁)을 짓고 그곳에 머무르시면서 미륵불상을 모시는 鶴樹寺(학수사)와 高自庵(고자암)을 세워 신앙과 수도에 몰입하셨다.



서기 978년 음 4월 4일에 승하하시니 享壽 82세이셨으며 廟號(묘호)를 敬順이라 하니, 이는 應天撫運之敬의 敬과 應時率德之順의 順을 받아 경순으로 모신 것으로, 대왕께서 천운을 헤아리시고 시류를 살피셔서 만백성의 생명을 구하신 크나큰 인덕을 기리는 뜻이 담긴 것이라고 해석된다.







대왕께서 승하하신후 이미 천여년이 지났으나, 대왕의 인민지덕을 흠모하는 민심은 아직도 한결 같아 후세인들은 대왕의 失國을 허물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처처에 廟殿(묘전)을 세워 춘추로 추앙의 香火를 받들고 있으며, 대왕의 후손들 또한 매우 蕃衍(번연)하여 명문거족의 대성들이 몇 백만으로 헤아리게 되었다.



이는 오로지 백성들을 아끼고 사랑하신 대왕의 遺德(유덕)에 연유한 것이라 할 것이다. 대왕의 陵寢(능침)은 장서군 남8리 즉 지금의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 聖居山 줄기의 花藏龍 癸坐에 모셨다.











--- 신라 제57대 (신라김씨 39대왕) 金富大王



신라 제56대 (신라김씨 38대왕) 金傅(김부) 대왕께서 서기 978년 음 4월4일 승하하셨다. 이때 金富(별칭 마의태자) 태자의 춘추 63세였습니다.



935년 11월 15일경 金傅대왕 (시호 敬順) 의 특사 시랑 김봉휴로 하여금 고려태조 왕건의 신하 대상 왕철에게 대왕의 교서를 전달케 할 때,

金富태자께서는 玉璽(옥새)를 간직하시고 935년 12월초 신라국을 떠나 강원도 인제군 상남면 金富里에서 979년 정월초경 신라국왕을 계승, 왕권을 장악하시고 신라 제57대 (신라김씨 39대왕) 金富대왕이십니다.



참고문헌 : [金富대왕(마의태자)의 생애]---김수선 김춘식 저, 金富(마의태자)대왕숭모회 발행, 2001년 9월 25일







▣ 김태서 - 잘 다녀오셨는지요.집안행사로 참석하지 못하였습니다.

▣ 김영윤 - 잘읽었읍니다 함께하지 못한 아쉬움 다음을 기약하며 자위합니다

▣ 김태헌 -

▣ 김영환 -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주심에 감사합니다.

▣ 김항용 -

▣ 김재원 -

▣ 김재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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