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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외갓댁 고모댁 (28) 직제학공(김맹헌)사위 송순년의 사위 정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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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6-09-29 11:23 조회1,33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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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광필의 부인은 송순년+안동김씨(김맹헌의 딸)따님입니다.

 

정광필의 아들은 정노겸(주부),정익겸(부정)정복겸(부사)이며 정노겸의 아들 정유인(문,장령), 정유인의 아들이 정지연(우의정)이며

정익겸의 아들은 보덕을 지낸 정유청, 부사 정복겸의 아들은 좌의정을 지낸 정유길이며 정유길의 아들이 좌의정을 지낸 정창연입니다.

 

정광필(鄭光弼)
1462(세조 8)∼1538(중종 33).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사훈(士勛), 호는 수부(守夫). 이조판서 난종(蘭宗)의 아들이다.
1492년(성종 23) 진사에 오르고, 그해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으며, 그뒤 성균관학유·의정부사록·봉상시직장을 역임하였다.
성균관학정에 있을 때 좌의정 이극균(李克均)의 발탁으로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1504년(연산군 10)에 직제학을 거쳐 이조참의가 되었는데, 임금의 사냥이 너무 잦다고 간하였다가 아산으로 유배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 후 부제학에 오르고, 그뒤 이조참판·예조판서·대제학을 거쳐 1510년 우참찬으로 전라도도순찰사가 되어 삼포왜란을 수습하고 병조판서에 올랐다.
1512년 함경도관찰사가 되어 기민구제에 공헌하였다. 그 이듬해 우의정·좌의정을 거쳐, 1516년 영의정에 올랐다.
1519년 기묘사화 때 조광조(趙光祖)를 구하려다 영중추부사로 좌천되었다가, 1527년 다시 영의정에 올랐다.
1515년 장경왕후(章敬王后)가 죽자 중종의 총애를 받던 후궁이 자기의 소생을 끼고 왕비의 자리에 오르려 하자, 그는 홍문관 동료들을 이끌고 경전(經傳)을 인용, 극간하여 새로이 왕비를 맞아들이게 하였다.
1519년 중종이 사정전(思政殿)에 들러 천재(天災)의 원인이 될만한 정치의 잘못을 물었을 때 한충(韓忠)으로부터 비루한 재상이라고 탄핵을 받았으며, 신용개(申用漑)로부터 선비가 대신을 면대하여 배척하는 풍토는 근절하여야 한다며 한충의 논죄를 주장하였으나, 그는 오히려 젊은 사람들의 바른말 하는 풍조를 꺾어 억제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하여 재상의 넓은 도량을 보이기도 하였다.
1533년 견파(譴罷)되어 영상에서 물러나 회덕에 머물러 있었는데, 후임 영상 김안로(金安老)로부터 장경왕후 국장 때 총호사(摠護使)를 맡아 능지(陵地)를 불길한 땅에 잡았다는 무고로 김해로 유배되었다.
이것은 김안로의 아들 희(禧)가 중종의 장녀 효혜공주(孝惠公主)에게 장가들어 부마가 되었는데, 이때 호곶목장(壺串牧場)을 받아서 밭을 일구고자 하므로 이를 저지함으로써 김안로의 원한을 샀기 때문이었다.
1537년 김안로가 사사(賜死)되자 곧 풀려나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저서로는 《정문익공유고 鄭文翼公遺稿》가 있다.
중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회덕서원, 용궁의 완담향사(浣潭鄕祠)에 향사되었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정유인(鄭維仁)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의인.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덕로(德老). 《이생록 #이96生錄》의 저자이다.
중종계유식문과(中宗癸酉式文科)에 급제하였다. 관은 봉장정(奉掌正)이었다.
《이생록》의 서문에 그가 20세 때 중병을 얻어 누워있었는데 5, 6년 동안 옛날부터 전해온 의서를 보고 이양(#이96養)의 방법을 체득하여 이를 모으고 간단하게 자기의 생각을 붙여 1523년(중종 18)에 이 책을 저술하였다고 쓰여져 있다.

 

정유길(鄭惟吉)
1515(중종 10)∼1588(선조 2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길원(吉元), 호는 임당(林塘).
영의정 광필(光弼)의 손자로, 강화부사 복겸(福謙)의 아들이며, 김상헌(金尙憲)·김상용(金尙容)의 외할아버지이다. 아들 창연(昌衍)은 좌의정까지 올랐다.
1531년(중종 26) 사마시에 합격하고, 1538년 별시문과에 장원하여 중종의 축하를 받고 곧 정언에 올랐다.
그뒤 공조좌랑·이조좌랑·중추부도사·세자시강원문학 등을 역임하였다.
1544년 이황(李滉)·김인후(金麟厚) 등과 함께 동호서당(東湖書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고, 그뒤 이조정랑·의정부사인·사헌부집의·교리·직제학을 거쳐 1552년(명종 7) 부제학에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자하여 도승지가 되었다.
이때 이황과 더불어 성학(聖學)을 진흥시켜야 함을 진언하였고, 이어 이조참판·예조참판·대사간·예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560년 찬성 홍섬(洪暹)이 대제학을 사양하고 후임으로 예조판서 정유길, 지사 윤춘년(尹春年)·이황을 추천하였는데 이 중에서 가장 많은 지지를 얻어 홍문관·예문관의 대제학이 되어 문형(文衡)에 들어갔다. 얼마 뒤 이조판서에 오르고 지중추부사가 되어 1567년 진하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68년(선조 1) 경상도·경기도 관찰사를 역임하면서 옥사(獄事)를 바로잡고, 민생안정에 진력하였다.
1572년 예조판서로 있으면서 명나라 사신 접반사가 되어 능란한 시문과 탁월한 슬기를 발휘하여 명나라 사신과 지기지간이 되었다.
그뒤 우찬성·판의금부사·판돈녕부사를 거쳐 1581년 우의정이 되었으나, 명종 때 권신인 윤원형(尹元衡)·이량(李樑) 등에게 아부한 사람을 상신(相臣)에 앉힐 수 없다는 사헌부의 탄핵으로 사직하였다.
그뒤 1583년에 우의정에 오르고, 그 이듬해 궤장(几杖)이 하사되어 기로소에 들어갔으며, 1585년 좌의정이 되었다. 충효와 근신을 근본으로 삼고 넓은 도량을 가지고 있어 포섭력이 강하였으며, 큰 일에는 대의를 가지고 과감하게 이를 처결하였다.
또한, 시문에도 뛰어났고, 서예에도 능하여 임당체(林塘體)라는 평을 받았다. 작품에 〈한기비 韓琦碑〉가 있고, 저서로는 《임당유고》가 있다.

 

정지연(鄭芝衍)2
1527(중종 22)∼1583(선조 1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연지(衍之), 호는 남봉(南峰).
영의정 광필(光弼)의 증손으로, 봉상시정 유인(惟仁)의 아들이다.
일찍이 이중호(李仲虎)로부터 학문을 배워 그 문하에서는 가장 명망이 높았으며, 뒤에 이황(李滉)·서경덕(徐敬德)·성제원(成悌元)의 문하에 출입하여 많은 영향을 받았다.
1549년(명종 4)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된 뒤, 1566년 선조가 세자로 있을 때 이황의 추천에 의하여 왕자사부(王子師傅)가 되었다.
1569년(선조 6) 의금부도사로 재직시 나이 43세에 이르러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이조좌랑·지평·부교리·헌납·집의·직제학 등을 지내면서 청론(淸論)을 벌였다는 칭송을 들었다.
그뒤 대사성·대사간·대사헌을 거쳐 1581년 우의정에 올랐으니, 관직에 나온 지 15년 만에 정승자리에 오른 예는 흔히 보기 어려운 일이었다.
1583년 신병이 깊어짐에 따라 거듭 관직에서 물러날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고, 그 역시 병중에서도 글로써 국사(國事)를 논의하다가 그해 57세로 죽었다.
죽음에 이르러 왕이 대신할 인물을 천거하라고 하자 이산해(李山海)를 천거하였고, 또 유소(遺疏)로 이이(李珥)를 인재로 천거하였는데, 특히 이이의 장단점을 잘라 말한 다음, 그의 기질을 적절히 알아서 쓴다면 나라에 큰 이익이 될 것이라 하였다.

 

정창연(鄭昌衍)
1552(명종 7)∼1636(인조 1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경진(景眞), 호는 수죽(水竹). 좌의정 유길(惟吉)의 아들이다.
1579년(선조 12)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독서당(讀書堂)에 들어갔고, 이조좌랑을 거쳐 동부승지 등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614년(광해군 6) 우의정이 되고 이어 좌의정이 되어 기사(耆社)에 들고 궤장(几杖)을 받았다.
이때 강화부사 정항(鄭沆)이 광해군의 뜻을 받들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이니, 부사직 정온(鄭蘊)이 상소하여 “항을 죽이고 영창을 대군의 예로써 장사지내야 한다.”고 하였다.
이에 광해군이 크게 노하여 정온이 화를 당하자 그는 이원익(李元翼)과 더불어 상소하여 정온을 구하여주었다. 이어 폐모론이 일어나자 벼슬을 사퇴하고 두문불출한 가운데 정방(政房)에 나아가지 않았다.
이 때문에 다른 대신들이 합계(合啓)하여 말썽을 일으켰으나, 때마침 인조반정이 일어나 무사하였을 뿐 아니라 다시 좌의정이 되었다.
한편, 광해군 비 유씨(柳氏)는 그의 생질녀로, 옥사가 일어날 때에는 혹 광해군이 그에게 묻기도 하여 옥사에 억울하게 걸린 많은 사람들을 구하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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