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의전 배향인물 (9) 김방경, 안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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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작성일02-05-07 19:01 조회1,487회 댓글0건본문
김방경(金方慶)
1212(강종 1)∼1300(충렬왕 26). 고려 후기의 무장(武將)이며 정치가. 본관은 안동. 자는 본연(本然).
1. 성품·행적
신라 경순왕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병부상서·한림학사를 지낸 효인(孝印)이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강직하고 도량이 넓었다. 할아버지 민성(敏成)이 양육하였으며, 조금이라도
자기 뜻에 맞지 않는 일이 있으면 땅바닥에 뒹굴면서 울었는데, 소나 말이 그를 피해 지나가니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길 정도였다.
1229년(고종 16)에 음서로 산원 겸 식목녹사(散員兼式目錄事)에 보임됨으로써 관도에 오르기
시작하였다. 당시 시중 최종준(崔宗峻)은 충성스럽고 직언하는 성품을 사랑하여 예우하였으며,
큰일이 있으면 모두 맡겼다. 여러번 자리를 옮겨 감찰어사에 올랐는데, 우창(右倉)을
감검(監檢)하면서 재상의 청탁도 거절하였다.
1248년 서북면병마판관(西北面兵馬判官)에 부임되어 몽고의 침공을 받자 위도(葦島)에
입보(入保)하였다.
거기에서 해조(海潮)를 막기 위하여 제방을 쌓고, 10여리의 평탄한 지형을 농사에 이용하여
상당한 수확을 거두게 했을 뿐 아니라 빗물을 모아 못을 만들어 우물이 없는 불편을 덜게 하여,
모두 그 지혜를 칭찬하였다.
1263년(원종 4)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로 당시 정병(政柄)을 잡고 있던 유천우(兪千遇)와
대립하면서 꿋꿋한 의지를 보여주었으나, 상장군에 올라 반주(班主) 전분(田#빈01)의 미움을
사서 지방관으로 좌천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인망이 두터워서 얼마 뒤에 형부상서·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가 되어 새 난국의
담당자로 등장하였다.
2. 삼별초의 난 평정
당시 강도(江都)에 천도하여 대몽항쟁을 벌였던 고려는 일단 강화를 한 다음 원나라와 개경환도
문제로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김준(金俊)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한 임연(林衍)은 1269년 왕을 퇴위시키고 안경공
창(安慶公#창18)을 즉위시킴으로써, 반원(反元)의 입장을 굳히면서 환도를 거부하고 현상을
유지하는 정책을 쓰려고 하였다.
그러나 원나라의 강한 반대와 위협에 부닥쳐 원종은 복위하게 되었는데, 그때 사신으로 원나라에
파견되어 이장용(李$장01用)의 천거를 받으면서 고려와 원나라의 군사적 충돌을 막고 사태를
악화시키지 않도록 진력하였다.
1270년 6월에 이르러 개경환도가 강행되자 삼별초가 반란을 일으켰다. 그때 그 토벌의 임무를 맡아
삼별초에 의하여 함락되기 직전의 전주와 나주를 구하고, 진도의 대안에서 토벌에 진력하다가
무고로 개경에 압송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곧 석방되어 상장군을 제수받고 다시 삼별초의 토벌에 힘쓰게 되었는데, 원나라의 원수
아해(阿海)의 후퇴를 막는가 하면, 단독으로 고려군을 이끌고 용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듬해 새로 원나라의 원수로 임명된 흔도(#흔05都)와 더불어 진도를 사방에서 공격하여 삼별초의
토벌에 성공하였다. 이 공로로 수태위 중서시랑 평장사(守太尉中書侍郎平章事)에 올랐다.
이어 탐라로 들어간 삼별초의 잔여세력의 평정을 책임맡아 1273년 행영중군병마원수
(行營中軍兵馬元帥)에 임명되어 원나라 장수 흔도·홍다구(洪茶丘)와 함께 공격하여, 마침내
삼별초를 완전히 토벌하고 탐라를 평정하였다. 이 공로로 시중에 오르고, 그해 가을 원나라에
들어가 원나라의 세조(世祖)로부터 환대를 받았다.
3. 원의 일본정벌 참여
1274년(충렬왕 즉위년) 10월 원나라의 일본정벌에 도독사(都督使)로서 고려군 8천인을 이끌고
도원수 홀돈(忽敦)의 총지휘 아래 참여하였다. 처음 대마도에서 상당한 전과를 올리고
이키도(壹岐島)에서도 용전하여 크게 기세를 올렸지만, 심한 풍랑으로 결국 실패하였다.
그러나 그 공로로 상주국(上柱國)이 되고, 판어사대사(判御史臺事)가 가직(加職)되었다.
이듬해에 관제의 변화에 따라 첨의중찬 상장군 판전리감찰사사(僉議中贊上將軍判典理監察司事)에
임명되었으며, 1276년에는 성절사로서 원나라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1277년에 위득유(韋得儒)·노진의(盧進義)·김복대(金福大)의 모함을 받아 원나라의
다루가치(達魯花赤) 석말천구(石抹天衢)에 의하여 구금되어 홍다구에게 참혹한 고문을
당하였지만 끝까지 거짓 자백을 하지 않고 백령도에 유배되었다.
그뒤 다시 원나라에 이송되어 원나라의 세조가 충렬왕의 상소에 따라 무죄를 확인함으로써
비로소 방면되어 귀국하였다.
그뒤 중찬(中贊)에 임명되어 수상으로서 임무를 수행하였다.
1280년 벼슬에서 물러날 것을 청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원나라로부터
중선대부(中善大夫)·관령고려국도원수(管領高麗國都元帥)의 직임을 받고, 1281년의
제2차일본정벌에 주장(主將)으로 참여하였으나 또다시 실패로 돌아갔다.
1283년 삼중대광 첨의중찬 판전리사사 세자사(三重大匡僉議中贊判典理司事世子師)로 치사(致仕)
하였으며, 이어서 첨의령(僉議令)이 가직되고 상락군 개국공 식읍 일천호 식실봉 삼백호(
上洛郡開國公食邑一千戶食實封三百戶)에 봉하여졌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東方文化交流史論攷(金庠基, 乙酉文化社, 1948)
三別抄와 그의 亂에 대하여(金庠基, 震檀學報 9·10·13, 1939∼1941)
元寇の新硏究(池內宏, 1931). 〈閔賢九〉
안우(安祐)
?∼1362(공민왕 11). 고려 말기의 장군. 본관은 탐진(耽津). 검교중추원사(檢校中樞院事)를
지낸 원린(元璘)의 아들이다.
1352년(공민왕 1) 군부판서(軍簿判書)로서 조일신(趙日新)의 난을 최영(崔瑩) 등과 함께
평정하였고, 이듬해 응양군상호군(鷹揚軍上護軍)으로서 원나라에 방물과 황후탄생일의
예물을 바치고 돌아왔다. 이어 전리판서(典理判書)·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를 거쳐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에 임명되었다.
1357년 참지중서정사(參知中書政事)로서 안주군민만호부만호(安州軍民萬戶府萬戶)를 겸대하였다.
이듬해 원나라의 세력을 배후에 두고 세도를 부렸던 기철(奇轍)을 주살한 공으로 1등공신에
책봉되었으며, 서북면부원수로서 홍건적이 침입하여 의주·정주 등지가 함락되자 이방실(李芳實)
등과 함께 적을 대파하고 퇴각하는 적을 추격, 철주에 이르러 소수의 기병으로 분전하여 적을
크게 무찔렀다.
1359년 홍건적의 잔여무리를 쫓아 고선주(古宣州: 지금의 宣川)에 이르러 수백명의 목을 베고
돌아와 중서평장정사(中書平章政事)·추충절의정란공신(推忠節義定亂功臣)이 되었다. 이어
참지정사를 거쳐, 다음해 상원수가 되어 재차 침입해온 홍건적을 박주·영변 등지에서 대파하고
도원수가 되었으나 절령(#절05嶺)에서 패하여 개성이 함락되었다.
1361년 총병관(摠兵官) 정세운(鄭世雲)의 지휘하에 이방실·김득배(金得培)·이성계(李成桂)·최영·
안우경(安遇慶) 등 여러 장수와 함께 20만 대군으로 개경 탈환전에 참전, 적을 거의 섬멸하고
나머지 적을 추격하여 압록강 밖으로 몰아냈다.
이때 재상 김용(金鏞)과 함께 정세운의 전공을 시기하여 죽였으나, 왕이 이 사실을 알고 장군들을
복주(福州:지금의 安東)로 소환하자 이에 응하여 복주로 갔으나 중문(中門)에서 김용의
하수인에게 살해되었다.
▣ 김태서 -
▣ 김항용 -
▣ 김정중 - 감사합니다
▣ 김재원 -
▣ 김주회 -
▣ 김재익 -
▣ 김은회 -
▣ 김재원 -
1212(강종 1)∼1300(충렬왕 26). 고려 후기의 무장(武將)이며 정치가. 본관은 안동. 자는 본연(本然).
1. 성품·행적
신라 경순왕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병부상서·한림학사를 지낸 효인(孝印)이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강직하고 도량이 넓었다. 할아버지 민성(敏成)이 양육하였으며, 조금이라도
자기 뜻에 맞지 않는 일이 있으면 땅바닥에 뒹굴면서 울었는데, 소나 말이 그를 피해 지나가니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길 정도였다.
1229년(고종 16)에 음서로 산원 겸 식목녹사(散員兼式目錄事)에 보임됨으로써 관도에 오르기
시작하였다. 당시 시중 최종준(崔宗峻)은 충성스럽고 직언하는 성품을 사랑하여 예우하였으며,
큰일이 있으면 모두 맡겼다. 여러번 자리를 옮겨 감찰어사에 올랐는데, 우창(右倉)을
감검(監檢)하면서 재상의 청탁도 거절하였다.
1248년 서북면병마판관(西北面兵馬判官)에 부임되어 몽고의 침공을 받자 위도(葦島)에
입보(入保)하였다.
거기에서 해조(海潮)를 막기 위하여 제방을 쌓고, 10여리의 평탄한 지형을 농사에 이용하여
상당한 수확을 거두게 했을 뿐 아니라 빗물을 모아 못을 만들어 우물이 없는 불편을 덜게 하여,
모두 그 지혜를 칭찬하였다.
1263년(원종 4)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로 당시 정병(政柄)을 잡고 있던 유천우(兪千遇)와
대립하면서 꿋꿋한 의지를 보여주었으나, 상장군에 올라 반주(班主) 전분(田#빈01)의 미움을
사서 지방관으로 좌천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인망이 두터워서 얼마 뒤에 형부상서·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가 되어 새 난국의
담당자로 등장하였다.
2. 삼별초의 난 평정
당시 강도(江都)에 천도하여 대몽항쟁을 벌였던 고려는 일단 강화를 한 다음 원나라와 개경환도
문제로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김준(金俊)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한 임연(林衍)은 1269년 왕을 퇴위시키고 안경공
창(安慶公#창18)을 즉위시킴으로써, 반원(反元)의 입장을 굳히면서 환도를 거부하고 현상을
유지하는 정책을 쓰려고 하였다.
그러나 원나라의 강한 반대와 위협에 부닥쳐 원종은 복위하게 되었는데, 그때 사신으로 원나라에
파견되어 이장용(李$장01用)의 천거를 받으면서 고려와 원나라의 군사적 충돌을 막고 사태를
악화시키지 않도록 진력하였다.
1270년 6월에 이르러 개경환도가 강행되자 삼별초가 반란을 일으켰다. 그때 그 토벌의 임무를 맡아
삼별초에 의하여 함락되기 직전의 전주와 나주를 구하고, 진도의 대안에서 토벌에 진력하다가
무고로 개경에 압송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곧 석방되어 상장군을 제수받고 다시 삼별초의 토벌에 힘쓰게 되었는데, 원나라의 원수
아해(阿海)의 후퇴를 막는가 하면, 단독으로 고려군을 이끌고 용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듬해 새로 원나라의 원수로 임명된 흔도(#흔05都)와 더불어 진도를 사방에서 공격하여 삼별초의
토벌에 성공하였다. 이 공로로 수태위 중서시랑 평장사(守太尉中書侍郎平章事)에 올랐다.
이어 탐라로 들어간 삼별초의 잔여세력의 평정을 책임맡아 1273년 행영중군병마원수
(行營中軍兵馬元帥)에 임명되어 원나라 장수 흔도·홍다구(洪茶丘)와 함께 공격하여, 마침내
삼별초를 완전히 토벌하고 탐라를 평정하였다. 이 공로로 시중에 오르고, 그해 가을 원나라에
들어가 원나라의 세조(世祖)로부터 환대를 받았다.
3. 원의 일본정벌 참여
1274년(충렬왕 즉위년) 10월 원나라의 일본정벌에 도독사(都督使)로서 고려군 8천인을 이끌고
도원수 홀돈(忽敦)의 총지휘 아래 참여하였다. 처음 대마도에서 상당한 전과를 올리고
이키도(壹岐島)에서도 용전하여 크게 기세를 올렸지만, 심한 풍랑으로 결국 실패하였다.
그러나 그 공로로 상주국(上柱國)이 되고, 판어사대사(判御史臺事)가 가직(加職)되었다.
이듬해에 관제의 변화에 따라 첨의중찬 상장군 판전리감찰사사(僉議中贊上將軍判典理監察司事)에
임명되었으며, 1276년에는 성절사로서 원나라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1277년에 위득유(韋得儒)·노진의(盧進義)·김복대(金福大)의 모함을 받아 원나라의
다루가치(達魯花赤) 석말천구(石抹天衢)에 의하여 구금되어 홍다구에게 참혹한 고문을
당하였지만 끝까지 거짓 자백을 하지 않고 백령도에 유배되었다.
그뒤 다시 원나라에 이송되어 원나라의 세조가 충렬왕의 상소에 따라 무죄를 확인함으로써
비로소 방면되어 귀국하였다.
그뒤 중찬(中贊)에 임명되어 수상으로서 임무를 수행하였다.
1280년 벼슬에서 물러날 것을 청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원나라로부터
중선대부(中善大夫)·관령고려국도원수(管領高麗國都元帥)의 직임을 받고, 1281년의
제2차일본정벌에 주장(主將)으로 참여하였으나 또다시 실패로 돌아갔다.
1283년 삼중대광 첨의중찬 판전리사사 세자사(三重大匡僉議中贊判典理司事世子師)로 치사(致仕)
하였으며, 이어서 첨의령(僉議令)이 가직되고 상락군 개국공 식읍 일천호 식실봉 삼백호(
上洛郡開國公食邑一千戶食實封三百戶)에 봉하여졌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東方文化交流史論攷(金庠基, 乙酉文化社, 1948)
三別抄와 그의 亂에 대하여(金庠基, 震檀學報 9·10·13, 1939∼1941)
元寇の新硏究(池內宏, 1931). 〈閔賢九〉
안우(安祐)
?∼1362(공민왕 11). 고려 말기의 장군. 본관은 탐진(耽津). 검교중추원사(檢校中樞院事)를
지낸 원린(元璘)의 아들이다.
1352년(공민왕 1) 군부판서(軍簿判書)로서 조일신(趙日新)의 난을 최영(崔瑩) 등과 함께
평정하였고, 이듬해 응양군상호군(鷹揚軍上護軍)으로서 원나라에 방물과 황후탄생일의
예물을 바치고 돌아왔다. 이어 전리판서(典理判書)·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를 거쳐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에 임명되었다.
1357년 참지중서정사(參知中書政事)로서 안주군민만호부만호(安州軍民萬戶府萬戶)를 겸대하였다.
이듬해 원나라의 세력을 배후에 두고 세도를 부렸던 기철(奇轍)을 주살한 공으로 1등공신에
책봉되었으며, 서북면부원수로서 홍건적이 침입하여 의주·정주 등지가 함락되자 이방실(李芳實)
등과 함께 적을 대파하고 퇴각하는 적을 추격, 철주에 이르러 소수의 기병으로 분전하여 적을
크게 무찔렀다.
1359년 홍건적의 잔여무리를 쫓아 고선주(古宣州: 지금의 宣川)에 이르러 수백명의 목을 베고
돌아와 중서평장정사(中書平章政事)·추충절의정란공신(推忠節義定亂功臣)이 되었다. 이어
참지정사를 거쳐, 다음해 상원수가 되어 재차 침입해온 홍건적을 박주·영변 등지에서 대파하고
도원수가 되었으나 절령(#절05嶺)에서 패하여 개성이 함락되었다.
1361년 총병관(摠兵官) 정세운(鄭世雲)의 지휘하에 이방실·김득배(金得培)·이성계(李成桂)·최영·
안우경(安遇慶) 등 여러 장수와 함께 20만 대군으로 개경 탈환전에 참전, 적을 거의 섬멸하고
나머지 적을 추격하여 압록강 밖으로 몰아냈다.
이때 재상 김용(金鏞)과 함께 정세운의 전공을 시기하여 죽였으나, 왕이 이 사실을 알고 장군들을
복주(福州:지금의 安東)로 소환하자 이에 응하여 복주로 갔으나 중문(中門)에서 김용의
하수인에게 살해되었다.
▣ 김태서 -
▣ 김항용 -
▣ 김정중 - 감사합니다
▣ 김재원 -
▣ 김주회 -
▣ 김재익 -
▣ 김은회 -
▣ 김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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