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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문온공 김구용(金九容)(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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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영 작성일06-10-10 17:16 조회1,51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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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문온공 김구용(金九容)(1)

[梯] 사다리이다.

[구제(九梯)]: 동명왕(東明王)의 궁궐 이름이다. 척약재(惕若齋)의 시에 “푸른 구름속에 날듯한 구층 사다리, 길이 없어 처음엔 고개 들고 놀랄뿐[飛梯九級碧雲中, 仰面初驚路不通]”이라 하였다.

<新增東國輿地勝覽卷51, ‘平壤府’ 古跡 ‘九梯宮’>

파루국(把婁國)사람들은 산골짜기에 거주한다. 큰집은 깊숙히 구층 사다리를 설치하는데, 사다리가 많은 것을 호화롭게 여긴다. <陳壽의 志>

척약재(惕若齋): 고려 후기의 문신 김구용(金九容,1338~1384)의 호, 자는 경지(敬之) 본관은 안동이다.

파루국(把婁國): 중국 삼국시대 부여(夫餘)동북쪽 1천리지역 바닷가에 있었던 나라이름 이다.

陳壽의 志: 진수(陳壽)가 지은 ‘삼국지(三國志)’권30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에 보인다.


[催] 급박하다(迫)라는 뜻이다.

[유롱매최(柳弄梅催)]: “버들가지 하늘하늘 봄빛을 머금었고, 매화는 재촉하며 한 해를 보내누나 [柳弄含春線, 梅催送臘花]” <惕若齋集>

척약재(惕若齋): 고려말의 문신 김구용(金九容) 1338~1384의 호. 문집으로 척약재집이 있다.


[湖] 큰 못(陂)이다.

[방적강호(放跡江湖)]: 신우(辛禑) 초에 북원(北元)의 사신이 왔다. 이인임(李仁任)이 그를 맞이 하려고 하자, 김구용(金九容)과 권근(權近)등이 도당(都堂)에 글을 올려 힘껏 간쟁(諫爭) 하였다. 김구용이 이 때문에 죄를 얻어 여흥(驪興)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그는 드디어 강호에 자취를 맡기고 시와 술로써 스스로 즐겼다. <高麗史卷104, 列傳第17 ‘金方慶’>

신우(辛禑): 고려32대왕. 우왕(禑王)1365~1389를 말함. 신돈(辛旽)의 계집종 반야(般若)의 소생이므로 ‘신우’라고 부른것이다. 1374년 이성계의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으로 폐위 되었다가 그 이듬해 강릉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이인임(李仁任): ? ~ 1388 고려후기 권신으로 본관은 성주(星州)이다. 이조년(李兆年)의 손자로 문음(文蔭)으로 벼슬길에 나아가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오르고 광평부원군(廣平府院君)에 봉해졌다.공민왕이 피살된후 우왕을 세우고 반대파를 제거하여 권력을 휘두르다 최영, 이성계등에 의해 쫓겨났다.

도당(都堂): 의정부의 별칭


[官] 임금(君)이란 뜻이다. 섬기다(事)라는 뜻이다. 맡아 다스리다(職)라는 뜻이다.

[학관(學官)]: 이색(李穡)이 대사성을 겸하게 되자 경술하는 선비를 택하였는데 김구용(金九容), 정몽주(鄭夢周) 등이 모두 학관(學官)을 겸하였다.

<高麗史>


[千] 백의 열배.

[양마오천(良馬五千)]: “좋은말 오천필이 언제나 도착할꼬? 복사꽃 문밖에 풀만 무성하구나

[良馬五千何日到, 桃花門外草芊芊]” <金九容, 流大理府作> 우왕(禑王)때 명나라 태조가 해마다 말 오천필을 공물(貢物)로 요구 하였다.

<高麗史卷135, ‘列傳’ 第48 辛禑3>

김구용(金九容): 1338~1384 초명은 제민(齊閔), 자는 경지(敬之), 호는 척약재(惕若齋),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공민왕때 16세로 진사가 되고 그 뒤 문과에 급제하였다. 정몽주(鄭夢周), 박상충(朴尙衷), 이숭인(李崇仁)등과 함께 정주학(程朱學)을 일으키고 척불양유(斥佛揚儒)의 선봉이 되었다. 1384년 명나라와 국교가 난관에 부딪혀 행례사(行禮使)로 명나라로 가던 도중 요동(遼東)에서 붙잡혀 남경으로 압송된 뒤 대리(大理)로 유배되어 가다가 도중에 병사했다.

유대리부작(流大理府作): “척약재학음집(惕若齋學吟集), 동문선(東文選)”등에 이작품은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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