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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외갓댁 고모댁(29)천하명당 김번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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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6-10-11 12:20 조회1,81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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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김씨 세도의 근원 옥호저수형(玉壺貯水形) 김번 묘

경기도 양주군 와부읍 덕소리 석실 마을에는 신안동 김씨(新安東 金氏)의 100년 세도정치를 있게 한 조선 8대 명당 중의 하나인 김번(金 ) 묘가 있다. 술병에 물을 가득 담아 놓은 형국이라는 옥호저수형(玉壺貯水形)의 명당으로 혈판이 마치 옛날 술병과 같이 생겨 자연의 신비함을 주는 혈이다. 묘 뒤는 술병의 주둥이처럼 생겼고 여기서 내려온 입수룡은 술병의 목처럼 생겼으며, 묘가 있는 자리는 호리병의 몸통으로 넓게 기부포전(肌附鋪氈)하고 다시 묘 앞에서 잘록하게 생겨 손잡이인 가운데가 되며 그 아래는 호리병의 아래 몸통으로 넓게 퍼져있다. 이 혈을 쓰고 안동 김씨는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세도 정치를 하였으니 조선 8대 명당중의 하나로 꼽는다.

안동 김씨(安東 金氏)는 본관은 같으면서도 시조를 달리하는 두 파가 있는데 구안동(舊安東)과 신안동(新安東)이다. 구안동 김씨는 신라 경순왕의 넷째 아들 대안군(大安君) 은설(殷說)의 둘째 아들로 고려초에 공부시랑(工部侍郞)을 지낸 김숙승(金叔承)을 시조로 하고 경순왕의 9세손 충렬공(忠烈公) 김방경(金方慶)을 중조로 한다. 김방경의 현손(玄孫)인 김사형(金士衡)이 조선조 개국공신으로 좌의정까지 오르는 등 가문이 번성하였으나 인조반정의 일등공신이며 영의정까지 지낸 김자점(金子點)이 왕실과 외척관계를 이용 세력을 구가 하다가 효종 즉위 후 탄핵을 받아 정치적 몰락을 보면서 가문이 위축되었다. 구 안동 김씨로 유명 인물은 임진왜란 때 진주성 싸움을 승리로 이끈 김시민과 항일 독립운동가인 백범 김구 선생 등이 있다.

이에 비하여 신 안동 김씨는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견훤을 완산에서 대파 그 공훈으로 삼한벽상공신 삼중대광 태사아부(三韓壁上功臣 三重大匡 太師亞父)에 오른 김선평(金宣平)을 시조로 한다. 구 안동 김씨가 고려와 조선 초까지 인물을 많이 배출한 반면에 신 안동 김씨는 조선 중기까지 그리 뚜렷한 인물을 배출하지 못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 정승 15명, 판서 35명, 대제학 6명, 왕비 3명을 집중적으로 배출하여 최고의 가문으로 위치를 굳혔다. 때로는 당쟁의 와중에서 서인(西人)중 노론(老論)에 속해 몇 차례의 사화(士禍)에서사약을 받는 등 영화와 비운이 엇갈리기도 했지만 약 100년 동안 왕권보다 강한 세도정치를 해왔다. 신 안동김씨가 중앙 무대에 명문으로 두각을 나타낸 것은 조선 중엽 광해군 때 김번의 손자인 김극효(金克孝)가 동래 정씨인 좌의정 정유길의 사위가 되면서부터다. 정유길은 광해군의 장인인 류자신을 또한 사위로 두었는데 김극효와 류자신은 서로 동서간이 된다. 신 안동 김씨가 중앙 무대에 진출할 수 있는 배경을 마련한 것이다.

신안동 김씨 12세인 김번은 성종 10년(1479년)에 태어나 중종 39년(1544년) 66세로 타계했는데 그의 부인은 남양홍씨(南陽洪氏)로 그보다 6년 뒤에 죽어 남편 묘에 함께 묻혔다. 전설에 의하면 본래 이 자리는 김번의 처가인 남양 홍씨의 땅으로 방앗간 터였다고 한다. 김번의 백부(伯父)는 일찍 출가하여 세조 때 여러 고승들과 불경을 번역, 간행하는데 종사했고 해인사 중창에도 참여했던 학조대사(學祖大師)였는데 그가 양주 회암사에 머물고 있을 때 조카가 살고 있는 이곳을 방문하였다. 그는 풍수지리에 밝아 이 자리가 천하명당임을 알고 조카 김번에게 알려 주었다. 비록 자신은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지만 가문의 번영을 위해서였다. 부인 홍씨는 김번이 죽자 친정 집을 설득하여 방앗간을 헐고 묘를 쓰는 것을 허락 받았다. 그런데 홍씨 집안에서 뒤늦게 이곳이 명당임을 알고 물을 갖다 부어놓고 물이 나오므로 묘 자리로는 쓸 수 없는 땅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눈치챈 홍씨 부인은 그래도 좋다며 양보하지 않았다. 친정집 보다는 시집과 자기 자손들의 번창을 위해서 친정집 땅을 얻어 남편과 자신이 묻히게 된 것이다.

과연 천하명당의 발복이 시작되어 김번의 손자 김극효는 당시 세도가의 사위가 되었으며, 김극효의 아들 김상용(金尙容)과 김상헌(金尙憲)이 나란히 정승에 올랐다. 김상용은 인조반정 후 서인의 한사람으로서 우의정을 하였는데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왕족을 보호하여 강화로 피난했다가 강화성이 함락되자 화약에 불을 질러 자살한 인물이다. 청음(淸陰) 김상헌은 좌의정을 했으며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의 강화를 끝까지 반대하다가 심양에 잡혀가 6년간 유배 생활을 했던 척화파였다. 그는 심양에 끌려가면서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라는 시조를 지었다. 안동 김씨를 흔히 장동(壯洞) 김씨라고도 부르는 이유는 청음 김상헌이 지금의 서울 효자동 근처인 장동에서 살았기 때문이고 특히 그의 직계 후손들이 정승 판서와 왕비가 줄줄이 배출되었기 때문이다. 후손들 중 김수항(金壽恒)과 김창집(金昌集) 부자는 현종과 숙종 때 모두 영의정을 하였으며, 김이소(金履素)는 좌의정, 김창집의 현손인 김조순(金祖淳)은 순조의 장인으로 국정을 총괄하여 세도정치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이후 김조순의 아들인 김좌근(金左根)의 딸이 헌종의 왕비가 되었으며, 김문근의 딸이 철종의 왕비가 되면서 김흥근, 김병국, 김병학, 김병태 등 안동 김씨 10촌 안팎의 형제 조카가 돌아가며영의정과 조정대신에 올라 국정을 장악하였다. 이후 흥선대원군이 등장할 때까지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는 계속되었다. 이 밖에도 유명한 인물로는 김삿갓으로 유명한 김병연과 한말 김옥균과 청산리대첩의 김좌진 장군 등이 있다.

신안동 김씨의 번영을 갖아다 준 김번의 묘는 괴혈(怪穴)로서 정확한 혈을 점지(點地)하기가 어려운 자리다. 보통의 혈은 용이 행룡을 다하고 멈춘 곳에 결지하는 것인데 이곳의 경우 혈을 결지하고도 용이 다시 앞으로 나가 잘록하게 기를 묶어주고 혈장과 비슷한 것을 만들고 멈추었다. 보통의 눈으로는 현재 묘가 있는 곳보다 앞의 펑퍼진 곳이 혈로 착각할 수 있는 곳이다. 왜냐하면 김번 묘 앞에서 산 능선을 잘록하게 묶어준 곳이 결인속기처로 볼 수 있으며 약간 볼록하게 솟은 펑퍼진 곳은 기부포전(肌附鋪氈)한 혈장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곳을 하늘이 감추고 땅이 숨기고 있다가 유덕(有德)하고 적선(積善)한 사람에게만 보여준다는 천장지비(天藏地秘)한 혈로 보는 것이다. 아무리 높은 풍수 실력을 갖추고 있다하더라도 속기 쉬운 장소다. 사실 몇 번 이곳을 답사한 필자 역시 현재 묘가 있기 때문에 그곳이 혈이라고 생각하지 만약 묘가 없었다면 그곳을 과연 혈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지 스스로에게 의문을 품어보았다.

이와 같이 용진처(龍盡處)가 아닌 행룡하는 용이 잠시 머뭇거리듯 주저앉아 혈을 결지하고 다시 진행 방향으로 행룡하여 나가는 것을 섬룡입수(閃龍入首)라고 한다. 마치 눈 깜짝할 사이에 혈을 결지하고 지나갔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혈장 4요건인 입수도두, 선익, 순전, 혈운이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아 찾기가 매우 어려운 혈이다. 이러한 혈을 기룡혈(騎龍穴)이라고도 하는데 혈이 용의 등을 타고 있는 모습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기룡혈은 찾기가 어려운 만큼 그 발복이 매우 크다. 이 때문에 욕심 많은 사람들이 결록이나 비기에 나와 있는 곳을 찾아다니는데 자칫 잘못하면 과룡처(過龍處)를 섬룡입수한 곳으로 착각하여 오장(誤葬)을 할 수가 있다. 만약 과룡처에 입장(入葬)하면 `삼대내절향화(三代內絶香火)"라 하여 패가망신(敗家亡身)은 물론 절손(絶孫)의 우려가 있는 매우 흉한 곳이다.

김번 묘 주변의 산은 모두 낮은 야산으로 태조산은 천마산(812.4m) 이다. 백두대간룡의 철령 이북 추가령에서 분맥한 한북정맥이 서울을 만들고 파주 교하까지 가는데 포천 운악산(935.3m)을 지나서 한 맥을 뻗어 포천 내촌면 베어스타운스키장이 있는 주금산(813.6m)을 만들고 다시 진접읍 철마산(711m)을 거쳐 남양주군 화도 천마산을 파군성(破軍星)으로 기봉한다. 기세 장엄한 천마산에서 출발한 주룡은 46번 경춘가도 마치터널이 있는 마치고개에서 크게 과협한 다음 백봉(589.9m)을 만드는데 백봉에서 아르네미 고개(485.5m), 수리봉(354m), 배나무골 산(164m)으로 내려와 김번 묘의 주산을 기봉하는데 높이는 86m에 불과하다. 이것은 태조산인 천마산의 험한 살기가 행룡 과정에서 개정천심, 기복, 과협, 박환 그리고 수많은 요도지각을 뻗치면서 변화하여 모두 탈살하여 깨끗하고 정제된 순수한 생기로 변화하였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와부읍 덕소리 석실 마을 주변의 모든 산들은 야트막하면서 순한 토산으로 이루어져 있다.

김번 묘 좌측의 주산은 탐랑 귀인성으로 횡으로 중심맥을 뻗어 짧지만 기세있게 변화하면서 내려와 결인속기(結咽束氣)하고 다시 살짝 올라가 마치 술병 입구 모양의 능선을 만든 다음 횡으로 입수룡을 내려보냈다. 주능선은 계속 전진하여 묘 우측으로 혈을 감싸 안아준 백호를 만든다. 주산에서 좌측으로 뻗어 혈을 감싸준 청룡은 빼어나게 아름답고 그 뒤로 외청룡은 혈 앞으로 청룡 안산을 이룬 다음 백호 뒤까지 감아주었다. 혈에서 보이는 모든 산들이 모두 이곳을 향해 배알하듯이 시립 해 있다. 명당은 평탄 원만하며 외파구(外破口)는 백호 끝으로 정미파(丁未破)가 되고 좌측에서 나온 물이 혈 앞을 옥대처럼 감싸 안아주면서 좌측으로 흘러가니 좌향을 자좌오향(子坐午向)으로 하여 팔십 팔향법으로 부귀왕정(富貴旺丁)하는 자왕향(自旺向)을 하였다. 그런데 기룡혈(騎龍穴)의 경우 내파구(內破口)는 양쪽으로 되기 때문에 양파(兩破)를 모두 보고 좌향(坐向)을 결정해야 된다는 이론도 있다.

횡룡입수하는 입수룡에는 반드시 뒤를 받쳐주는 후장인 귀성이 있어야 하는데 여기서는 물이 들어오는 병 입구로 귀성이 없다. 그러나 술병에는 반드시 병마개가 있어야 하므로 뒤에 병 입구와 알맞은 크기의 낙산이 있다. 병목에 해당되는 능선은 입수룡이고 호로병 첫 둥근 부분에 혈을 맺고 다시 잘록 해진 다음 다시 둥근 형태로 되어 능선이 끝나는데 아래 부분 하단에는 요석이 빙 둘러 박혀 있다. 이는 기가 앞으로 새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매우 귀한 돌이며 이 돌 하나에 정승 판서가 하나씩이라고 한다. 혈을 중심으로 전후좌우 산들이 비슷한 거리와 크기로 있으니 천심십도(天心十道) 정혈법으로 혈을 찾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청룡에 비해 백호가 강하고 가깝다. 백호 끝이 불끈 올라와 본손(本孫) 보다는 지손(支孫)이 잘되고, 장자(長子) 보다는 차자(次子)들이 잘되고, 남자의 능력보다는 여자들의 능력에 의해서 부귀를 하는 자리라고 한다. 또 청룡이나 백호 모두 처음 보다는 끝이 더욱 강해 반골(叛骨)의 형상이다. 조선 8대 명당으로 손꼽히는 이곳 주변에는 김상해, 김극효, 김상헌, 김상용, 김창협 묘와 그 후손들 묘가 있으며, 지금은 아파트나 도로 개발로 지형이 많이 손상되어 있다.


자료 제공 형산 정경연

 

 

묘비명의 글씨는 동고공 김로 선조님이 쓰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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