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담 김시양 연구(석사학위 논문)-본론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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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6-10-16 14:38 조회1,509회 댓글0건본문
2. 1. 生涯
金時讓은 16,7세기에 활동했던 文人으로 文章이 뛰어나고 學識이 해박하여 이름이 높았으며 인격이 淸廉潔白하고 嚴正剛直하였던 淸白吏이다.1) 本貫은 安東으로 宣祖 14년(1581) 충북 괴산군 문광면 문법리에서 比安縣監을 지냈으며 좌찬성으로 추증된 아버지 仁甲과 어머니 南陽洪氏 사이의 6남 3녀 중 6남으로 태어났다. 初名은 時言이고 자는 子中이며 호는 荷潭이고 시호는 忠翼이다. 신라 경순왕의 후예로 高麗末 몽고 침략과정에서 공을 세운 金方慶의 12대손으로 金顧(左司諫)-金孟廉(監察)- 金哲鈞(主簿)- 金壽亨(贈承旨)-金彦黙(贈吏參)으로 이어진다. 조부는 進士인 錫인데 지조가 있고 문장이 뛰어나 세상에서 추앙되었으나 己卯士禍에 연좌되어 충북 괴산에서 隱遁하며 벼슬길에 나서지 않았다. 후에 議政府領議政에 추증되었다. 조모는 幸州 奇氏 司憲府 持平 逈의 딸이다.2)
金時讓은 어려서부터 두각을 나타내고 기백이 남달라 집안 어른들이 가문을 크게 일으킬 인물로 기대하였다. 그의 기억력은 어려서부터 유명했는데 한 번 본 것은 결코 잊지 않았다. 어릴 때 어떤 집 벽에 전답의 結數를 記錄한 것을 보았는데 잠깐 본 것인데도 일생 동안 잊지 않았다고 한다.
仁祖 때 淸나라 사람들이 인삼 수천 근을 보내 푸른 베와 바꾸려고 한 적이 있었다. 이 때 정부에서는 쌀과 베로 매매하여 淸나라의 요구에 응했는데, 5년이 지난 후 淸나라에서 수량이 부족하다고 問題를 제기하였다. 그러나 金時讓은 당시 각 고을에서 나눠 받은 것의 많고 적음과 각 도의 감사와 비변사에서 결과를 보고한 날짜까지 모두 입으로 외우고 글로 썼다. 후에 장부를 얻어 확인하니 조금도 차이가 없었다. 임금이 “세상에 드문 총명이다.” 라고 찬사하였다.3)
김시양은 壬辰倭亂 와중에 연달아 부모를 여의었다. 당시의 나이가 12~14세였으나 그는 험한 상황과 슬픔 속에서도 어른처럼 상사를 처리하여 주위를 놀라게 했다. 18세(1598, 선조31)에 益齋 李齊賢의 후손이며 군수인 大遂의 딸 慶州 李氏와 혼인하여 2남 3녀를 두었다.
부모의 장례가 끝나자 學問에 더욱 정진하여 25세(1605, 선조38)에 문과에 합격하여 弘文館에 들어갔다. 당시 정승으로 있던 完平 李元翼(1547-1634)과 白沙 李恒福(1556-1618)이 그를 한 번 보고 나라를 이끌어갈 인물로 인정하였다. 26세 (1606, 선조39)에 假注書가 되었고, 27세(1607, 선조40) 여름에 承政院注書 兼 春秋館記事官이 되었다. 28세에는 承文院 注書가 되었다. 宣祖 41년에 宣祖의 국상을 만나 당황하고 복잡한 때인데도, 그는 記事를 재빨리 처리하여 주위 사람들이 모두 칭찬하였다. 얼마 후 承文院 注書로 6품에 올랐다. 29세(1609, 광해1)에는 禮曹佐郞을 거쳐, 義郞知製敎로 승진하였다가 갑자기 兵曹로 옮겨졌다.
30세(1610 광해2) 8월, 冬至使의 書狀官으로 중국 연경에 다녀왔다. 金時讓이 서장관으로 갈 때 許筠이 전송하며 보낸 글이 許筠의『惺所覆瓿藁』에 전한다. 4) 이 때 김시양은 역관들의 횡포를 철저히 막는데 큰 힘을 쏟았다. 32세(1612)에 書狀官으로 중국에 다녀온 것에 대한 공으로 半熟馬 1필을 상으로 받았다.
辛亥(1611) 光海君 3년에 조정에 돌아와 「見聞錄」을 아뢰어 關外의 형세를 논하여, “遼陽에서 山海關으로 통하는 길은 북으로 오랑캐 경계와 가깝고, 동으로는 해안과 가까우나 모두 발호하는 오랑캐가 있으므로, 이 길은 틀림없이 앞으로 막히어 우리와 명나라와는 통할 수 없을 것이므로 오로지 水路를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5) 라고 하였다. 그러나 당시 요동의 왼쪽은 경계할 必要가 없었으므로 사람들 모두가 그렇게 여기지를 않았다. 그 후 辛酉(1621) 光海君 13년에 요동길이 끊겨 연경에 가는 使臣이 海路를 통하면서 물에 빠져 죽는 일이 계속되자, 사람들이 비로소 金時讓의 앞을 내다보는 눈에 탄복을 하였다
1) 이영춘외 지음. 『朝鮮의 淸白吏』, 가람기획, 2003, p.281.
4) 許筠, 『惺所覆瓿藁』, 文部 2, 「北京金子中序」.
5)『荷潭文集』卷之八, 「遺事」, p.526. “自遼陽通山海關之路, 北逼虜境, 東迫海岸, 脫,有跋扈之虜, 則此路必先壅而不通我國朝天, 不可全忘水路, 時遼左無警, 人皆不以爲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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