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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담 김시양 연구(석사학위 논문)-본론(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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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6-10-18 06:53 조회1,45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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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은 疎庵 任叔英(1576-1623)이 김시양에게 부친 시이다.


   신유년에 오랑캐가 요동을 함락하여 점거하고 있으므로, 북경에 가는 사신들이 다 바닷길을 택하게 되었는데 서로 이어서 익사하였다. 그 때 나는 영해에 귀양가 있었는데 소암 임숙영이 나에게 시를 보내기를


    如何忘海路          어찌하여 바닷길을 잊었던고

    關外虜頻圍          요새 밖은 오랑캐가 자주 포위한다네.

    此語從誰出          이 말 누구에게서 나왔던가?

    多君早見機1)       그대가 기미를 일찍 본 것이 많네.


소암이 辛酉年에 과거에 급제하고 承文院에서 벼슬을 하고 있었는데, 槐院에 있는 문서에서 그가 올린 견문록을 보고 앞을 내다보는 지혜에 탄복하여 지은 詩이다.

다음 詩는 그가 任叔英에게 지어 보낸 것이다.


    海上舟如馬          바다 위에서는 배가 말과 같고

    燕雲報合圍          燕州와 雲州가 전부 포위되었음을 알려오네

    淸詩如喚寐          그대의 詩 잠에서 일깨워 주는 것 같아

    憶中愧知機2)       추측으로 맞춘 일을 기미를 안다하니 부끄럽네.


  일찍이 見聞錄 중에서 우리나라가 中國에 갈 때 海路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 있었는데 보내온 시에 기미를 잘 살폈다고 하였기에 任叔英의 韻에 따라 지은 詩이다.3)


이와 같이 시를 짓게 된 이유가 적혀있다.       

앞서 살폈듯이 金時讓은 이 같은 光海君의 움직임에 매우 批判的인 입장을 견지한 것으로 인해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의금부에서는 임금을 모욕하였다는 죄로 극형에 처하기를 아뢰었다. 그러나 당시의 정승 李恒福이 金時讓의 재주를 아껴 힘써 구원했기 때문에 사형에서 감형되어 함경도 종성으로 귀양을 갔다. 이 때 그는 죄인으로서의 심정을 시로 표현해 놓았다. 마음과 행동이 하늘과 해를 속이지 않아 자신은 떳떳하다고 했다. 하늘에 부끄럽지 않은 자신의 행위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 했으며, 이는 생사를 초월한 그의 인생관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光海君 10년(戊午 1618)에 오랑캐의 경계 때문에 寧海로 배소를 옮기는 것을 시작으로, 북쪽에서 남쪽으로 무려 12년의 궁핍하고 괴로운 流配生活을 하였다. 그는 당시 참기 어려운 고통의 생활을 편안한 듯이 처신하면서 오직 經書와 史書에 스스로 재미를 붙여 오로지 學問에만 열중하였다.

종성은 六鎭의 하나로 국경 지역이어서 그 당시 이곳에는 文學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없었는데, 그가 그곳으로 流配를 가고부터 배우러 오는 사람들이 많았고, 열심히 학문에 정진하여 이름이 조정에 등재한 자가 이때부터 계속 이어졌다. 후에 이곳 사람들은 그가 歿하자 그를 추모하기를 그치지 않아 그를 賢人에 끼어 제사 지냈는데, 이는 潮州 사람들이 韓愈를 사당에 모셨던 것과 같은 도리였다고 한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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