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담 김시양 연구(석사학위 논문)-본론(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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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6-10-24 14:19 조회1,617회 댓글0건본문
46세(1626, 仁祖4)에 仁獻王后 禮葬都廳을 준공한 공으로 司導寺正에 통정대부에 加階되었고, 慶尙道觀察使 兼 巡察使가 되었다. 영남 땅은 커서 가장 다스리기 어렵다고 하는데, 金時讓은 마음이 淸廉하고, 밝고 위엄과 신의가 있어 百姓들을 잘 보살피고 다스렸다. 그가 경상도 순찰사가 되어 영남을 두루 순시했는데 어떤 고을의 수령이 세금을 납부할 기일을 어긴 사실을 밝혀냈다. 이에 그는 수령을 잡아다가 엉덩이를 벗기고 곤장을 치려했다. 그 때 문 밖에서 한 사람이 급히 뛰어 들더니 몸을 던져 죄수의 발가벗겨진 엉덩이를 가렸다. 자세히 보니 바로 자신의 사위였다. 金時讓이 묻자 그 죄인이 바로 사위의 숙부라고 하였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사위에게 소리치며 사위 하나 때문에 법을 집행하지 못하겠느냐 하고 나졸들을 시켜 사위를 끌어내게 하고 다시 매질을 가했다. 이처럼 金時讓은 사사로움에 얽매이지 않고 公正하게 政事에 임했던 淸廉潔白하고 엄정한 선비였다.1)
金時讓이 47세(1627, 仁祖5) 때에 후금이 여진족을 이끌고 조선을 공격하여 丁卯胡亂을 일으켰다. 결과 후금과 조선은 兄弟의 盟約을 맺고 休戰하였다. 조정에서는 후금이 언제 다시 공격할지 몰라 金時讓을 平安道 都元帥로 삼아 방비하도록 하였다. 이 때 후금에서 사신을 보내 과도한 공물을 요구하자, 당시 조정의 논의는 후금과 화친을 끊고 일전을 벌이자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金時讓은 朝鮮의 국력으로는 후금과의 섣부른 戰爭을 할 수 없다며 당시 뛰어난 武將이었던 鄭忠信, 李曙 등과 함께 후금과의 戰爭을 반대하는 上疏文을 올렸다.
그는 이 일로 인해 다시 귀양을 가게 되었으나 후일 丙子胡亂의 참극이 일어나자 그가 주장했던 和親論은 戰爭을 예방하고자 하였음이 증명되었다.2)
1) 이용범,『인생의 참스승 선비』,「荷潭 金時讓」, 바움출판사, 2004, p.234.
2) 이영춘외,『朝鮮의 淸白吏』, 가람기획, 2005, p.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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