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갓댁 고모댁(31) 공주판관공(김윤선)의 사위 칠원윤씨 尹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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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6-10-31 13:07 조회1,508회 댓글0건본문
문온공-부사공(김명리)-직제학공(김맹헌)-첨정공(김자양)-참판공(김예생)-공주판관공(김윤선)
우리 안김최초의 족보인 경진보의 초고를 만드신 공주판관공(金胤先)은 삼남(1.震楊.2.震章. 3.震長, 4. 震業)4녀를 두시었습니다.
큰 사위는 尹伊입니다. 현감을 지내신 공은 칠원윤씨이십니다.
윤이와 안동김씨사이에서태어난 重湖선생 尹卓然 은 칠원윤씨에서 자랑하는 인물입니다.
칠원 윤씨 (漆原尹氏)
칠원은 경상남도 함안군에 위치했던 지명으로, 본래 신라 칠토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칠원윤씨(漆原尹氏)는 남한에 총 10,815가구, | |
3> 집성촌 | |
충북 제천군 봉양면 장평리 |
경남 거제군, 합천군 일원 |
충남 청양군 일원 |
윤탁연(尹卓然
1538(중종 33)∼1594(선조 2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칠원(漆原). 자는 상중(尙中), 호는 중호(重湖). 우봉현령 이(伊)의 아들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58년(명종 13) 진사시에 합격하고 1565년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에 보임되었고 승정원주서를 거쳐 1568년(선조 1) 전적·사간원정언을 역임하고 천추사(千秋使)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홍문관수찬이 되어 지제교검토관·춘추관기사관을 겸임하였으며 《명종실록》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1574년 주청사(奏請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사헌부지평·장령·교리·검상·사인 등을 역임하고 이듬해 외직으로 동래부사·상주목사를 지내면서 선정으로 치적을 남겼다.
1580년 좌승지·도승지·예조참판을 지내고, 1582년 영남지방에 대흉년이 들자 왕이 그의 재능을 믿고 경상도관찰사로 특채하였다.
이듬해에 형조참판으로 형조에서 죄인을 다스릴 때 임부를 장형(杖刑)에 처하여 낙태치사하게 한 책임을 지고 좌천되었다가 1585년 경기도관찰사에 올랐다.
그뒤 한성부판윤에 승진하고 세 차례의 형조판서와 호조판서를 지냈다.
1591년 종계변무(宗系辨誣)의 공으로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에 책록되고 칠계군(漆溪君)에 봉하여졌으며, 특히 비변사유사당상(備邊司有司堂上)을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을 모시고 북으로 가던 도중 검찰사(檢察使)에 임명되었는데, 그때 함경도지방에는 이미 적이 육박하였으며, 함경도에 피난하였던 왕자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이 회령에서 북변반민(北邊叛民)과 적에게 아부한 무리들에 의하여 적의 포로가 되자 조정은 근왕병(勤王兵)을 모아 적을 격퇴시킬 계획을 세웠다.
그는 왕의 특명으로 함경도도순찰사가 되어 의병을 모집하고 왜군에 대한 방어계획 등 시국타개에 노력하다가 그곳에서 객사하였다.
송익필(宋翼弼)·이산해(李山海) 등과 팔문장가의 한 사람으로 시문에 능하였다. 함흥의 창의사(彰義祠)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계사일록 癸巳日錄》이 있다. 시호는 헌민(憲敏)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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