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담 김시양 연구(석사학위 논문)-본론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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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6-11-02 17:27 조회1,397회 댓글0건본문
63세(1643, 仁祖21) 5월 초4일에 병으로 忠州 荷潭里 私第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63세였다.1) 부고를 임금께 알리니 슬퍼하며 애도하여 조회에 입회하는 것을 이틀 동안 중지하고 禮官을 보내어 제사를 내리고, 致賻와 棺槨과 造墓軍을 내려주었다.2) 8월 18일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 子坐午向 선영하에 안장하였다.
숙종 7년 8월에 金尙憲, 조석윤, 정은을 제사지내는 회령의 사당에 위패를 봉안하고 함께 제사 지내게 하였다.
숙종 16년 5월 13일 右議政 金德遠이 沈喜壽와 함께 시호를 내릴 것을 청하여 肅宗 17년 7월 21일 忠翼의 시호를 받았다.
金時讓의 성품은 엄격하고 굳세며, 도량과 재간이 높고 온전하며, 마음이 공정하고 행실은 淸廉하고 깨끗했으며,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지조가 있었다. 論議에는 기개가 있었고, 사직하는 말에는 널리 근심함이 있었다. 비록 아무 근심 없이 한가히 혼자 있을 때라도 하루 종일 바르게 앉아 일찍이 피로해 하지 않았으며, 한 집안에서 평생을 곁에서 모셨던 사람들도 그가 한 번도 나태하거나 산만한 모습은 보지를 못하였다.
55세(1635년, 仁祖13)이후에 고질병이 몸에 생겨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쇠약해졌어도 오히려 반드시 밤이 깊으면 잤다가 새벽이면 일어나서 솔선하여 평일에도 孟子를 암송하고, 詩는 올바른 朱子와 韓愈의 문장에 생각을 붙였다. 병이 깊어 질 때까지도 반드시 머리를 빗고 세수를 하여 冠을 바로 쓰고 앉아 있었기 때문에, 屬纊하는 아침까지도 평소처럼 몸가짐을 단정하게 하였으며, 그날 萬章 한 篇을 평소 때와 같이 암송하였다.3)
의지로 氣를 끌고 절명에 임했으면서도 조금도 자세가 흩어 지지 않아 집안사람들은 그렇게 병세가 급한 줄을 깨닫지 못했다. 그는 평생에 산업을 경영하지 않아 검약함을 지키고, 즐기고 좋아하는 것을 끊었으며, 직위가 卿相에 이르렀어도 서울 근방에 한 칸의 집이 없어 항상 세를 내어 살았다. 처자식들은 여러 사람들이 빌려주고 대주어 근근이 살아갔지만 그는 즐겁게 처신하며 만날 때마다 편안해 하였다.4)
참으로 의로운 것이 아니면 털끝만큼도 망령되게 취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호조판서와 병조판서가 되었어도 대문에 저자 무리를 끊어 關節이 이르지 않았으니 숙연하기가 마치 가난한 선비의 집 같았다. 그야말로 청백리에 조금도 손색이 없는 朝鮮時代의 淸廉潔白한 선비였다.
2)『仁祖實錄』 44권, 仁祖 21년 5월13일(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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