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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담 김시양 연구(석사학위 논문)-본론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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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6-11-06 10:02 조회1,47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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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交遊

荷潭은 淸廉剛直하여 벗을 사귐에도 取捨가 있어 단 한 사람의 권신과도 교유하지 않았다. 仁祖反正 이후 反正功臣들이 득세하던 시기에 공신이 아니면서도 왕의 총애를 받을 수 있었던 것에서 그가 얼마만큼 淸廉剛直했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는 선배, 동료, 후배들과 나이에 관계없이 禮儀를 갖추며 交遊하였다.

선배로는 李恒福과 金庭睦, 李潤雨, 鄭逑등이 있다. 金庭睦은 長興 府使로 20년 연상인 사람으로 試題事件 조사 때 問題의 試題를 냈으면서도 선택의 책임은 掌試官에 있다고 말하여 그를 난처하게 했던 사람이지만 탓하지 않고 流配地 경계 상에서 만나 시 화답을 하곤 했던 사람이며, 李潤雨는 12년 연상이지만 종성 流配時節 함께 생활하며 知己로 지내던 사람이며 가장 많은 시를 주고받았던 사이였다. 그리고 光海君 때 대사헌으로 臨海君을 구출했던 鄭逑는 이황의 제자인데 조정에서 禮論으로 논쟁이 벌어졌을 때 荷潭이 신랄하게 비판하였지만, 그가 죽자 儒門의 대들보가 꺾였다고 하며 죽음을 哀悼하는 輓詩를 보냈던 사람이다. 그 밖에도 金湜, 徐景雨, 李馨甫, 金聲發, 李命俊, 절친했던 친구 李聖求의 父親인 李睟光 등이 있다.

동료로는 李聖求(1584-1644), 鄭世規(1583-1661), 李植(1584-1647), 任叔英(1576-1623), 李時發, 鄭百昌(1588-1635), 張維, 睦取善, 許筠, 申欽의 아들 申翊聖, 徐渻, 尹善道, 金地粹, 蔡裕後 등이 있다. 이들은 모두가 당시의 文士, 學者, 節義의 인물들이었다. 荷潭은 당시 黨爭의 論議가 이미 고질화된 상황 속에서도 그 時論이 항상 客觀的이며 公正性을 잃지 않았다. 黨色上으로 南人 系列에 속해 있었지만 결코 한 쪽으로 기울어지지 않고 폭 넓은 雅量과 開明한 觀點을 유지하였다. 따라서 西人과 老論系 人士들도 荷潭의 作品에 대해서는 拒否感 없이 읽고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荷潭의 卓越한 歷史的 位相과 그의 교유관계가 어떠했었나를 알 수 있다.1) 이와같이 그의 대인 관계를 깊이 이해함으로써 學問的 背景과 思想的 背景을 확실히 알 수 있다.

한학 사대가의 한 사람인 澤堂 李植과는 절친한 사이로 ‘評事 李汝固 植에게 주는 글2)’이『荷潭文集』「書」에 남아 있다. 여기서 그는 蘇東坡와 孔子에 대해 다음과 같이 論했다.


  王道를 언급한 것은 孟子로부터 시작되었다. 孟子의 말에 이르기를, “文王은 100리로써 하였고, 湯도 70리로 하였다.” 하였으니 王道를 행함은 크고 작음에 있지 않은 것이요,  등문공의 나라는 큰 것은 자르고 작은 것은 보태어 50리를 가지고 湯과 서로 겨룰 수 있다. 단지 20리라도 오히려 왕자의 일어남이 있다고 말하면 반드시 와서 법을 취하여 이것은 왕자의 스승도 되었다. 등의 땅이 비록 작다하나 왕정을 행할 수 있으면 왕이라 할 수 있다.” 고 하였다. 孟子가 이와 같이 말한 것은 어째서인가. 세대가 이미 내려와서 湯과 文王 때는 형세가 같지 않기 때문이다.3)



1) 李佑成, 『荷潭文集』, 「賀辭」, p.4.


2)『荷潭文集』卷之九, p.286.


3)『荷潭文集』卷之九, p.286. 「與李評事汝固(植)書」, “言王道自孟子始,  孟子之言曰,  文王以百里,  湯以七十里 王道之行,  不在大小也,  滕文公之國,  折長補短,  將五十里與湯相爭者,  只二十里 , 猶曰有王者起, 必來取爲王者師,  滕地雖小, 能行王政, 可以王矣,  而孟子之言如此者何哉, 世已降而與湯文之時, 勢不同故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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