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갓댁 고모댁 (32)도사공(김대섭)배위 청송심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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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6-11-16 11:48 조회1,538회 댓글0건본문
도사공 (김대섭)배위 청송심씨
도사공(김대섭)의 배위는 청송심씨로서 친정아버님은 경기도 관찰사를 지낸 沈銓이시다.
심전은 현감 李翰의 딸과 혼인하여 友善, 友俊. 友勝. 友醇 4형제와 서자로서 소위 강변칠우의 한사람인 友英이 있고 큰딸은
金光斗에게. 둘째딸은 鄭文起. 막내따님이 바로 도사공(金大涉)에게 시집갔다.
심전은 심달원 (+이조참판 윤희인의 따님)의 4남중 삼남이다.
심달원은 승문원좌통례를 지내으며 형은 영의정 연원, 동생은 좌의정 통원이며 심통원의 현손이 인조때 영의정을 지낸 심기원이다.
심달원의 아버지는 증영의정 심순문(+평산신씨 감찰 심영석의 딸)이며 할아버지는 증좌찬성 심원이다.
증좌찬성 심원의 아버지가 바로 심덕부의 다섯째 아들인 심회이다. 심덕부의 딸이 바로 세종대왕비인 소헌왕후이니 심온은
세종대왕의 처남이다.
의인심씨(김대섭의 배위)의 직계 조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아버지 =심전(沈銓)-심달원(沈達源)-심순문-심원-심회(沈澮)-
심온(沈溫)-심덕부(沈德符)
심달원(沈達源)
1494(성종 25)∼?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자용(子容). 연산군 때 갑자사화에 화를 입은 순문(順門)의 아들이며,
영의정 연원(連源)의 동생, 좌의정 통원(通源)의 형이다.
금천현감(衿川縣監)을 지낸 형(泂)에게 입양되었고, 인조 때 영의정을 지낸 기원(器遠)의 4대조이다.
1517년(중종 12)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정자에 제수되었고, 이어서 부수찬에 올랐다.
1519년 이조좌랑이 되었으나 기묘사화가 일어나 반대파의 탄핵을 받아 외방으로 귀양갔다.
1522년 죄가 사면되어 성균관직강에 임명되었으나 대간들의 탄핵으로 곧 체직되었다.
그뒤 1530년 오위의 호군이 되었으나, 뇌물수수혐의로 탄핵되어 파직되었다.
그러나 한어(漢語), 이문(吏文)에 통달하였기 때문에 해당 관청에서 강력히 추천하여 1533년 승문원판교에 임명되어
외교문서 작성에 많은 공로를 세웠고, 이문교육에 이바지하여 중종의 신임을 받았다. 벼슬은 통례원좌통례에 이르렀다.
심달원은 심순문(+신숭겸후예 평산신씨 감찰 심영석의 딸)4남중 2남이다.
심순문의 1남은 심연원으로 영의정을 지냈으며 그의 손녀가 명종비인 인순황후이다.
심연원(沈連源)
1491(성종 22)∼1558(명종 1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맹용(孟容), 호는 보암(保庵). 영의정 회(澮)의 증손이며, 사인 순문(順門)의 아들이다.
김안국(金安國)의 문인으로, 1516년(중종 11) 생원이 되고, 1522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승문원권지정자(承文院權知正字)를 거쳐 예문관에 들어가 검열·대교·봉교를 역임하였다.
감찰(監察)과 공조·예조·이조의 좌랑을 거쳐, 1526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병과로 급제하고 1531년에는 검상·사복시부정(司僕寺副正)을 거쳐 진휼경차관(賑恤敬差官)에 뽑혀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였으며, 1533년 의주부사에 올랐다.
1537년에는 동부승지가 되고, 2년 뒤 예조참판으로 진향사(進香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병조참의·대사간을 역임하였다.
1541년에 대사성, 이듬해 특진관(特進官)·형조참판, 1543년 한성부판윤, 다음해 호조참판이 되었다.
1545년(명종 즉위년) 호조판서로 지경연사(知經筵事)를 겸임하였다. 이해 을사사화가 일어나 위사공신(衛社功臣) 2등에 녹훈되고, 청성군(靑城君)에 봉해진 뒤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로 《인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547년 좌참찬·예조판서·우찬성·판의금부사·좌찬성 등을 거쳐, 우의정에 오른 뒤 좌의정을 거쳐 1551년 다시 영의정이 되었으며 청성부원군(靑城府院君)에 진봉되었다. 문장에 능하고 일처리에 세밀하였으며, 특히 중국과 우리나라의 지리에 밝아서 혹 남의 질문을 받으면 직접 자신이 목격한 것처럼 막힘없이 응대하였다.
일찍이 그가 탐라목사로 있을 때 그곳 산천을 살펴 지도를 그려두었는데, 1555년 남해변에 많은 해구(海寇)가 침입하였을 때, 가장 요충지역이던 탐라가 당시 그가 그려둔 지도에 의거하여 대응책을 세워 막아내자 사람들이 그의 선견지명에 감복하였다 한다. 명종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충혜(忠惠)이다.
2남은 바로 심달원이며
3남은 심봉원
심봉원(沈逢源)
1497(연산군 3)∼1574(선조 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희용(希容), 호는 효창노인(曉窓老人). 사인(舍人) 순문(順門)의 아들이며, 영의정 연원(連源)과 좌의정 통원(通源)의 동생이다. 어려서는 악동들과 어울려 놀기를 즐겼으나, 나이가 들면서 깨닫고 공부에 힘써 20세에 성균관에서 학문을 익혔다.
1537년(중종 32)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성균관학유(成均館學諭)가 되어 의정부사록(議政府司錄)을 겸하였다.
이듬해 탁영시(擢英試)에 병과로 발탁되어 사과(司果)에 제수되었고, 그뒤 사간원정언을 거쳐 인종이 즉위하자 사헌부헌납이 되어 경연에서 기묘사화 때 억울하게 처단된 조광조(趙光祖)의 신원을 진언하였다.
명종이 즉위하자 소윤(小尹)의 편에 서서 대윤(大尹)의 거두인 유관(柳灌)·유인숙(柳仁淑) 등을 탄핵, 숙청하였다. 이어서 사헌부장령·홍문관교리·사간원사간·성균관사예·홍문관전한 등 청요직을 두루 역임하고, 1553년(명종 8) 승정원에 들어가 왕의 측근에서 오랫동안 보필하였다.
그뒤 예조참의·동지돈녕부사를 역임하다가 노환으로 사임하였다. 음률(音律)·의술(醫術)·서법(書法)에도 밝았다.
4남은 우의정을 지낸 심통원이다.
심통원(沈通源)
1499(연산군 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사용(士容), 호는 욱재(勗齋). 아버지는 순문(順門)이며, 영의정 연원(連源)의 동생이다. 어려서부터 천재로 불렸으며 1537년(중종 32)에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또한 1546년(명종 1)에 문과중시(文科重試)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부응교로 등용된 뒤 시강관(侍講官)으로 임금의 학문을 돕다가 직제학이 되어 조정의 공문서를 도맡아 작성하였다.
그뒤 병조참지가 되어 국방에도 관여하고 1548년에 우승지·좌승지를 거쳐 경상도관찰사를 지내고, 1550년에 예조참판이 되었으며, 이어서 대사헌·형조참판·한성부판윤을 거쳐 우의정이 되었다. 같은해에 좌의정이 되었다가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이듬해 권력남용과 뇌물을 받은 혐의로 삼사의 탄핵을 받고 사직하였다.
그뒤 아부한 죄로 관작을 삭탈당하였다.
심달원의 아버지는 심원. 할아버지는 영의정을 지낸 청송부원군 공숙공 심회이다.
심회(沈澮)
1418(태종 18)∼1493(성종 24).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청보(淸甫). 아버지는 영의정 온(溫)이며, 세종의 비 소헌왕후(昭憲王后)의 동생이다.
할아버지 때부터 벼슬하기 시작하여 아버지 온은 영의정에까지 올랐으나, 1418년(태종 18)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던 중 태종을 비난한 사건에 관련되어 의주에서 체포되고, 이어 사사되었다.
이 때문에 세종 때에는 등용되지 못하다가 세종 말년에 아버지가 신원되자, 문종이 즉위한 뒤 음직으로 돈녕부주부에 등용되었다. 이어 동지돈녕부사를 거쳐, 1454년(단종 2) 첨지중추원사·동지돈녕부사를 역임하고, 1457년(세조 3) 지중추원사·공조판서를 지냈다.
1458년 중추원부사·판한성부사를 거쳐, 1459년 안주선위사(安州宣慰使)를 겸하고 판중추원사가 되었다.
1461년 영중추원사·형조판서를 거쳐, 1463년 경기도관찰사가 되고, 1466년 좌의정이 되었다.
이듬해 영의정이 되고, 1468년(예종 즉위년) 남이(南怡)의 옥사를 처리하여 익대공신(翊戴功臣) 2등에 책봉되고 청성군(靑城君)에 봉해졌다.
1471년(성종 2) 원상(院相)으로서 서정(庶政)에 참여하고, 1473년 진충협보(盡忠夾輔)의 공으로 좌리공신(佐理功臣) 2등에 책록되고 청송부원군(靑松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뒤 성종의 신임을 받아 국가의 대소정사에 참여하였고, 1486년 궤장(几杖)을 하사받았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 때 연산군의 모친인 윤비(尹妃)의 폐출사건에 동조하였다는 죄로 관직이 추탈되고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였으나, 뒤에 신원되었다. 시호는 공숙(恭肅)이다.
심회의 아버지는 심온
심온(沈溫)
?∼1418(세종 즉위년).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중옥(仲玉). 세종의 장인이며, 개국공신 청성백(靑城伯) 덕부(德符)의 아들이다.
고려 때 문과에 급제하여 고려조정에서 벼슬을 하다가 아버지와 함께 조선왕조 창업에 참여하여 간관의 직무를 맡아보았다.
1408년(태종 8) 그의 딸이 충녕군(忠寧君)의 비가 되면서 왕실과 인척관계를 맺고, 벼슬도 높아졌다.
1411년 풍해도관찰사가 되어 백성을 침탈하고 병기관리에 소홀한 수군첨절제사 박영우(朴英祐)를 파직시키고, 이어서 대사헌이 되어서는 관기확립에 힘썼다.
1414년 변정도감제조(辨正都監提調)·형조판서를 역임하면서 고려 후기에 권세가들에 의하여 천민으로 바뀐 양민들의 신분정리사업에 이바지하였고, 이어서 호조판서·좌군총제·판한성부사를 역임하였는데, 세자인 양녕대군(讓寧大君)의 행동에 연루되어 대간에 의해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그뒤 이조판서·공조판서를 역임하고, 양녕대군을 대신하여 충녕대군이 세자로 책봉되고, 이어서 세종으로 즉위하자 국구(國舅)로서 영의정이 되어 정치의 실권을 가까이하기에 이르렀다.
1418년(세종 즉위년)에는 사은사(謝恩使)로서 명나라에 가게 되었는데, 이때에 그의 동생 정($증01)이 병조판서 박습(朴習)과 같이 상왕인 태종의 병권장악을 비난한 것이 화근이 되어, 이듬해 귀국 도중에 의주에서 체포되어 수원으로 압송, 사사되었다.
이 사건은 그가 국구로서 세력이 커짐을 염려한 태종과 좌의정 박은(朴訔)의 무고로 밝혀져, 뒤에 세종은 관직을 복위시키고, 안효(安孝)라는 시호를 내렸다. 죽음에 임하여 유언으로 박씨와 혼인하지 말도록 당부하니, 오랫동안 지켜졌다.
심온의 아버지 심덕부
심덕부(沈德符)
1328(충숙왕 15)∼1401(태종 1). 고려말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득지(得之), 호는 노당(蘆堂)·허당(虛堂). 아버지는 전리정랑(典理正郎) 용(龍)이다.
고려 충숙왕 복위년 말에 음직(蔭職)으로 사온직장동정(司溫直長同正)에 출사한 이후 좌우위녹사(左右衛錄事)를 거쳐 1364년(공민왕 13) 수원부(水原府)의 수령이 되었다. 공민왕 말년에 판위위시사(判衛尉寺事), 우왕 즉위 후 우상시(右常寺)를 거쳐 우왕 원년에 예의판서(禮儀判書)에 승직되었고, 이어 밀직부사 상의회의도감사(商議會議都監事)와 강계도만호(江界都萬戶)·의주부원수(義州副元帥)·서해도원수(西海道元帥) 등의 요직을 거쳤다.
1378년(우왕 4) 밀직사로 재임하면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로서 서해도원수를 겸하여 여러 차례 왜구토벌에 공을 세웠는데, 특히 1380년 도원수 나세(羅世)와 함께 최무선(崔茂宣)이 제조한 화포를 처음 실전에 사용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1385년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로서 동북면상원수(東北面上元帥)를 겸하여 북청(北靑)에 침략한 왜구를 토벌하는 등 이성계(李成桂)와 함께 동북면에 침구한 왜구를 토벌하는 데 공을 세웠다. 같은해 겨울에는 하정사(賀正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왔고, 귀국 후에 청성부원군(靑城府院君)에 봉해졌다.
1388년의 요동출병 때에는 서경도원수(西京都元帥)로서 조민수(曺敏修)와 함께 좌군에 속하여 이성계의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을 도와주었다.
또한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세우는 폐가입진(廢假立眞)에는 이성계·정도전(鄭道傳)·정몽주(鄭夢周)와 더불어 주도적인 구실을 하여 이른바 9공신 중의 한 사람이 되었고, 공양왕 즉위 직후에 문하좌시중 경기좌우도 평양도통사(門下左侍中京畿左右道平壤都統使)에 올랐으며, 이듬해에 청성군충의백(靑城君忠義伯)에 봉해졌다.
그러나 같은해 말에 비어(飛語)에 따른 무고로 인하여 일시 황해도 토산(兎山)에 유배되었다.
그뒤 1391년(공양왕 3) 다시 문하좌시중에 복직되고, 하정사인 왕세자 석(奭)의 종사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이성계·정몽주와 함께 안사공신(安社功臣)이 되었다.
1392년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로 조선의 개국을 맞아, 1393년(태조 2) 회군공신(回軍功臣) 1등에 추록되며, 청성백(靑城伯)에 봉하여졌다.
1397년 판문하부사, 이듬해에 영삼사사(領三司事)를 거쳐, 72세 때인 1399년(정종 1)에 좌의정이 되었다가 이듬해에 치사하였다. 고려말 정치제도의 개혁과 왜구토벌에 업적을 남겼으니, 공양왕 때에 관찰사제를 폐지하고 안렴사제(按廉使制)를 부활하였으며, 제사(諸司)의 서무를 도당(都堂)에 직접 보고하게 한 것 등이 그것이다.
조선왕조 개국 후에는 신왕조 건설의 일익을 담당하였는데, 1394년에는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의 판사가 되어 한양의 궁실과 종묘를 영건(營建)하는 일을 총괄하여 신도건설에 큰 구실을 하였다. 그에게는 일곱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다섯째 아들인 온(溫)은 세종의 국구(國舅)가 되었으며, 여섯째 아들인 종(淙)은 태조의 부마가 되어, 왕실과의 혼인을 통하여 거족(巨族)으로 성장하는 기틀이 그에게서 이루어졌다. 처음 시호는 공정(恭靖)이며 나중에 정안(定安)으로 고쳤다.
친정의 가계를 살펴보면
심덕부-
7남중 5남 심온(장녀소현왕후(세종대왕비)
심회-
심원-
심순문 -
1.심연원 영의정 손녀가 인순왕후(명종비)
2.심달원
3.심봉원(승지)
4.심통원(우의정)
심달원+이조참판 尹希仁의 딸
1.심鎭 2. 심자 3.심銓 4.심 鐩
심전의 막내사위가 바로 도사공(김대섭)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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