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백범일지( 66)기적장강만리풍(寄跡長江萬里風)8. 중경 생활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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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6-11-20 14:05 조회1,566회 댓글0건본문
8. 중경 생활의 추억
나는 의정원에 나아가 해산도 총사직도 천만부당하다고 단언하고 서울에 들어가 전체 국민의 앞에 정부를 내어 바칠 때까지 현상대로 가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여 전원의 동의를 얻었다. 그러나 미국측으로부터 서울에는 미국 군정부가 있으니 임시 정부로서는 입국을 허락할 수 없은즉, 개인의 자격으로 오라 하기로 우리는 할 수 없이 개인의 자격으로 고국에 돌아가기로 결정하였다.
이리하여 7년간의 중경 생활을 마치게 되니 실로 감개가 많아서 무슨 말을 써야 할지 두서를 찾기가 어렵다.
나는 교자를 타고 강 건너 화강산에 있는 어머님 묘소와 아들 인의 무덤에 가서 꽃을 놓고 축문을 읽어 하직하고 묘지기를 불러 금품을 후히 주어 수호를 부탁하였다.
그러고는 가죽 상자 여덟 개를 사서 정부의 모든 문서를 싸서 중경에 거류하는 5백여 명 동포의 선후책을 정하고, 임시 정부가 본국으로 돌아간 뒤에 중국 정부와 연락하기 위하여 주중화 대표단을 두어 박찬익을 단장으로 민필호(閔弼鎬), 이 광(李光), 이상만(李象萬), 김은충(金恩忠) 등을 단원으로 임명하였다.
우리가 중경을 떠나게 되매 중국 공산당 본부에서는 주은래(周恩來), 동필무(董必武) 제씨가 우리 임시 정부 국무원 전원을 청하여 송별연을 하였고, 중앙 정부와 국민당에서는 장개석 부처를 위시하여 정부, 당부, 각계 요인 2백여 명이 모여 우리 임시 정부 국무 위원과 한국 독립당 간부를 초청하여 국민당 중앙당부 대례당에서 중국기와 태극기를 교차하고 융숭하고도 간곡한 송별연을 열어 주었다.
장개석 주석과 송미령 여사가 선두로 일어나 장래 중국과 한국 두 나라가 영구히 행복되도록 하자는 축사가 있고 우리 편에서도 답사가 있었다.
중경을 떠나던 일을 기록하기 전에 7년간 중경 생활에 잊지 못할 것 몇 가지를 적으려 한다.
첫째 중경에 있던 우리 동포의 생활에 관하여서다. 중경은 원래 인구 몇 만밖에 안 되던 작은 도시였으나 중앙 정부가 이리로 옮겨온 후로 일본군에게 점령당한 지방의 관리와 피난민이 모여들어서 일약 인구 백만이 넘는 대도시가 되었다. 아무리 새로 집을 지어도 미처 다 수용할 수 없어서 여름에는 한데에서 사는 사람이 수십만이나 되었다.
식량은 배급제여서 배급소 앞에는 언제나 장사진을 치고 서로 욕하고 때리고 하여 분규가 아니 일어나는 때가 없었다. 그러나 우리 동포는 따로 인구를 선책하여서 한 몫으로 양식을 타서 하인을 시켜 집집에 배급하기 때문에 대단히 편하였고 쌀을 쓸기까지 하였다. 먹을 물도 사용인을 시켜 길었다.
중경시 안에 사는 동포들뿐 아니라, 교외인 토교(土橋)에 사는 이들도 한인촌을 이루고 중국 사람의 중산 계급 정도의 생활을 유지할 수가 있었다. 간혹 부족하다는 불평도 있었으나 규율 있고 안전한 단체 생활을 유지할 수가 있었다.
나 자신의 중경 생활은 임시 정부를 지고 피난하는 것이 일이요, 틈틈이 먹고 잤다고 할 수 있었다. 중경의 폭격이 점점 심하여가매 임시 정부도 네 번이나 옮겼다.
첫 번 정청인 양류가(楊柳街) 집은 폭격에 견딜 수가 없어서 석판가(石版街)로 옮겼다가 이 집이 폭격으로 일어난 불에 전소하여 의복까지 다 태우고 오사야항(吳獅爺巷)으로 갔다가 이 집이 또 폭격을 당하여 무너진 것을 고쳤으나 정청으로 쓸 수는 없어서 직원의 주택으로 하고 네 번째로 연화지(蓮花池)에 70여 칸 집을 얻었는데 집세가 1년에 40만 원이라, 그러나 이 돈은 장 주석의 보조를 받게 되어 임시 정부가 중경을 떠날 때까지 이 집을 쓰고 있었다.
이 모양으로 연이어 오는 폭격에 중경에는 인명과 가옥의 손해가 막대하였으나 동포 중에 죽은 이는 신익희 씨 조카와 김영린의 아내 두 사람이 있었다.
이 두 동포가 죽던 폭격이 가장 심한 폭격이어서 한 방공호에서 4백 명이니 8백 명이니 하는 질식자를 낸 것도 이때였다.
그 시체를 운반하는 광경을 내가 목도하였는데 화물 자동차에 짐을 싣듯 시체를 싣고 달리면 시체가 흔들려 굴러 떨어지는 일이 있고, 그것을 다시 싣기가 귀찮아서 모가지를 매어 자동차 뒤에 달면 그 시체가 땅바닥으로 엎치락뒤치락 끌려가는 것이었다. 시체는 남녀를 물론하고 옷이 다 찢겨서 살이 나왔는데 이것은 서로 앞을 다투어 발악한 형적이었다.
가족을 이 모양으로 잃어 한편에 통곡하는 사람이 있으면 다른 편에는 방공호에서 시체를 끌어내는 인부들이 시체가 지녔던 금, 은, 보화를 뒤져서 대번에 부자가 된 것도 있었다. 이렇게 질식의 참사가 일어난 것이 밀매음녀 많기로 유명한 교장구(較場口)이기 때문에 죽은 자의 대다수가 밀매음녀였다.
중경은 옛날 이름으로는 파(巴)다. 지금은 성도(成都)라고 부르는 촉(蜀)과 아울러 파촉이라고 하던 데다. 시가의 왼편으로 가릉강(嘉陵江)이 흘러와서 바른 편으로 오는 양자강과 합하는 곳으로 천 톤급의 기선이 정박하는 중요한 항구다. 지명을 파라고 하는 것은 옛날 파 장군(巴將軍)이란 사람이 도읍하였던 때문이어서 연화지에는 파 장군의 분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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