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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갓댁 고모댁 (33) 철원부사(김확)공 배위 동래정씨(6대급제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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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6-11-24 12:41 조회1,63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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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갓댁 고모댁 (33) 철원부사(김확)공 배위 동래정씨(6대급제가문)

 

상의원정과 철원부사를 지내신 김확 선조님의 배위는 동래정씨로서 6대 연속 과거급제자를 낸 명문가이십니다.

아버지는 정언신(명종21년 급제)-우의정. 큰아버지는 정언지(명종13년급제)-승지,한성부좌윤. 할아버지는 정진(중종26년급제)-예조좌랑. 오라버니 정협(선조21년급제)-대사헌,이조판서. 이후 정세미(광해원년급제)-정언, 도호부사 정세구(광해4년급제)-승지,전라감사

정유(인조17년급제) -승지. 정수(효종1년급제)정언, 정랑, 정래상(숙종5년급제-승지.-

 

1.정진-2.정언신-3.정협-4.정세미-5.정수-6.정래상 6대 연속 급제한 집안입니다.

 

정언신(鄭彦信)

1527(중종 22)∼1591(선조 2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입부(立夫), 호는 나암(懶庵). 예조좌랑 진(振)의 아들이다.

1566년(명종 21)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이 되고, 1571년(선조 4) 호조좌랑으로 춘추관기사관이 되어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고, 그뒤 전라도도사·장령·동부승지 등을 거쳤다.

그뒤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함경도병마절도사로 나가 변민(邊民)을 잘 다스리고 녹둔도(鹿屯島)에 둔전(屯田)을 설치하여 군량미를 풍족하게 비축하였다. 이어 대사헌으로 옮겼다가 부제학이 되었다.

1582년(선조 16) 니탕개(尼湯介)가 쳐들어오자 우참찬으로 함경도도순찰사에 임명되어 막하로 이순신(李舜臣)·신립(申砬)·김시민(金時敏)·이억기(李億祺) 등 뛰어난 명장들을 거느리고 적을 격퇴하였다.

이어 함경도관찰사로 북쪽 변방을 방비하고 병조판서에 승진되었다.

1589년 우의정이 되어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후 그 잔당에 대한 옥사를 다스리고는 위관(委官)에 임명되었으나, 서인 정철(鄭澈)의 사주를 받은 대간으로부터 정여립의 구촌친(九寸親)이므로 공정한 처리를 할 수 없다는 탄핵을 받아, 위관을 사퇴하고 이어서 우의정도 사퇴하였으며, 정철이 위관을 대신하였다.

그뒤 역가문서(逆家文書)가운데에 그가 들어 있다는 것을 구실로 정철 등으로부터 계속 정여립의 일파로 모함을 받아 남해에 유배되었다가 투옥, 사사(賜死)의 하교가 있었으나 감형되어 갑산에 유배, 그곳에서 죽었다.

1599년에 복관되었다. 문경의 소양사(瀟陽祠)에 제향되었다.

 

정언지(鄭彦智)

1520(중종 1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연부(淵夫). 예조좌랑 진(振)의 아들이며, 우의정 언신(彦信)의 형이다.

1554년(명종 9) 인정전(仁政殿) 정시(庭試)에서 으뜸을 차지하여 직부전시(直赴殿試)의 자격을 받았고, 1558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61년 전적을 시작으로 형조좌랑·정언·지평을 거쳐, 선조 때에 교리·의주목사·승지·대사헌·대사간을 역임하였으며, 1589년(선조 22)에는 이조참판에 올랐다.

《명종실록》 편찬시에는 교리에 있으면서 기주관으로 활약하였고, 승지 때에는 이이(李珥)와 군자가 이름을 구하는 것에 대하여 논란을 펴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가 승지가 되었을 때 사헌부에서는 평소에 명망이 적어 그 직에 마땅하지 않음을 아뢰고 있었다.

그러다 정여립(鄭汝立)의 역모사건이 일어나자 무고로 역적과 친족으로 교분이 두터웠던 인사로 지목되었으며, 양사의 탄핵으로 언신은 중도부처(中途付處)되고, 언지는 강계로 귀양에 처하여졌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은 영남인 권유(權愉)의 반대상소에도 불구하고 1594년 그를 한성부좌윤으로 임명하여 복관시켰다.

 

정협(鄭協)1

1561(명종 16)∼1611(광해군 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화백(和伯), 호는 한천(寒泉). 우의정 언신(彦信)의 아들이다.

1585년(선조 18) 진사시에 장원한 뒤 1588년에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검열·정자를 지냈다.

1589년 아버지가 정여립(鄭汝立)의 모역사건에 연루되어 남해로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죽은 뒤로는 미관말직으로 전전하다가 1599년 아버지가 신원(伸寃)되자, 검상에 기용되었다.

이때부터 보덕·수찬·헌납·장령·사인·판교·사간·부응교·응교·사예 등을 역임하였다.

1605년 동지부사로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와 동지중추부사·대사간 등을 지내고,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이조참판·좌부빈객·대사헌·대사간·부제학·예조참판·동지의금부사를 거쳐 이듬해 동지춘추관사·예조참판·이조판서가 되었다.

문장에 능하여 앞서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역대실록을 중간할 때에는 편수관으로 참여하였다. 시주를 즐기고, 노소현우를 가리지 않고 교유하였다고 한다.

 

정세미(鄭世美)

1583(선조 16)∼1624(인조 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사원(士元), 호는 동와(東窩). 참판 협(協)의 아들이다.

1606년(선조 39) 진사가 되고, 2년 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도사가 되었다.

1608년 태학생(太學生)으로 있을 당시 호남의 유생 고경리(高敬履) 가 성혼(成渾)이 정여창(鄭汝昌)·김굉필(金宏弼)·조광조(趙光祖)·이황(李滉)의 4현(賢)의 도를 이어 받아 정주학을 계승하였다고 주장하며 그의 신원을 청할 때, 이언적(李彦迪)을 논외로 함은 그의 학문적 업적을 깎아내리는 처사라고 그 부당함을 상소하였다.

1611년(광해군 3) 수찬을 거쳐 정언·도호부사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정세구(鄭世矩)

1585(선조 18)∼1635(인조 1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대방(大方).

좌의정 언신(彦信)의 손자로, 율(慄)의 아들이다.

1612년(광해군 4)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1613년 승정원주서를 거쳐 4년 뒤 병조좌랑이 되었는데, 대북파의 이이첨(李爾瞻)이 집권하고 있을 때였으므로 그의 장인 이효원(李孝元)이 소북파 유영경(柳永慶)의 일파라고 하여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다.

1625년(인조 3) 사헌부지평·세자시강원필선·사헌부장령 등을 역임하였으며, 1627년 2월 주문사(奏聞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30년 전라감사, 다음해에 승지를 지냈고, 1635년 다시 전라감사로 있다가 그해 전주부윤으로 전직된 뒤 죽었다.

명민유재(明敏有才)라는 세평을 들었다.

 

정세규(鄭世規)
1583(선조 16)∼1661(현종 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군칙(君則), 호는 동리(東里).
좌의정 언신(彦信)의 손자로, 율(慄)의 아들이다.
1613년(광해군 5) 사마시에 합격하고, 문음(門蔭)으로 의금부도사를 거쳐 화순현령·안산군수를 역임하였는데, 모두 혜정(惠政)을 베풀어 표리(表裏)를 하사받았다.
1636년(인조 14)에 조신(朝臣)들의 추천을 받아 4품의 산질(散秩)에서 충청도관찰사로 특진되고, 그해 겨울 병자호란으로 왕이 남한산성에서 포위되자 근왕병을 이끌고 포위된 남한산성을 향하여 진격하다가 용인·험천(險川)에서 적의 기습으로 대패하였다.
이때의 충성심으로 패군의 죄까지 면죄받고 전라감사·개성유수를 거쳐 공조판서에 임명되었다.
이때 사헌부는 문음출신으로 특별한 정적(政績)이 없어 육경(六卿)이 될 수 없다고 강격히 반대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형조판서·전주부윤·대사헌·호조판서·함경감사·지의금부사·우참찬 등을 번갈아 역임하고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1654년(효종 5) 강화유수가 되어 승천(昇天)·연미(燕尾)·갑곶(甲串)·광성(廣城)  등에 진(鎭)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그의 출세에는 김육(金堉)의 뒷받침이 있었다고 하는데, 조선시대에 문음출신으로 육경에 오른 가장 대표적 인물이다. 시호는 경헌(景憲)이다.

 

정수(鄭修)3

1609(광해군 1)∼1662(현종 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공신(公愼). 비장연부사 세미(世美)의 아들이다. 문장에 능통하였다.

1630년(인조 8) 진사가 되었으며, 1650년(효종 1)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사간원정언을 거쳐 병조정랑·예조정랑·영춘현감·지평 등의 요직을 지냈다.

1660년(현종 1)에는 대사간 이경억(李慶億), 사간 박세모(朴世模) 등과 함께 윤선도(尹善道)의 비리를 탄핵하여 함경도로 안치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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