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산홍씨
페이지 정보
솔내영환 작성일06-12-06 11:49 조회1,522회 댓글1건본문
풍산홍씨
시조는 고려 고종 때 국학직학(國學直學)을 지낸 지경(之慶)이다. 이 파는 조선 헌종 때의 세도가문으로 유명하다. 조선시대에 상신 5명, 문형 3명을 비롯,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는데, 모두 시조의 9대손인 이상(履祥)의 후손이다. 그의 아들 여섯이 모두 문과에 올랐는데, 이들 여섯 아들에게서 손자 11명을 얻었으며, 6대손에서는 140여 명으로 자손이 번창, 풍산홍씨의 세력 신장과 직결되었다.
여섯 아들 중에서도 넷째 영(霙)의 후손이 가장 번창하였다. 영의 아들 주원(柱元)은 선조의 부마가 되었고, 주원의 큰아들 만용(萬容)은 숙종 때 예조판서, 만용의 손자 현보(鉉輔)는 영조 때 예조판서를 각각 지냈는데, 이 현보의 아들이 유명한 봉한(鳳漢)과 인한(麟漢)이다. 봉한은 영조 때 영의정을 지냈으며, 사도세자의 비이자 정조의 생모(生母)인 혜경궁(惠慶宮) 홍씨의 아버지이다.
이들 두 형제는 사도세자의 죽음으로 인한 궁중참변의 격동을 맞아 형 봉한은 부왕(父王) 영조의 실덕(失德)을 힐책하는 시파(時派)로, 아우 인환(좌의정)은 세자의 실덕을 규탄하는 벽파(僻派)로 갈리어 날카롭게 대립하였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정조를 세손 때부터 보호한 사람이 국영(國榮)인데, 그는 주원의 둘째아들인 만형(萬衡)의 5대손으로 정조가 즉위하자 도승지와 숙위대장이 되어 세도정치를 휘두르지만 4년을 채우지 못하고 막을 내렸다.
풍산홍씨의 대표적 학자로는 양호(良浩)와 만선(萬選)을 꼽는다. 양호는 당대의 뛰어난 학자요 문장가로 《영조실록》 《국조보감(國朝寶鑑)》 등의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중국의 석학들과 교유하고 돌아와 고증학(考證學)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또 지방관으로 있을 때에는 치산(治山) 식수에 힘썼고, 1764년(영조 40)에는 일본에서 벚나무를 들여와 서울 우이동에 심어 경승지를 이루게 하였다.
한편, 만선은 숙종 때의 실학자로 실학사상 많은 업적을 남겼는데, 그의 저서 《산림경제(山林經濟)》는 후일 실학 연구에 커다란 바탕이 되었다. 그밖에 회인홍씨에서는 윤성(允成)을 배출하였는데, 그는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을 도와 정난공신 2등이 되고, 예종 때에는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댓글목록
김윤식님의 댓글
![]() |
김윤식 |
---|---|
작성일 |
풍산홍씨와 인연이 무척 깊네요. 대부님 귀한 자료 감사합니다.
▣ 1242년 壬寅榜 고종 29년 4월 樞密院副使金敞김창 判禮賓省事薛愼설신 取進士 賜乙科三人 丙科七人 同進士十七人 明經二人 恩賜八人及第
홍지경洪之慶 國子直學 豊山人 (장원급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