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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백범일지 (67)기적장강만리풍(寄跡長江萬里風)10. 추억이 어린 곳들을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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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6-12-08 09:54 조회1,73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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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추억이 어린 곳들을 찾아

용담(龍潭) 스님께 보각서장(普覺書狀)을 배우던 염화실(捻花室)에서 뜻깊은 하룻밤을 지내었다. 승려들은 나를 위하여 이날 밤에 불공을 드렸다. 그러나 승려들 중에는 내가 알던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이튿날 아침에 나는 기념으로 무궁화 한 포기와 향나무 한 그루를 심고 마곡사를 떠났다.

셋째 길에 나는 윤봉길 의사의 본댁을 찾으니 4월 29일이라, 기념제를 거행하였다. 그리고 나는 일본 동경에 있는 박 열(朴烈) 동지에게 부탁하여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白貞基) 세 분 열사의 유골을 본국으로 모셔오게 하고, 유골이 부산에 도착하는 날 나는 특별 열차로 부산까지 갔다. 부산은 말할 것도 없고 세 분의 유골을 모신 열차가 정거하는 역마다 사회, 교육의 각 단체며 일반 인사들이 모여 봉도식을 거행하였다.

서울에 도착하자 유골을 담은 영구를 태고사(太古寺)에 봉안하여 동포들의 참배에 편케 하였다가 내가 친히 잡아 놓은 효창 공원(孝昌公園) 안에 있는 자리에 매장하기로 하였다. 제일 위에 안중근 의사의 유골을 봉안할 자리를 남기고 그 다음에 세 분의 유골을 차례로 모시기로 하였다.

이날 미국인 군정 간부도 전부 회장하였으며, 미국 군대까지 출동할 예정이었으나 그것은 중지되고 조선인 경찰관, 육해군 경비대, 정당, 단체, 교육 기관, 공장의 종업원들이 총출동하고 일반 동포들도 구름같이 모여서 태고사로부터 효창 공원까지 인산인해를 이루어 일시 전차, 자동차, 행인까지도 교통을 차단하였다.

선두에는 애곡하는 비곡을 아뢰는 음악대가 서고 다음에는 화환대, 만장대가 따르고 세 분 의사의 영여(靈輿)는 여학생대가 모시니 옛날 인산(因山)보다 더 성대한 장의였다.

나는 삼남 지방을 순회하는 길에 보성군 득량면 득양리 김씨촌을 찾았다. 내가 48년 전에 망명중에 석 달이나 몸을 붙여 있던 곳이요, 김씨네는 나와 동족이었다. 내가 온다는 소문을 듣고 동구에는 솔문을 세우고 길닦이까지 하였다. 남녀 동민들이 동구까지 나와서 도열하여 나를 맞았다.

내가 그 때에 유숙하던 김광언(金廣彦) 댁을 찾으니 집은 예와 같으되 주인은 벌써 세상을 떠났었다. 그 유족의 환영을 받아 내가 그 때에 상을 받던 자리에서 한 때 음식 대접을 한다 하여서 마루에 병풍을 치고 정결한 자리를 깔고 나를 앉혔다. 모인 이들 중에 나를 알아보는 이는 늙은 부인네 한 분과 김판남(金判男) 종씨 한 분뿐이었다.

김씨는 그 때에 내 손으로 쓴 책 한 권을 가져다가 내게 보여주었다. 내가 이곳에 머물고 있을 때에 자별히 친하게 지내던 나와 동갑인 선(宣) 씨는 이미 작고하고 내가 필낭을 기워서 작별 선물로 주던 그의 부인은 보성읍에서 그 자손들을 데리고 나와서 나를 환영하여 주었다. 부인도 나와 동갑이라 하였다.

광주에서 나주로 향하는 도중에서 함평 동포들이 길을 막고 들르라 하므로 나는 함평읍으로 가서 학교 운동장에 열린 환영회에 한 차례 강연을 하고 나주로 갔다. 나주에서 육모정(六角亭) 이 진사의 집을 물은즉, 이 진사 집은 나주가 아니요, 지금 지나온 함평이며, 함평 환영회에서 나를 위하여 만세를 선창한 것이 바로 이 진사의 증손이라고 하였다.

오랜 세월에 나는 함평과 나주를 섞바꾼 것이었다. 그 후에 이 진사 - 나와 작별한 후에는 이 승지가 되었다 한다 - 의 증손 재승(在昇), 재혁(在赫) 두 형제가 예물을 가지고 서울로 나를 찾아왔기로 함평을 나주로 잘못 기억하고 찾지 못하였던 사과를 하였다.

이 길에 김해에 들르니 마침 수로왕릉의 추향이라, 김씨네와 허씨네가 많이 참배하는 중에 나도 그들이 준비하여 주는 평생에 처음으로 사모와 각대로 참배하였다.

전주에서는 옛벗 김형진의 아들 맹문(孟文)과 그 종제 맹열(孟悅)과 그 내종형 최경렬(崔景烈) 세 사람을 만난 것이 기뻤다. 전주의 일반 환영회가 끝난 뒤에 이 세 사람의 가족과 한 데 모여서 고인을 추억하며 기념으로 사진을 찍었다.

강경에서 공종렬의 소식을 물으니 그는 젊어서 자살하고 자손도 없으며 내가 그 집에 자던 날 밤의 비극은 친족간에 생긴 일이었다고 한다.

그 후 강화에 김주경 선생의 집을 찾아 그의 친족들과 사진을 같이 박고 내가 그 때에 가르치던 30명 학동 중에 하나였다는 사람을 만났다.

나는 개성, 연안 등을 순회하는 노차에 이 효자의 무덤을 찾았다.

'故孝子李昌梅之墓'

나는 해주 감옥에서 인천 감옥을 끌려가던 길에 이 묘비 앞에 쉬던 49년 전 옛날을 생각하면서 묘전에 절하고 그날 어머님이 앉으셨던 자리를 눈어림으로 찾아서 그 위에 내 몸을 던졌다. 그러나 어머님의 얼굴을 뵈올 길이 없으니 앞이 캄캄하였다. 중경서 운명하실 때에 마지막 말씀으로 '내 원통한 생각을 어찌하면 좋으냐' 하시던 것을 추억하였다.

독립의 목적을 달성하고 모자가 함께 고국에 돌아가 함께 지난 일을 이야기하지 못하심이 그 원통하심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저 멀고 먼 서쪽 화상산 한 모퉁이에 손자와 같이 누워계신 것을 생각하니 비회를 금할 수가 없다. 혼이라도 고국에 돌아오셔서 내가 동포들에게 받는 환영을 보시기나 하여도 다소 어머님의 마음이 위안이 아니 될까.

배천에서 최광옥 선생과 전봉훈 군수의 옛일을 추억하고 장단 고랑포(皐浪浦)에 나의 선조 경순왕릉(敬順王陵)에 참배할 적에는 능말에 사는 경주 김씨들이 내가 오는 줄 알고 제전을 준비하였었다.

나는 대한 나라 자주 독립의 날을 기다려서 다시 이 글을 계속하기로 하고 아직은 붓을 놓는다.

서울 새문 밖에서

<기적장강만리풍(寄跡長江萬里風)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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