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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酒) 예찬(禮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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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영 작성일06-12-19 15:18 조회1,507회 댓글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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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술(酒) 예찬(禮讚)

장취불성(長醉不醒), 술을 계속 마시어 깨어나지 않은 상태를 두고 하는 말이다.

평생을 얼큰히 취한 채 지낼 수 있다면 축복받은 삶이라 여겨진다. 딴 사람은 몰라도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술은 고마운 음식이다.

그 공과(功過)를 두고는 의견이 분분할 것이나, 술이 있음으로 해서 찌들고 메마른 우리 생활을 윤택하게 하는 윤활유 구실을 해 왔다는 데는 딴 의견이 없을 줄로 안다.

술은 행복한 음식이다.

기쁜 일엔 술이 있어 기쁨을 더하고, 슬픈 일엔 술이 있어 시름을 달랠 수도 있으니 그 아니 좋을손가. 밥이나 다른음식은 배고픔을 잊게는 하지만 아무리 먹어도 흥은 나지 않는다. 세상에 이렇게 좋은 음식이 없다.

술은 약이 되는 음식이다.

세상에 아무리 양약이 많다지만 술만큼 좋은 약은 없다. 그래서 술을 약주라 했던가. 독약도 적당히 쓰면 양약이 되듯이 제 주량에 맞게 적당히 마시고 봄안개처럼 은은히 오르는 취기를 자신이 가누면 삶은 다시 신선하고 기쁜 의욕을 일으킨다.

술은 때로는 멀쩡한 사람을 미치게 하기도 하고 사람의 마음을 화창하게 하기도 한다.

술 자체가 어찌 나쁠까만 사람들은 술만 나쁘다 한다. 얼마나 적당하게 마시느냐에따라 술은 때론 광약(狂藥)도, 때론 선약(仙藥)도 되는 것이다.

술은 정(情)의 음식이다.

크게 금이 간 사이도 술잔을 나눔으로써 슬며시 조화를 이루게 되는 것도 술이 갖는 정 때문이다. 술잔의 오고 감은 서로의 의(誼)를 터서 정을 나누겠다는 무언의 표시다.

이렇게 술을 예찬하는 나를 두고 술깨나 마시는 줄로 아실는지는 모르나 실은 작고하신 김사달(金思達)선생이 기초한 주당헌장(酒黨憲章)엔 음주역량에 따라, ① 주신(酒神), ② 주선(酒仙), ③ 주성(酒聖), ④ 주현(酒賢), ⑤주호(酒豪), ⑥ 주걸(酒傑), ⑦ 주사(酒士), ③ 주졸(酒卒)이란 영호(榮號)를 수여한다는 바, 그 영호에 대한 음주역량의 자세한 설명이 없어 내 주량이 어디에 해당하는지는 모르나 아마 주졸(酒卒)은 면한 듯 싶다.

하지만 두 홉들이 소주 두 병은 기본주량이 되니 어쩌면 이런 정도의 글을 쓸 자격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위대한 시인묵객이 술에 취한 채 술에서 얻는 예술적 영감으로 많은 걸작을 남긴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술을 마시면 때로는 시궁창도 아름답게 보인다. 이런 상황에선 시가 저절로 나올 만하다.

시선(詩仙) 혹은 주선(酒仙)이라 일컫는 이백(李白)의 시(詩)에 다음과 같은 귀절이 있다.

  불괴천인생 (不愧天人生)

  天若不愛酒 酒星不在天

  地若不愛酒 地應無酒泉

  天地旣愛酒 愛酒不愧天

  己聞淸北聖 復道濁如賢

  賢聖旣己飮 何必求神仙

  三杯通大道 一斗合自然

  但得酒中趣 勿爲醒者傳.

(하늘이 만약 술을 좋아하지 않았다면 하늘에는 주성(酒星)이라는 별이 없을 것이요, 만약 땅이 술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이 지구 위엔 주천(酒泉)이란 땅이 없었을 것이다. 하늘이나 땅도 술을 사랑하는데, 하물며 하늘 밑 땅 위에 사는 인간이 술을 좋다고 한들 천도(天道)에 부끄러울게 없다.

옛날 청주를 「성인」이라 일컫고, 탁주를 「현자」라고 칭했듯이 범속한 범인이라도 성인이나 현자를 뱃속에 삼키는 것이나 다를 바 없으므로 구태여 수양을 하고 도를 닦기 위해 심산유곡에 들어가 고행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큰 잔으로 석 잔을 마시면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여도 자연의 대도에 통하고, 한 말을 마시면 도연한 경지에 이르러 자연 그대로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술을 마시는 것은 속세를 떠나 무욕하고 초연한 경지에 설 수 있고, 또한 올바르고 곧은 행동과 사상을 체득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주도를 술을 못하시는 졸장부(醒者) 따위에게 들려 주어도 이 도리를 터득할 리가 없으므로 차라리 얘기를 않는 편이 좋을 것이다. )

역시 이백(李伯)답다.

賢聖旣已飮 何必求神仙에서도 감탄을 금치 못하고 노장사상(老莊思想)의 허무와 낭만적 인생관과 우주관을 근거로 한 三杯通大道 一斗合自然에 이르서는 이미 주도를 통하여 신선의 경지를 터득하고 있음을 알 수 있기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기사년(己巳年) 세모를 앞둔 12월 24일, 존경해 마지않던 난인 향파(香坡) 김기용(金琪容)선생께서 유명을 달리하셨다.

조용히 고향을 지키신 어른이셨기에, 또한 동향인이었기에 존경의 도가 더했던 향파선생, 비보를 접한 날 가슴 한켠이 무너지는 절망감에 술을 찾게 되었다.

이날 따라 인생의 무상함에 송강의 장진주사(將進酒辭)를 몇 번이고 읖조렸다.

  장진주사(將進酒辭)

  한잔 먹세 그려, 또 한잔 먹세 그려

  곳것거 산노코 무진무진 먹세 그려

  이 몸이 죽은 후면 지게 위에 거적 덮어

  주리혀 매여가나 유소보장(流蘇寶帳)의 만인이 우려네나

  어욱새 속새 덮가 나못 백양(白場)수페 가기곳 가면

  누른해 흰달 가난비 굴근눈 쇼쇼리 바람불제 뉘한잔 먹자할고

  하물며 무덤위에 잰나비 파람불제 뉘워친달 어디리.

 

영겁(永劫)에 비하면 찰나(刹那) 같은 인생, 그 죽음을 앞두고 술을 대함이 너무나 절박하고 처절함에 오싹 한기를 느끼기도 한다.

'술을 좋아하고 호방한 성격을 지녔다'는 송강, 그의 장진주사를 읊조릴 때마다 그 처연(悽然)함에 비오듯 눈물을 홀리며 잔을 들고픈 충동이 인다. 

옛 선비의 술 마시는 단아(端雅)한 법도(法道)를 본받아 유연(悠然)히 술잔을 기울이고 싶은데, 취생몽사(醉生夢死)하는 일만은 삼가해야겠는데, 술이 호락호락하지 않음에 문제가 있다.

그러나 저러나 건강을 이유로, 오너드라이버를 이유로 술 친구는 자꾸만 줄어들고 세상은 점차 약아지고 있다.

씁쓸한 일이다.

과하면 화를 부르는 게 비단 술뿐이 아니고 인간사가 다 그런게 아니겠는가.

장취불성(長醉不醒), 적어도 내가 보기엔 괜찮은 인생살이인 것 같다.


능곡 이성보 선생님의 에세이 -난과 술-중에서


댓글목록

김태영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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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년말년시 술을 대하는 일이 많아지는 시기입니다.
- 옛 선비의 술 마시는 단아(端雅)한 법도(法道)를 본받아 유연(悠然)히 술잔을 기울이고 싶은데, 취생몽사(醉生夢死)하는 일만은 삼가해야겠는데, 술이 호락호락하지 않음에 문제가 있다.-

김발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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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醉中妄言醒後悔
저 근신중입니다.

김주회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주회
작성일

  醉中妄言醒後悔
저도 근신중입니다.
어쩜 요즘의 내 신세를 그대로 써 놓으셨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