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贈嘉善大夫工曹參判安東金公墓碣銘幷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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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윤 작성일06-12-29 19:27 조회1,399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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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시 홈페이지의 천안소개란에 실린 내용을 옮겨왔습니다

 

제목 碑文읽기(공조참판 안동 김공 묘갈명)
작성자 김찬회 작성일 2003-04-09 오후 11:24:50 조회 827
아래의 碑文은 지난 3월 하순에 고향 충북 괴산군 청천면 고현
에 소재한 筆者에게 10대조 되시는 參判公의 山所를 莎草하고 碑
石을 改竪하면서 鐫刻한 것입니다. 내용과 관계없는 분들은 심심
파적으로 읽어 보시면 비문의 작법과 실증적 사료에 의한 기술등
으로 文,史의 工夫에 一毫라도 도움이 될것이며  天安일원에 世
居하는 수많은 安東金氏들은 宗中 傍祖의 史蹟記을 읽고 차제에 
尊祖睦族의 念을 갖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참고로 이 글은 筆者의 家親이 撰하였으며 금년 춘추 九十이십
니다.
          贈嘉善大夫工曹參判安東金公墓碣銘幷序
 公의 諱는 世達이요 字는 士章이며 貫은 安東大姓이니 新羅 敬
順大王에서 系出하였다.
 高麗朝의 賢相名將으로 그 勳業이 靑史에 燦然한 上洛郡開國公 
門下侍中(僉議中贊) 上將軍(都元帥) 諡 忠烈 諱 方慶은 十四代 
中始祖이고 麗末의 精忠大節로 杜門洞守義七十二賢에 드신 按廉
使 梧隱公 諱 士廉은 十代派祖이니 名公鉅卿이 繼世輩出한 名門
으로 世稱한다.
 屢傳하여 贈 通政大夫 工曹參議 諱 繼貞은 武陵.桃源에 卜居入
鄕하니 公의 曾祖이고 王考는 獻陵參奉 諱 麟瑞이며 考 諱 玭은 
行誼와 學問을 推重하여 通德郞에 追敍되시고 비(女+比)는 恭人 
南原 梁氏로 居士 應湖의 女이니 聰慧貞純하고 孝事舅姑하여 鄕
隣이 敬服하였다.
 公이 仁祖三年(一六二五)乙丑 九月 二十九日 鄕第에서 二男四女
중 第二子로 生誕하시니 天資端雅하고 才藝가 英邁하여 早歲就學
으로 工課가 日就月將하였기로 稱歎이 名振鄕閭하였다.
 於時에 公의 再從叔인 成川都護府使 金언(玉+言)公이 그 才能
을 寵愛하여 任所에 데려가 冊房에 두고 學業을 敎督하는 一方 
小事를 寸補케 하니 公이 一心奮發하여 任務를 完遂하는지라 人
皆賞讚하니라.
 奈何乎, 仁祖十四年(一六三六) 十二月 國運 비(不+口)塞으로 丙
子胡亂이 勃發하여 疆土가 遑遑하고 마침내 胡敵의 大軍이 侵攻
해 오므로 民心이 渙散하여 收拾이 不可能한 地境에 이르렀다.
 府使公이 急히官兵을 團束하여 順川으로 달려가 慈母山城을 前
進防禦하던 觀察使 洪命耉公에게 附屬해 주고 자신은 遑急히 돌
아와 州內의 義兵을 招募하여 檜巖山城에 依據 成川의 防衛와 敵
의 進路를 遮斷하는데 萬全코자 하였으나 倉卒間에 大亂에 直面
하니 民心이 凶雜히 潰亂되어 衆寡不敵의 窮地에 빠지게 되었다.
 府使公이 胡敵의 戰勢와 進路戰況과 防禦策을 記錄한 狀啓를 朝
廷에 올리고자 할새 敵의 包圍網을 脫出할 可能性이 있는 幼少年
인 再從姪(世達公)에게 下命하고 내쳐 無事歸鄕토록 措處하였다.
 公은 急히 行裝을 꾸려 山中으로 逃亡하여 小刀로 狀啓書札을 
썰어서 麻繩과 비벼꼬아 짐끈을 만들어 지고 至死爲限하고 京師
로 晝夜倍道 치달아 올라갔다.
 峻險한 山谷을 넘고 湍深한 江河를 건너 마침내 漢陽城에 當到
하여 詣闕코자 할새 守門將의 制止를 받자 重大使命임을 說得呼
訴하고 期於이 朝廷에 들어가 行裝끈을 풀어 連輻하니 內容이 昭
詳한지라, 여러 宰臣이 奇特히 여겨 主上께 上奏함으로서 上께
서 親히 引見하시어 그 行路難을 慰撫하고 `忠臣之家에 又有忠
臣이라 賞讚하시며 `此兒가 長成하는 대로 錄用토록 하라 윤음
을 내리시었으니 公의 時年이 十三歲였다.
 다시 戰況을 돌이켜 보건대 再從父 成川府使公은 及其也 敵에 
包圍되어 力戰血鬪하다가 大聲罵敵끝에 殉節하시니 城中 府民이
悲痛하여 마지않았다.
 또한 平安觀察使 洪命耉公은 成川失陷의 悲報를 듣고 裨將으로 
하여금 府使公의 遺骸를 거두어 返葬케 하고 二千兵力을 引率하
여 金化로 南下하였는데 그곳 역시 郡長이 淪溺하였고 城中이 空
洞인지라 여기 萬景山城을 決戰場으로 殉職하니 遺恨千秋로다. 
 敵軍은 漢陽城을 攻略하고 王駕避亂處인 南漢山城을 包圍하니 
及其也 翌年(一六三七) 丁丑 正月 廣州 三田渡에서 仁祖大王이 
淸太宗에게 恥辱的인 降伏으로 丙子胡亂은 終末이 났다.
 參判公은 일찌기 堪耐키 어려운 苦楚를 겪고 歸鄕했으나 그 生
涯는 時代的으로 不運의 連續이었으니 戰亂後의 民生苦와 끊임없
는 黨爭으로 寧日이 없고 더욱이 同宗의 不祥事인 洛西公의 政治
的 失脚으로 波及되는 壓力등 雄起할 意志와 勇力을 銷沈한채 靑
衿時節을 度日하게 되었다.
 먼저 修己之學에 專心하는 한편 鄕黨諸生 啓導에 全力함을 畢生
의 祖業으로 삼고 先訓에 따라 家業을 守成하면서 生涯를 忠善一
貫하니 一鄕의 師表로 推仰되었다.
 噫라, 公이 顯宗十五年(一六七四)甲寅 十一月 二十二日 享年五
十으로 下世하시니 이곳 古縣 鷹峰山脈이 東走해 오고 博大川이 
上峰山기슭을 휘어드는 向南 子坐之原에 體魄之藏을 모시었다.
 肅宗四年(一六七八) 戊午에 先王의 윤음을 奉行하여 禮曹判書 
雪峰 姜栢年公의 筵奏로 工曹參判에 贈職되시니 비로소 少年時節
의 爲國忠節이 顯揚되고 宗門의 榮譽를 世傳케 되었다.
 配 贈貞夫人 文化柳氏는 士人 以健의 女로 閨範이 淑婉하며 貞
和勤儉하였고 仁祖七年(一六二九) 己巳에 出生하여 肅宗三十年
(一七ㅇ四) 甲申十二月 二十九日 卒하시니 墓는 合폄되었다.
 後嗣로는 斗山 斗柄 斗井의 三男二女를 生하고 孫은 長房에서 
潤坤 致燁 致爀 致煜이며 伯氏 諱 世敏이 斗栢 斗松의 二男一女
를 生하였으니 自是로 孫勢가 蕃衍 昌盛하고 繼承하여 많은 英明
俊才가 輩出하였다.
 今玆 公 歿後 三百三十年에 舊墓表가 矮小하고 誤謬가 露呈되
어 改竪키로 宗議가 이루어져 後胤 不文으로 이를 補遺하며 삼
가 銘을 바치노니,
  關西千里 險難한길  晝夜不息 跋涉끝에
  허위단심 狀啓奉行  闕門앞에 伏地하니,
  主上께서 引見하사  行路難을 愛憫하고
  忠臣之門 又有忠臣  優渥하신 傳敎셨네.
  成川順川 金化고을  抗戰하신 殉節之士
  한결같이 文臣이라  痛恨之事 그아닌가.
  文武兼全 忠烈上祖  懿行따라 竭力하면
  爲國爲先 雙全이요  富國强兵 成就하리.

     檀記 四三三六年(二ㅇㅇ三) 癸未 三月   日
  安東金氏大宗會 顧問  前 按廉使公派宗會長
                九代孫        在  華  謹撰
  參判公.隸下(諱 斗山 諱 以鉉) 三聯合 宗會
                裔 孫 一 同           重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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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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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안렴사공파의 회장님이셨던 재화대부님께서 찬하신 參判公(휘 세달)의 묘비문을 잘 읽었습니다. 재화대부님은 당대 문중사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지니시고 종사운영에 크게 이바지하셨던 분이십니다. 작년에 운명하신 것으로 압니다.
홈 안렴사공파란에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