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문인록 - 만취당 김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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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영 작성일06-12-30 12:09 조회1,755회 댓글1건본문
김사원(金士元)의 자(字)는 경인(景仁)이고 호는 만취당(晩翠堂)이며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중종(中宗) 33年(1539년) 의성(義城)에서 출생하여 퇴계선생(退溪先生)에게 훈도(薰陶)를 받은 후 덕행(德行)을 실천한 선비였다.
천성이 인자(仁慈)하고 어릴때부터 공부를 즐겨하였던 만취당은 20세가 지난후에 퇴계선생 문하(門下)에 들어가 훈학을 받았으며 이때 선생은 무이(武夷) 관선재(觀善齋)에 관한 詩를 써 주면서 면학(勉學)을 장려하였다.
도산(陶山)에서 훈학을 받던중 山에 들어가 공부하다가 病이 위중하게되자 先生이 경계하기를 ‘고인(古人)들이 학문(學問)을 하는데 비록 근고(勤苦)했다고 하지만 어찌 생병(生病)을 얻어 父母의 근심을 끼치는데 이르러서야 되겠느냐’고 하여, 건강을 돌보면서 공부하게 했다는 일화(逸話)도 있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 영남(嶺南)의 선비들이 의병(義兵)에 가담하여 왜적(倭敵)과 싸울때 의성재정장(義城齋整將)에 추대되어 의병대장(義兵大將) 김해(金垓)를 도우면서 활약했던 그는 전란통(戰亂通)에 굶주리는 지방민들에게 자기집 곡식과 음식물을 골고루 나누어 주어 살아날 수 있도록 도왔으며 난리가 평정된 후 도움 받은 사람들이 土地와 물건을 가져와 사례하는것조차 거절한 덕망(德望)있는 선비였다.
학문을 닦으면서 농사일에도 힘써 가난한 사람들을 무상(無償)으로 구제한적도 있으며 이러한 선행(善行)에 대하여 이 지방 사람들은 ‘김씨의창(金氏義倉)’이라고 불렀다고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이와같이 일생(一生)동안 관직(官職)을 멀리하고 학문(學問)과 영농(營農)에만 힘쓴 만취당은 일찍이 ‘선비가 처세(處世)하는데 의(義)아닌 것으로 녹(祿)을 받지 말것이오 오직 본분(本分)에 진력(盡力)하면 거의 허물이 없을것이며 言行을 삼가는 한편 독서(讀書)를 부지런히 하고 농상(農桑)에 힘쓰는 등 세가지 일을 스승의 가르침대로 수행할것이다.’고 말했다고 번암 채제공(樊巖 蔡濟恭)이 지은 묘갈(墓碣)에 적혀있다.
환고후(還故後) 고향에 월난정사(月蘭精舍)를 지어 학문에 정진(精進)하다가 1601년(선조 34년)에 서거하니 향년이 63세였으며 의성 후산사(后山祠)에 배향되었다.
출전: 퇴계문인록(退溪門人錄) (1983년 李熙大 編著)
댓글목록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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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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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광산김인 김해와 깊은 관계가 있었군요. 그리고 임란 당시 지방민들에게 베푼 큰 배려도
잘 알았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