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전관(歷辭銓官)에 불가작감사어(不可作感謝語)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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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발용 작성일07-01-09 19:33 조회1,535회 댓글1건본문
요즘 전별금이니 전관예우니 하는 뉴스가 심심찮게 들립니다. 이럴 때 꼭 읽어보아야 할 목민심서의 한 대목.
역사전관(歷辭銓官)에 불가작감사어(不可作感謝語)니라.
解釋
전관(銓官)에게 들러 하직 인사를 하면서 감사하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解說
전관은 나라를 위하여 사람을 뽑아 쓴 것이니 사사로운 은혜를 끌어대서는 안 되며, 수령은 자격에 따라 관직을 얻는 것이니 사사로운 은혜라는 생각을 마음속에 품어서는 안 된다. 한 자리에서 이야기를 나누더라도 말이 자신을 추천해 준 데에 미쳐서는 안 될 것이다.
조선 숙종 때 사람 참의(參議) 김변광(金汴光)이 병조낭관(兵曹郎官)을 지내고 물러나 시골에 궁하게 살면서 벼슬을 구하지 않았는데, 윤씨(尹氏) 성을 가진 어떤 사람이 전관이 되자 그를 용강현령(龍岡縣令)으로 임명하였는데, 그 후에 윤씨가 딸을 혼인 시키면서 말(馬)을 보내달라고 도움을 청하였다. 김변광은 이런 답서를 보냈다.
"가난하면 서로 도와주는 것이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도리이나 혐의 받을만한 경우에는 군자(君子)로서 삼가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공과는 전부터 사귀던 사이가 아니었으며, 후에는 천거해서 발탁해 준 힘을 입었으니, 비록 명분이 있는 선물일 뿐 재물을 취하는 일이 아니겠지만, 모르는 자들은 반드시 이러쿵저러쿵 말을 할 것입니다. 변변치 못한 이 사람이 수십 년 스스로 지켜온 바를 하루아침에 잃게 된다면, 어찌 청덕(淸德)에 누가 되고 아름다운 명예에 손상이 되지 않겠습니까? 심부름꾼을 그냥 돌려보내니 부끄럽고 송구하기 그지없습니다."
김변광(金汴光)
1694(숙종 20)∼1767(영조 43).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경실(景實)로 승지 김구만(金龜萬)의 손자이다.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경종 3년(1723)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 대교에 임명되었다. 그 뒤 병조 정랑과 용강현령을 역임하고, 영조 41년(1765) 공조 참의로서 벼슬에서 물러난 뒤 후진 양성에 힘썼다. 용강 현령으로 있을 때 권력을 쥐고 있던 윤모(尹某) 재상의 청탁을 물리친 일화가 목민심서에 전하고 있다. 정조 20년(1796) 호군 채홍(蔡弘)의 천거로 사후에 청백리로 녹선되었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正祖實錄, 牧民心書, 國朝人物志
영조 105권 41년 1월 27일 (계유) 004 / 이성규·원인손·이해중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이성규(李聖圭)를 승지(承旨)로, 원인손(元仁孫)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이해중(李海重)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이현조(李顯祚)를 사간(司諫)으로, 남운로(南雲老)를 장령(掌令)으로, 서명선(徐命善)을 헌납(獻納)으로, 윤사국(尹師國)·이동현(李東顯)을 정언(正言)으로, 김변광(金?光)을 공조 참의(工曹參議)로 삼았다. 김변광은 호서(湖西)에 살다가 일찍이 용강(龍崗)으로 부임하여 청렴하다는 이름이 있었다. 〈체직되어〉 돌아와서는 승자(陞資)되었는데 수년이 되도록 통정직(通政職)의 의망을 받지 못하였다. 이에 이르러 이조 판서 김치인(金致仁)이 비로소 의망하였으니, 임금이 김치인을 불러 하교하기를,
“근래의 정사에는 매양 서울 사람을 우선적으로 하였는데, 경은 시골에 있는 김변광 같은 자를 먼저 좌이(佐貳)16162) 로 의망하였으니, 가히 그 공정한 마음을 알겠다. 이러한 마음을 이어간다면 나는 근심할 것이 없겠다.”
하였다.
【원전】 44 집 191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註 16162]좌이(佐貳) : 참판(參判)이나 참의(參議)
댓글목록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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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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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청렴결백한 삶을 살았던 참의공(휘 변광)선조님의 미담을 잘 읽었습니다. 홈에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