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과 점을 잇는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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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석 작성일07-01-12 14:26 조회1,497회 댓글1건본문
역사는 과학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역사에 진리란 있을 수 없습니다.
기록되는 역사는 전체의 흐름에서는 한 점에 불과합니다.
그 점이 자주 기록되어 거의 선을 이룰 수만 있다면 역사의 흐름을 쉽게 알 수 있겠지만, 우리의 고려시대 역사 혹 은 충렬공의 역사는 그렇지가 못 합니다.
흐르는 역사위에 어쩌다 찍혀있는 한두 점만으로는 전체의 선을 조감도 보듯이 볼 수는 없고 약간의 상상력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다 보니 점과 점을 잇는 후세 사람 개개인은 직선을 그릴 수도 있고, 곡선을 그릴 수도 있습니다. 직선이냐 곡선이냐에 따라서 역사의 해석이 달라져버리고 그 달라진 해석은 경우에 따라 학문적 논쟁도 불러 옵니다. 조선 시대의 사화 중에는 이런 선을 긋는 각도가 원인이 되어 여러 사람들이 죽고 다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다르게 긋고 싶은 선 하나를 소개 하겠습니다.
1274년과 1281년 일본 정벌을 위해 충렬공께서 출진한 곳은 합포(마산)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1281년 신사재정은 금주(김해)라고 생각 됩니다.
고려사에 나타난 1281년의 기록 몇 항목을 옮겨봅니다.
1281, 3.16
김방경이 군대를 거느리고 합포로 출발
1281, 3.18
흔도, 홍다구 개경 도착
1281, 4,1
왕이 합포로 떠남
1281, 4.18
왕이 합포에서 군대를 사열
1281, 5.3
동정군이 일본으로 떠남
1281, 5.28
홀로물탑(원나라 장수)수군 113명, 초공 수수 36명 익사 사고
1281, 6.19
왕이 경주에 들리다
1. 출진 날짜까지 충분한 시간이 있었지만, 충렬공께서는 흔도 등이 도착하기 이틀 전에 개경을 떠나버립니다.1278 년 무고 사건의 악몽으로 그들의 얼굴을 대하기가 매우 부담스러웠을 것입니다.
2. 합포에는 이미 정동행성이 설치되어 몽골군이 주둔하고 있고 또 흔도 등이 정동 행성에 부임토록 되어있으 니, 충렬공께서는 금주의 분산성을 목표로 하였을 것 입니다.(1274년에는 조선 완공된 전함을 금주에 집결시켰습니다.--낙동강 하구 둑을 부두로 사용하지 않았을까?)
3. 당시 영남으로의 이동 경로는 해로를 이용하는 방법과 충주를 거쳐 새재를 넘는 방법이 있었는데 충렬공께서는 후자를 택하여 안동의 영호루에서 시 한 수도 남기는 등 여유 있는 일정을 가지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4. 국왕 또한 같은 경로를 이용하여 금주의 분산성에서 충렬공의 환대 속에(신증 동국여지승람 제 32권.김해도호부. 불우. 금강사) 찻잔을 마주하며 차향에 매료되어 차 이름을 장군차로 하명하고 4, 18일 임박하여 합포로 출발하였을 것입니다.
5. 사열식이 끝난 후 충렬공께서는 곧바로 금주의 분산성으로 되돌아와서 송악의 신에게 제사(신증동국여지승람 제 32권.김해도호부. 사묘. 송악당.--원래 신께 올리는 제사는 출진 임박하여 출정식과 겸하여) 지낸 후 출진하였을 것입니다.
6. 동원된 선박 수는 모두 900척, 그중 길이 30m 가 넘는 250t-300t 되는 큰 배 만 하여도 300척인데 합포만은 그렇게 넓지가 못합니다.(승선인원-149명. 쌀- 3000석 적재. 닻의 중량- 1t)
7. 고려군은 금주에서, 몽골군은 합포에서 출발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상호 연락은 봉수(분산성에 현재도 보존)를 이용하였을 것입니다. 각 각 출발한 동로군은 거제의 송변포 앞바다에 집결하여 보름이상의 합동 훈련이 있었을 것입니다.(5. 21일 대마도 동쪽 세계촌 대명포 도착)
8. 고려사에 모든 지명이 합포로 기록된 것은 정동행성이 중심이 되었기 때문이 아니겠느냐 생각합니다.
9. 당시 국왕이 지방에서 유숙하였다면 엄청난 사건이었겠지만 합포(마산)에서는 야사이던 구전이던 그런 내용이 전혀 없습니다.
10. 신증동국여지승람. 제 28권 상주목. 불우. 승장사.
“ 고려 충렬왕이 중국 조정의 명령을 받아 상락공 김방경을 명하여 동으로 왜구를 정벌하는데, 왕이 김해부에 거동하여 전송하고 돌아올 때 이 절에 유숙하고---- ”
선이 많으면 정신만 혼미해 집니다.
바라보는 눈을 혼란스럽게 하였습니까?
댓글목록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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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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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충렬공께서 김해에서 일본원정을 시작했다고 보는 시각. 설득력이 있습니다.
1)충렬공께서 김해에서 송악신에게 제를 올렸다는 것,
2)합포에는 당시 그 모든 전선을 정박할 수 없었다는 것
3)왕이 김해의 절에 기숙했던 점
등은 중요한 논거가 됩니다.
감사합니다.
간과했던 부분을 다시 집중력있게 살펴보게 하셨습니다.
* 증보 김해지리지 (김해문화원, 1996)
●松嶽壇(송악단)
옛날의 松嶽堂(송악당)으로 金剛社의 서북 약 200步許에 있는 작은 구릉으로서 神祠(신사)를 松嶽堂이라고 했다.
고려의 충렬왕 즉위년(1274) ★金方慶 장군이 일본을 정벌할 때 金剛社에서 留宿(유숙)했는데, 그때 개경의 松嶽神을 이곳에서 제사지내고 戰勝을 빌었으므로 이 구릉을 松嶽堂이라 부르게 되고, 김해 사람도 城隍神과 함께 반드시 제사를 지냈다.
세종때 지리지를 보면 府北 3里에 있는 [盆山城隍護國之神](분산성황호국지신)에게 守令이 行祭한다고 나와 있다.
지금은 高麗葬터, 白雲臺라고도 부르고 있다.